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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신앙에 항상 우선할 수 있을까요??? [교리용어_양심] 969_토미즘학습 108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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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2/4 [175.115.220.*]

2011-08-02 ㅣ No.1089

 
 
+ 찬미 예수님!
 
이 글은, 어떤 자가 하였던,
 
(1) "양심이 신앙을 우선한다"
 
라는 주장,
 
그리고
 
(2)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 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기 위하여 마련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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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지금까지, 위의 첫 번째 주장을 하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을 읽은 기억은 전혀 없으며, 제가 알기로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으로, 그러한 언급을 할 이유 혹은 필요성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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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가톨릭 보편 교회가 가르치는, "양심(conscience)""신앙(faith, 믿음)" 이라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부터 제대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1-1. 여기를 클릭하면, "양심(conscienc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약간 성가시더라도, 아래로 이동하기 전에, 클릭하여 제1항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2. 여기를 클릭하면,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신앙(faith, 믿음)"의 정의(definition)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약간 성가시더라도, 아래로 이동하기 전에, 클릭하여 제0항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위의 두 개의 글들을 읽어 보시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 양심(conscience)에 대하여 언급한 글에서는, 언제 양심이 각 개인의 영혼(soul) 안에 형성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
 
2-2. 이와는 대조적으로, 믿음(faith, 신앙, 신덕), 희망(hope, 망덕), 사랑(charity, 아가페, 애덕)으로 이루어진, 향주삼덕(three theologic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신앙(faith, 믿음)"은 세례를 받을 때에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과 함께 세례를 받는 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입시켜 주신다 ["새 번역 성경" 지혜서 15,11의 본문 표현으로 하면, 불어넣어 주신다].1) 따라서, 세례를 받기 이전에는 이 "신앙(faith, 믿음)"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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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NAB 성경 지혜서 15,11에서 "infuse"로 번역된 표현이 "새 번역 성경" 지혜서 15,11에서 "불어넣어 주다"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표현이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말함은 다음의 제2-3항에 주어진 설명에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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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infusion(주입)"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INFUSION
The pouring of water upon the head of a person being baptized. Practiced already in the first century, it is the most common form of baptismal ritual in the Western Church today. The term also applies to the creative act of God by which he unites the rational soul with the body at the moment of the conception of a human being. (Etym. Latin in-, in + fundere, to pour: infusio, a pouring into.)
 
주입(INFUSION)
 
세례를 받고 있는 자의 머리 위에 물을 붓는 것을 말합니다. 기원후 1세기에 이미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서방 교회에 있어 세례 예식(baptismal ritual)의 가장 통상적 정식(formula)입니다. 이 용어는 또한, 한 인간의 수정(conception)의 순간에 당신께서 이것에 의하여 이성적 영혼(the rational soul)을 몸(the body)과 결합시키시는(unites) 바로 하느님의 창조 행위(creative act)에 적용됩니다. [어원. Latin in-, in + fundere, to pour: infusio, a pouring into.] 
 
2-4. 아래의 설명 중의 필요에 의하여서 입니다만,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supernatural order(초자연적 순서)"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SUPERNATURAL ORDER

The sum total of heavenly destiny and all the divinely established means of reaching that destiny, which surpass the mere powers and capacities of human nature.
 
초자연적 순서(SUPERNATURAL ORDER)
 
하늘에 있는 미리 예정된 순서(heavenly destiny)2) 및 바로 이 순서에 도달하는 하느님의 작인(作因)에 의하여(divinely)3) 제정된 수단들 모두의 전체(sum total)를 말하는데, 이 순서는 인간 본성의 단순한 힘들 및 능력들을 능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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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destiny(미리 예정된 순서)"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DESTINY

In general, the preordained order of events. Human destiny, therefore, is the divine ordering of all secondary causes by God leading to the goal of human existence, which is the heavenly possession of God. But always this destiny is conditional, depending on one's voluntary co-operation with divine grace. In pagan terms destiny is the fate to which a person is necessarily predestined. (Etym. Latin de, down + stanare, to cause to stand: destinare, to destine, resolve firmly.)
 
미리 예정된 순서(DESTINY)
 
일반적으로, 사건들에 대한 미리 예정된 순서를 말합니다. 인간의 미리 예정된 순서는,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목표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에 의한 모든 두 번째 원인(secondary causes)들에4) 대한 하느님의 배치(the divine ordering)를 말하는데, 이것은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소유(the heavenly possession of God)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러한 순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당사자의 자발적 협조에 달려 있는, 조건적(conditional)입니다. 다신교인(pagan, 즉 비그리스도교인)들의 용어들에 있어 destiny는 어떤 자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운명(the fate)을 말합니다. [어원. Latin de, down + stanare, to cause to stand: destinare, to destine, resolve fir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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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게시자 주: "divinely"를 "하느님의 작인(作因)에 의하여"로 번역한 것은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다음의 설명을 따른 것이다:
divinely: by the agency or influence of God divinely endowed with certain rights>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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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the secondary cause(두 번째 원인)"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SECONDARY CAUSE

A created cause that is totally dependent on the First Cause, who is God. It is a cause that can produce a certain kind of effect but cannot produce the being or existence of the effect.

두 번째 원인(SECONDARY CAUSE)
 
하느님이신 첫 번째 원인(the First Cause)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어떤 창조된 원인(a created cause)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종류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나(produce) 그러나 그 결과로부터 있음(有, being) 혹은 존재(existence)를 산출할 수 없는 어떤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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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덕(virtues)들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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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초자연적 덕들은 하느님에 의하여 즉시 야기되거나 혹은 주입됩니다(caused or infused). 그러나 하나의 덕(a virtue)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들로 주입된다(infused)라고 불릴 것입니다: 첫 번째로, 바로 그 본질에 의하여(per se, 직접적으로) 하느님 홀로에 의하여 그것이 효과적으로 산출될 수 있을(can be produced) 때, 두 번째로, 부수적으로(accidentally) (per accidens), 그러나, 아담과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의 섭리(a Divine dispensation)에 의하여 그것이 주입된, 우리의 고유한 행위(acts)들에 의하여 그것이 습득될(may be acquried) 때.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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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느님께는 시,공간이 무의미하므로, 위의 제2-3항 및 제2-4항의 설명에 의하여, 초자연적 덕들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heaven)에, 초자연적 순서(supernaural order)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인 신학 대전에 주어진 "향주덕(theological virtues, 대신덕)"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여러 용어들의 정의를 참고하면서, 초자연적 향주덕(the supernatural theological virtues)들이 어떻게 대단히 명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 차분히 읽고 묵상하실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이 설명은, 당연히, 향주덕들 중의 하나인 믿음(faith, 신앙, 신덕)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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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대전 여행, Ia IIae, q62, a2"로부터 발췌 시작]

2. These theological virtues are not acquired by any act or effort of man. They are supernaturally infused; they are poured into the soul by almighty God. The existence and nature of these virtues are made known to us by divine revelation. Hence these virtues are essentially distinct from the moral and intellectual virtues. The theological virtues are supernaturally infused; the moral and intellectual virtues are acquired. And we must be careful to distinguish the supernatural theological virtues of faith, hope, and charity, from the natural virtues which are known by the same names.

 

2. 이들 향주덕(대신덕)들은 사람의 어떤 행위 혹은 노력에 의하여 습득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으로 주입되며(infused); 그리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하여 [사람의] 영혼 안쪽으로 부어집니다. 이들 덕들의 존재 및 본성(existence and nature)은 하느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 의하여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따라서 이들 덕들은 본질적으로 윤리덕들 및 지성덕들(the moral and intellectual virtues)로부터 구분됩니다(distinct from). 향주덕들은 초자연적으로 주입되며, 그리고 윤리덕들 및 지성덕들은 습득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faith, 신앙, 신덕), 희망(hope, 망덕), 사랑(charity, 애덕)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 향주덕(the supernatural theological virtues)들을 동일한 이름들에 의하여 알려져 있는 자연덕/본성덕(the natural virtues)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신학 대전, Ia IIae, q62, a1"으로부터 발췌 시작] 

On the contrary, The precepts of the Law are about acts of virtue. Now the Divine Law contains precepts about the acts of faith, hope, and charity: for it is written (Sirach 2:8, seqq.): "Ye that fear the Lord believe Him," and again, "hope in Him," and again, "love Him." Therefore faith, hope, and charity are virtues directing us to God. Therefore they are theological virtues.

 

이와는 달리, 율법의 규범들은 덕의 행위(acts of virtue)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법(Divine Law, 신법)은 믿음(faith, 신앙, 신덕), 희망(hope, 망덕), 그리고 사랑(charity, 애덕)의 행위들에 관한 규범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그리고 또다시, "주님에 희망을 걸어라", 그리고 또다시. "주님을 사랑하라" (집회서 2,8, 그리고 뒤따르는 절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애덕)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덕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향주덕(theological virtues)들입니다.

 

I answer that, Man is perfected by virtue, for those actions whereby he is directed to happiness, as was explained above (Question 5, Article 7). Now man's happiness is twofold, as was also stated above (Question 5, Article 5). One is proportionate to human nature, a happiness, to wit, which man can obtain by means of his natural principles. The other is a happiness surpassing man's nature, and which man can obtain by the power of God alone, by a kind of participation of the Godhead, about which it is written (2 Peter 1:4) that by Christ we are mad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And because such happiness surpasses the capacity of human nature, man's natural principles which enable him to act well according to his capacity, do not suffice to direct man to this same happiness. Hence it is necessary for man to receive from God some additional principles, whereby he may be directed to supernatural happiness, even as he is directed to his connatural end, by means of his natural principles, albeit not without Divine assistance. Such like principles are called "theological virtues": first, because their object is God, inasmuch as they direct us aright to God: secondly, because they are infused in us by God alone: thirdly, because these virtues are not made known to us, save by Divine revelation, contained in Holy Writ.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사람은 덕에 의하여 완미(完美)하게 되는데, 이는, 위에서 설명되었듯이 (Question 5, Article 7) 그러한 행동(actions)들에 의하여 그가 행복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의 행복은, 또한 위에서 서술되었듯이(Question 5, Article 5), 두 겹(twofold) 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본성에, 즉, 사람이 자신의 본성적 원리(natural principles)들에 의하여 획득할 수 있는 어떤 행복(a happiness)에, 비례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을 능가하는(surpassing),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 홀로의 힘에 의하여, 이것에 관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the Divine nature)에 참여하게" 됩니다 (2베드로 1,4)라고 쓰여져 있는 신성(Godhead)에의 참여의 어떤 종류에 의하여, 획득할 수 있는 어떤 행복입니다. 그리고 왜냐하면 그러한 행복이 인간 본성의 능력을 능가하기 때문에, 자신이 능력에 따라 잘 처신하도록 허락하는 사람의 본성적 원리들은 이 동일한 행복으로 사람을 향하게 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추가적인 원리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조력 없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성적 원리(natural principles)들에 의하여, 심지어 자신의 선천적인 목표로 그가 향하게 되듯이, 그는 초차연적 행복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을(may) 것입니다. 그러한 유사한 원리(like principles)들은 "향주덕(theoratical virtues)들"이라고 불리는데, 첫 번째로, 왜냐하면 우리를 하느님께로 올바르게 향하게 하는 한, 그들의 대상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안에 하느님 홀로에 의하여 주입되기 때문이며, 세 번째로, 왜냐하면 이들 덕들이, 성전(聖典, Holy Writ, 즉 성경)에 포함된, 하느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 의하여서 이외에는(save),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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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른 한 편으로, 위의 제1항에서의 첫 번째 주장에는, 주장자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가 위의 제1-2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와 다를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하거나,
 
혹은 설상가상으로,
 
영어로 "faith"로 번역되는 표현 및 영어로 "belief"로 번역되는 표현 둘 다를, 우리말로 "믿음(신앙)"으로 영한 사전들에서 설명하고 있는대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사용하는 "믿음(신앙)"이라는 용어는, 영어로 "faith"로 번역되는 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i)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생각하고 있는 믿음(신앙)"belief" 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ii) 하느님께서, 당신을 향하여 다가 오고자 하는 자에게, 주입시켜 주시는 믿음(신앙)"faith" = "fides" 라는 용어로 표현하며,
 
(iii) 각자 다를 수 있는 "belief"를, 신앙 생활을 통하여, 죄인들의 구원의 필요 조건인 동일한 그리고 유일한 "faith"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일반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 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을 읽을 때에 지금 말씀드린 이 요약을 염두에 두고 학습하시면, 상당히 쉽게 그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이에 대한 더 상세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을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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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의 제2-2항의 설명에 따라, 언제 "믿음(faith, 신앙)"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주어지는지를 신학적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질문 1: 언제 "양심(conscience)"이 각자의 영혼(soul) 안에 형성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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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피조물인 사람은 몸과 영혼(body and soul)이라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 비 분리적으로 결합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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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질문 2: 사람의 영혼(soul)은 각자가 잉태되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불어넣는다고 표현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 과정"을 거치듯이(창세기 2,7), 각자의 양심(conscience) 또한 각자가 잉태되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준다고 표현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 과정을 거칠까요?
 
(답변)
우선, 성경 본문 중에는, "믿음(faith, 신앙)" 및 "양심(conscience)"을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다는 표현은 전혀 없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성전(Sacred Tradition)이 그 핵심 내용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세례시에 하느님께서 "믿음(faith, 신앙)"을 주입시켜 주신다(infused)[즉 불어넣어 주신다, 즉 하늘에 있는 초자연적 순서의 구성원인 초자연적 덕(supernatural virtue)을 피조물의 영혼과 결합시켜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양심(conscience)"을 하느님께서 주입시켜 주신다(즉, 불어넣어 주신다)고 언급하고 있는 항은 전혀 없습니다.
 
참고 1: 하느님께서는 모든 선한 사물(good things)들만을 창조하시기에, 선하지 않은 어떤 것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에 충실한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에 의한 교화(illumination)의 대상인(위의 제1-1항 참조), 그리하여, 항상 선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로 이 "양심(conscience)"을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창조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더 일반적으로 말씀들 드려, 우리가 붙잡는(grasp), 알아차리는(catch), 알게 되는(become aware of), 혹은 느끼게 되는(feel) 것들 모두가, 하느님에 의하여 한처음에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중간 결론 1)
따라서, "믿음(faith, 신앙)"과는 크게 다르게, "양심(conscience)"을 하느님께서 주입시켜 주신다(즉 불어넣어 주신다, 즉 하늘에 있는 초자연적 순서의 구성원인 초자연적인 어떤 것을 피조물의 영혼과 결합시켜 주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도권이 또한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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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금까지 우리는, "양심(conscience)""믿음(faith, 신앙)"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믿음(faith, 신앙)"이 하늘에 있는 초자연적 순서(supernatural order)의 구성원인 한 개의 초자연 덕(a supernatural virtue)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 결론 2: 질문 (1)에 대한 답변] 
따라서, "믿음(faith, 신앙)"은, 적어도 아담과 하와 이후의, 즉 원죄(original sin)를 가지고 태어나는, 피조물인 어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늘(heaven)에 있는 두 번째 원인(the secondary cause)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의 제2-5항에 발췌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저서인 "신학 대전"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향주덕들이] 성전(聖典, Holy Writ, 즉 성경)에 포함된, 하느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 의하여서 이외에는(save),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보편적으로, "양심(conscience)""신앙(faith, 믿음)"을 앞선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어떤 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오래 전에, 이미 초자연적 향주덕들이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으므로, 초자연적 향주덕들은, 따라서 초자연적 믿음(faith, 신앙)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어떤 개인의 양심(conscience)에 역사/연대/시간적으로도 분명히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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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1. 이제 남은 혹은 이어지는 질문으로서,
 
질문 3: 어떤 이유/과정/무엇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입시켜 주시지 않는 "양심(conscience)"을, 특히 "윤리적 양심(moral conscience)"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느낄까요?
 
질문 4: 그리고 각 개인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언제쯤에, "양심(conscience)"이, 특히 "윤리적 양심(moral conscience)"이 형성될까요?
 
질문 5: 각 개인의 "양심(conscience)"은 세월이 가면서 변할까요 혹은 전혀 변하지 않을까요? 
 
이들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설명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2: 여기를 클릭하면, Father John A. Hardon, S.J. 의 저서인 Moral Theology 중에서 발췌한 다음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John A. Hardon 신부는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 의 저자이기도 하며, 다음의 발췌문에 의하면, 특히 위의 제1항에 주어진 "양심"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Conscience in Christianity. If law is the basis of human conduct, conscience is the means by which the moral law is apprehended and interpreted. Different authors have differently defined conscience. According to Jeremy Taylor, conscience is the mind of man governed by rule. For the English divine, Joseph Butler, "There is a superior principle of reflexion, or conscience, in every man, which distinguishes between the internal principles of his heart as well as his external actions, which passes judgment on himself and them." But the classic definition is that of Thomas Aquinas, for whom "conscience is the mind of man passing moral judgments."

 

그리스도교에 있어 양심. 인간의 처신의 근본이 법(law)이라고 하면, 양심은 그것에 의하여 윤리적 법이 인지되고 그리고 해석되는 바로 그 수단이다. 다른 저자들은 양심을 다르게 정의해 왔다. Jeremy Taylor에 따르면, 양심은 규정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잉글랜드의 신학자인 Joseph Butler에게 있어, "각 사람 안에는 어떤 최상의 성찰 원리, 혹은 양심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외적 행동(external actions)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의 내적 원리(internal principles)들 사이에서 구분하며, 이것은 자기 자신과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전통적 정의(definition)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인데, 그의 경우에 있어 "양심은 윤리적 판단들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mind, 즉, 지성)을 말한다."

 

Aquinas further recognizes two aspects of conscience, which are essential to a correct understanding of its concept. There is first of all synderesis or the permanent, inborn disposition of the mind to think of general and broad truths of moral conduct that become the principles from which a man may reason in directing his own moral activities. St. Jerome in the fifth century seems to have coined the term in Christian usage as the equivalent of "a spark of conscience," and Aquinas described it as a habitual quality of the intellect, enabling it to know the basic principles of practical reasoning. He never confused this faculty with conscience proper.

 

아퀴나스(Aquinas)는 더 나아가 양심의 두 양상(aspects)들을 알아차렸는데, 이 양상들은 양심의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데레시스(synderesis, 本性良心, 본성양심)가 2), 혹은, 거기로부터 사람이 자신 고유의 윤리적 행동들을 명령함에 있어 추론할 수도(may) 있는 원리들이 되는, 윤리적 처신(moral conduct)에 대한 일반적이며 폭넓은, 진리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하는 타고난 성향(inborn disposition)이, 있다. 성 예로니모(St. Jerome)는 5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사용에 있어 "양심의 불꽃(a spark of conscience)"의 등가 용어(the equivalent)로서 이 용어를 만들었던(have coined)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아퀴나스는 이것을, 지성에게 실천적 추론(practical reasoning)의 근본 원리들을 아는 것을 허락하는, 지성의 한 습관적 특성(a habitual character)으로서 설명하였다. 그는 이 능력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심(conscience proper)과 결코 혼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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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synderesis(本性良心)에 대한 용어 설명을 읽을 수 있다:

 

SYNDERESIS or SYNTERESIS

The habit of knowing the basic principles of the moral law; the knowledge of the universal first principles of the practical order. Sometimes applied to conscience, which is, however, rather the mind's concrete application of known principles, judging on the moral goodness or badness of a specific human action. (Etym. Greek synteresis, spark of conscience.) 

 

신데레시스(SYNDERESIS or SYNTERESIS, 本性良心)

 

윤리적 법의 근본 원리들을 아는 습관(habit)이며, 그리고 실천적 순서(practical order)의 보편적 첫 번째 원리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때로는 양심(conscience)에 적용되는데(applied),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어떤 특정의 인간의 행동(human action)의 윤리적 선함 혹은 불량함에 대하여 판단하는, 마음에 의한 알려진 원리들의 명확한 적용(application)이다. [어원. Greek synteresis, 양심의 불꽃(spark of con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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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ce in the strict sense, or conscientia, is the action of the practical intellect deciding whether a particular, proposed operation is good or bad, here and now. It is the conclusion at which reason arrives after duly applying the principles of morality to a specific course of action.

 

엄밀한 의미에 있어 양심(conscience in the strict sense), 혹은 conscientia 어떤 특별한, 제안된 작동(proposed operation)이, 여기서 그리고 지금, 선하거나 혹은 나쁜지(good or bad)에 대하여 결정하는 실천 지성(practical intellect)의 행동(action)를 말한다. 이것은 이성(reason)이 윤리의 원리(principles of morality)들을 행동의 어떤 특정의 과정에 정당하게 적용한 후에 도달하는 결론이다.

 

The word itself appears to have come from the ancient Stoics, but the idea it couches is distinctively Christian. Even the Hebrews had no exact equivalent. In the Old Testament, wherever moral judgments were spoken of, the terms lebh (heart) or ruach (spirit) are used. Nevertheless, it should be remarked that "heart" in the Scriptures, whether Old or New Testament, refers to the cognitive aspects of the mind and not to the will or emotions exclusively. 

 

이 단어 자체는 고대 스토아 학파(the ancient Stoics)로부터 유래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그러나 이것이 나타내는 개념은 독특하게 그리스도교적이다. 심지어 히브리인들도 정확한 등가 표현을 가지지 못하였다. 구약 성경에 있어, 윤리적 판단들이 말해졌던 장소 어디에서든, lebh [심장(heart)] or ruach [영(spirit)]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혹은 신약 성경이든지 간에, 성경 본문(the Scriptures)들에 있어, "심장(heart)" 마음(mind, 즉, 지성)의 인지적 양상(cognitive aspects)들에 대한 언급이며 그리하여 배타적으로(exclusively) 의지(will) 혹은 감정(emotion)들에 대한 언급만이 아님이 반드시 주목을 받아야 한다(be remarked).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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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시작]

다른 한편으로, 성경 본문들에서는 어떠할까요? 다음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합시다:
 
1-4. ["conscience(s)" 와 "양심" 의 등장 빈도 비교] 
상당한 숫자의 절들을 서로 비교/검토해 보면, 새 번역 성경의 본문 중에서 "양심" 으로 번역된 표현들이 NAB 본문에서 "conscience" 혹은 "consciences"로 번역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4-1. 교황청 홈페이직 제공하는 NAB 본문 중의 단어들에 대한 검색 결과들의 Data Base인, 여기를 클릭한 후에, NAB 의 본문 및 주석들에 대한 검색 결과들로부터,
 
 "conscience" 라는 표현이 약 41 - 12 = 29번 (여기서 12번은 입문들 혹은 주석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횟수), 그리고 
 
"consciences" 라는 표현이  약 7 - 2 = 5번 (여기서 2번은 입문들 혹은 주석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횟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NAB 본문 중에 "conscience" 혹은 "consciences" 라는 표현들이
 
약 29 + 5 = 34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NAB"의 구약 성경의 본문 중에서는 "conscience" 혹은 "consciences"가, 다음과 같이, 약 7개의 절들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1사무엘 25,31;
1열왕 8,38(주: 그러나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함)
지혜 17,11("아무튼 이곳에서 내적으로 자신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양심"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명백히 언급된다" 라는 주석이 "주석 성경"에 주어져 있다);
집회 14,2(주: 그러나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함);
집회 37,14(주: 그러나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함);
다니엘 13,9;
다니엘 13,56(주: 그러나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함),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추상 명사인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 다음의 제2-1-2항에서와는 달리, 이 34번 중에는 한 에 여러 번 "conscience" 혹은 "consciences" 라는 단어가 등장한 경우의 빈도들도 포함하고 있기에, 실제로 NAB 성경 본문의 절들 중에서 "consicience" 혹은 "consciences"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절들의 숫자는 34번 보다 약간 적을 것입니다. 바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직접 확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1-4-2.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성경 본문에서 "양심"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약 6개의 절들을 확인할 수 가 있습니다:
 
1사무엘 25,31;
2사무엘 24,10(주: 그러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로 번역된 부분을 NAB에서는 "regretted"로 번역함);
욥 27,6(주: 그러나 NAB에서는 "heart"로 번역함);
시편 16,7(주: "본디는 콩팥(신장)이다" 라는 주석이 "주석 성경"에 주어져 있으나, 그러나 NAB에서는 "heart"로 번역함);
지혜 17,11(주: "아무튼 이곳에서 내적으로 자신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양심"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명백히 언급된다" 라는 주석이 "주석 성경"에 주어져 있다);
다니엘 13,9.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새 번역 성경의 신약 성경 본문에서 "양심"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약 28개의 절들을 확인할 수 가 있습니다.
 
따라서, 새 번역 성경 본문 중에 "양심" 라는 표현들이
 
약 6 + 28 = 34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NAB의 구약 본문 중에서 "conscience" 혹은 "consciences"로 번역된 표현들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에서 "양심" 혹은 "양심들" 로 획일적으로 번역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위에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이상, 참고 자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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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위의 제6-1항의 설명에 의하여,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양심(conscience)이 두 가지 양상(aspects, 측면)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 각각에 대하여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저서인 신학 대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심(conscience proper)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신데레시스(synderesis, 本性良心)에 대하여서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CONGRESSO TOMISTA INTERNAZIONALE에 게재된, Synderesis in Moral Actions 제목의 논문(저자: Prof. Dalia Marija Stanciene)에 요약된 내용을 다음에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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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nce the nature of synderesis was widely discussed at the University of
Paris, Thomas Aquinas considers it in the sixteenth chapter, De synderesi, of
Quaestiones disputatae de veritate. There he answers three important questions: 1) Is synderesis a power or a habit? 2) Can synderesis err? 3) Are there some in
whom synderesis is extinguished? To the first question he answers that
synderesis is the power of reason which cannot be considered apart from every habit, for natural knowledge belongs to reason by reason of natural habit. The reply to the second and the third is negative: for probity to be possible in human actions, there must be some permanent principle which has unwavering integrity where there can be no error; although synderesis can be partially destroyed in a particular activity by violence, passion and sin, nevertheless its universal judgment can never be destroyed (a.3 in c).
 
     신데레시스(synderesis)의 본성(nature)은 파리 대학교에서 폭넓게 논의되었기에, 토마스 아퀴나스Quaestiones disputatae de veritate의 제16장, De synderesi 에서 이것을 고찰하였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중요한 질문들에 답하였다: 1) 신데레시스(synderesis)는 어떤 힘(a power)인가 혹은 어떤 습관(a habit)인가? 2) 신데레시스(synderesis)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 3) 그들 안에서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꺼지게 되는 어떤 자들이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이성의 힘이며, 이것은 모든 습관으로부터 떼어내어 생각될 수 없는데, 이는 본성적 지식(natural knowledge)이 본성적 습관(natural habit)이라는 이유에 의하여 이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 두 번째 및 세 번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부정적(negative)이다: 인간의 행동(human actions)들에 있어 정직(probity)이 가능하기 위하여,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는 동요하지 않는 건전함(integrity)을 가지는 어떤 항구적인 원리가 있어야만 하며, 그리고 비록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폭력(violence), 욕정(passion) 그리고 죄(sin)에 의한 어떤 특별한 활동에 있어 부분적으로 파괴될 수 있다고 하더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편적 판단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a.3 in c).
 
...
 
Conclusion
 
In the thirteenth century two different concepts of synderesis, voluntaristic and intellective, were elaborated. The most prominent representatives of them are Bonaventura and Thomas Aquinas. The first maintained that synderesis is will with an innate striving for goodness, and conscience is a habit of practical reason. The second claimed that conscience is a member of the syllogism of practical reason, which gets its own principles from synderesis, the innate habit of practical reason. Aquinas underlines the affinity of synderesis with the angelic intellect by saying that synderesis corresponds more to the angelic direct intellectual cognition than to the human discursive rational cognition. Synderesis is the space where human nature meets angelic nature. This meeting makes possible the participation of man in speculative and practical angelic knowledge.
 
13세기에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의지주의자의(voluntaristic) 그리고 지성을 수행하는(intellective) 이라는, 두 가지 다른 개념들이 발전되어졌다(were elaborated). 그들 중의 가장 저명한 대표자들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였다. 첫 번째 대표자는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선함(goodness)을 위하여 선천적 노력(innate striving)을 가진(with) 의지(will)이며, 그리고 양심(conscience)은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의 어떤 습관(habit)이라고 주장하였다(maintained). 두 번째 대표자는 양심(conscience)이 실천 이성에 대한 삼단 논법(syllogism)의 한 구성원인데, 이것은 자신 고유의 원리들을, 실천 이성의 선천적 습관(innate habit)인, 신데레시스(synderesis)로부터 가진다고 주장하였다(claimed). 아퀴나스는,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인간의 산만한 이성적 인지(human discursive rational cognition)에 보다는 천사의 직접적 지성적 인지(angelic direct intellectual cognition)에 더 대응한다(corresponds)고 말함으로써, 신데레시스(synderesis)의 천사의 지성과의 유연성(affinity, 類緣性)을 강조한다. 신데레시스(synderesis)는 인간의 본성이 천사의 본성을 만나는 공간(space)이다. 이러한 만남은 사변적이고 실천적인 천사의 지식에 사람의 참여(participation)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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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다른 한 편으로,
 
 
교회 윤리의 기초에 관한 1993년 8월 6일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에서, 위의 제6-2항에 발췌한 문장 중의, 다음과 같은, 보나벤투라의 주장 중의 첫 부분은, 전혀 인용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도권이 그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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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Bonaventura)
 
신데레시스(synderesis)가 선함(goodness)을 위하여 선천적 노력(innate striving)을 가진(with) 의지(will)이며, <----- 그의 주장의 첫 부분
 
그리고 양심(conscience)은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의 어떤 습관(habit)이라고 주장하였다(main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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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는 달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들은, 위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인 "진리의 광채(1993년)" 에서 무려 16번 인용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도권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음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6-3-1. 특히 "진리의 광채" 본문 중의 제44항은 다음의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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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교회는 토마스 성인의 윤리에 관한 가르침을 포함하여 그의 자연법에 관한 이론도 자주 참조해 왔습니다. 존경하는 선임 교황 레오 13세도 인간 이성과 인간의 법이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법에 근본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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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진리의 광체" 본문 중의 제78항은 다음의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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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인간 행위의 윤리성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이성적으로 선택된‘대상’ 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토마스 성인이 밝혀 낸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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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위의 제78항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55항을 참고하십시오.
 
6-3-3. 그리고 "진리의 광체" 본문 중에서 "토마스 성인"은 총8번 직접 언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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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 글에서 참고하고 있는 자료들을 자세히 비교/검토하면, 예를 들어, 

(i)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제16항, 그리고
 
(ii) 위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진리의 광채" 제54항, 그리고 

(iii)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76항 등에서,
 
"이 법"으로 언급되고 있는 바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어체계에 있어서, "선을 행하라," "악을 피하라" 등의 대단히 기초적인 자연법에 대한 인지/자각을 뜻하는 "첫 번째 윤리적 원리(the first moral principles)들"의 대상으로서의 바로 이 기초적인 자연법을 말하고 있으며, 
 
(iv) 심지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80항에서는 지금 말씀드린 "이 법"을  "도덕적 원칙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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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번역문)
1780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적 양심의 정직성을 내포하며 이를 요구한다.  도덕적 양심에는 도덕적 원칙(synderesis)들을 인지하는 일, 이성과 선의 구체적 식별을 통해 이 원칙들을 주어진 상황 안에 적용시키는 일, 따라서 구체적으로 행하고자하는 행위나 이미 행한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이 포함된다. 이성의 법 안에 표명된 윤리적 선에 관한 진리는 도덕적 양심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식별된다. 이러한 판단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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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오류 한 개: 그런데, 이 제1780항을 다음과 같이 바로 잡아야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synderesis" 라는 용어의 전통적 정의(definition)에 그 문맥에 있어 부합하는 유의미한 문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원칙들을 인지/자각하는 일을 두고서 전통적으로 synderesis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80항 원문에서의, 괄호의 위치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앞쪽으로 이동해버렸는데, 하여튼 이러한 실수/광오도 또한 한 가지 종류의 번역 오류일 것입니다:
 
(바로 잡은 번역문)
1780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적 양심의 정직성을 내포하며 이를 요구한다. 도덕적 양심에는 도덕적 원칙들을 인지하는 일(synderesis), 이성과 선의 구체적 식별을 통해 이 원칙들을 주어진 상황 안에 적용시키는 일, 따라서 구체적으로 행하고자하는 행위나 이미 행한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이 포함된다. 이성의 법 안에 표명된 윤리적 선에 관한 진리는 도덕적 양심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식별된다. 이러한 판단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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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의 "바로 잡은 번역문"에서, "이성과 선의 구체적 식별을 통해 이 원칙들을 주어진 상황 안에 적용시키는 일" 부분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심(conscience proper)"라고 언급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양심의 두 가지 양상들 중의 두 번째 양상입니다.
 
이를 위하여, 위의 제6-1항참고 2에 주어진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설명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6-5.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설명입니다:
 
 
Synderesis
신데레시스

Synderesis, or more correctly synteresis, is a term used by the Scholastic theologians to signify the habitual knowledge of the universal practical principles of moral action. The reasoning process in the field of speculative science presupposes certain fundamental axioms on which all science rests. Such are the principle of contradiction, "a thing cannot be and not be at the same time," and self-evident truths like "the whole is greater than its part". These are the first principles of the speculative intellect. In the field of moral conduct there are similar first principles of action, such as: "evil must be avoided, good done"; "Do not to others what you would not wish to be done to yourself"; "Parents should be honoured"; "We should live temperately and act justly". Such as these are self-evident truths in the field of moral conduct which any sane person will admit if he understands them. According to the Scholastics, the readiness with which such moral truths are apprehended by the practical intellect is due to the natural habit impressed on the cognitive faculty which they call synderesis. While conscience is a dictate of the practical reason deciding that any particular action is right or wrong, synderesis is a dictate of the same practical reason which has for its object the first general principles of moral action.
 
신데레시스(synderesis), 혹은 더 정확하게 신테레시스(synteresis)는 윤리적 행동(moral action)의 보편적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s)들에 대한 습관적 지식(the habitual knowledge)을 나타내기 위하여 스콜라 신학자(the Scholastic theologians)에 의하여 사용되는 한 개의 용어입니다. 사변 과학(speculative science)의 분야에 있어 추론 과정(reasoning process)은, 그 위에 모든 과학이 기초를 두고 있는(rests) 특정한 근본 공리(fundamental axioms)들을 전제로 합니다(presupposes). 그러한 것들에는, "어떤 사물은 있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모순의 원리(the principle of contradition), 그리고 "전체는 그 부분보다 더 크다" 처럼 자명한 진리(self-evident truths)들. 이들은 사변적 지성(speculative intellect)의 첫 번째 원리(the first principles)들입니다. 윤리적 처신의 분야에 있어, 다음의 예들과 같은, 행동(action)에 대한 유사한 첫 번째 원리들이 있습니다: "악은 회피되어져야만 하고, 선은 행해져야만 한다",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바라지 않을 바를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말라" (황금율), "부모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절제하면서(temperately) 살아야 하며 그리고 공정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이들과 같은 것들은 어떠한 제정신인 자도, 만약에 그가 이들을 이해한다면, 인정할 윤리적 처신의 분야에 있어 자명한 진리들입니다. 스콜라 학파(the Scholastics)에 따르면, 그것과 함께 그러한 윤리적 진리들이 실천 지성(the practical intellect)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준비되어 있는 상태(readiness)그들이 신데레시스(synderesis)라고 부르는 인지 능력(the cognitive faculty)에 새겨져 있는 본성적 습관(the natural habit)에 기인합니다. 양심(conscience)이, 어떤 특정한 행동이 올바르거나 혹은 그릇된 것이라고 결정하는, 실천 이성의 한 개의 명령(a dictate)인 반면에, 신데레시스(synderesis)는, 윤리적 행동(moral action)의 첫 번째 일반적 원리들을 그 대상으로서 가지는, 동일한 실천 이성의 한 개의 명령입니다.
 
Sources
ST. THOMAS, Summa, I, Q. lxxix, a. 12 (Parma, 1852); PATUZZI, De ratione humana in MIGNE, Theologiae Cursus completus, XI (Paris,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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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다음은 위의 제6-5항의 출처로 제시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a, q79 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6-6-1. 신학 대전 여행 Ia, q79"를 먼저 읽은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6-6-2. 신학 대전 Ia, q79, a12, a13"을 읽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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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6-6-1. (신학 대전 여행, Ia, q79)
 
79. 지성을 수행하는 인간의 능력들

 

1. 사람의 지성을 수행하는 능력(the intellective factulties of man)들은 영혼의 힘(powers of the soul)들 입니다. 그들은 지성(the intellect)과 그리고, 의지(the will)로 불리는, 지성의 강한 깊이 배어든 욕구(appetency)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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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1: 형용사 "intellective"를 "지성을 수행하는"으로 번역한 것은,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다음과 같은 접미사 "-ive"의 설명을 따랐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ive
:that performs or tends toward or serves to accomplish an (indicated) action especially regularly or lastingly ive> ive>

번역자 주2: 영어본 "신학 대전 여행"에서 "능력(faculty)"으로 번역되고 있는 표현은 영어본 "신학 대전"에서 "힘(power)"로 번역되고 있다. 즉, 'faculty" = "power" 이다.

번역자 주 3: 여기서 "사람의 지성을 수행하는 능력(the intellective faculty of man)" 이라는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그리고 "의지(the will)" 라는 용어의 의미 혹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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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성(the intellect)[혹은 마음(mind), 혹은 이해(understanding)]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수동적 힘(a passive power)이며, 즉, 이것은 자신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지(receives)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성은 마치 대리석이 조각가의 징 아래에서 수동적인 것처럼 어떤 생명이 없는 방식으로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식을 만들기 위하여 작동하는(act) 것이 아니고, 이것은 지식의 새김(imprerssion)에 대하여 다시 작동합니다(re-acts). 이것은 지식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 자신 안쪽에서 그 고유의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합니다.

3. 이제, 이 세상의 삶에 있어 모든 인간의 지식은 감각(the senses)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사람의 지성은 그러므로 감각들로부터 지식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감각 순서(the sense order)는 질료적 그리고 개별적 실재의 순서(the order of material and singular reality)이나, 이와는 대조적으로(whereas) 지성은 보편적 실재(universal)에 있는 사물들을 붙잡는 어떤 영적인 힘(a spiritual power)입니다. 따라서, 이 엄밀한 의미의 지성(the intellect poper)을 위한 감각-발견(sense-finding)을 준비시키는, 지성을 수행하는 능력들의 순서(the order of intellective faculties)에 속하는 어떤 힘이 있어야만 하며, 그리고, 감각-발견들(sense-findings intelligible)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지성적 작인(作因)(an intellectual agency)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intellectus agens 혹은 능동적 지성(active intellect)으로 불리는 바로 그 특별한 지성적 능력(the special intellectual faculty)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지성적(intellectual) 혹은 지성을 수행하는(intellective)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동적 지성(the active intellect), (intellectus possibilis 로 볼리는) 엄밀한 의미의 혹은 수동적(passive) 지성, 그리고 의지(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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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1: 여기서 형용사 "intellectal"을 "지성적"으로 번역한 것은,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다음과 같은 접미사 "-al"의 설명을 따랐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al
: of, relating to, or characterized by al> al> al> al> al> al> 

번역자 주 2: 여기서 "능동적 지성(active intellect)" 및 "수동적 지성(passive intellect)" 라는 용어들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지성(intellect)"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정의(definition)는 또한, 신학 대전 여행 > 하느님의 속성들 > Ia, q12, a3, 다음의 영어 가톨릭 용어 사전 및 영어 가톨릭 백과 사전의 설명을 참고하라: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4257
http://www.newadvent.org/cathen/08066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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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능동적 지성(the active intellect)은 영혼의 한 능력입니다. 이것은 느끼는 순서(the sentient order)가 아니라 지성을 수행하는 순서(the intellective order)에 속합니다. 

 

5. (어떤 자가 이미 가르쳤듯이), 심지어 한 개의 태양이 모두를 위하여 사물들을 가시적이 되게 하듯이 모두를 위하여 사물들을 이해할 수(intelligible) 있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오로지 한 개의 능동적 지성이 있다는 것은 참(true)이 아닙니다. 능동적 지성은 각(each) 영혼의 한 개의 능력입니다.

 

6.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성(the intellect proper)인 the intellectus possibilis 은 현실태적으로(actually) 이해하는 지성을 말합니다. 이제,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간직하며(retains), 그리고 이러한 역할(function) 중에 있는 이것은 지성적 기억(the intellectual memory)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지성을 수행하는 순서(the intellective order) 안에서] 기억(memory)은 지성으로부터 구분되는 어떤 능력이 아니며,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정적인 봉사 혹은 역할(a definite service or function) 중에 있는 지성입니다. 과거에 경험하게 되었던 사물들로의 상기함(recalling)은 지성의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면의 감각들 중의 하나인) 감각-기억(sense-memory)의 일(work)입니다.

 

7. 그러므로 지성을 수행하는 기억(the intellective memory)은 지성의 어떤 행위(an act) 혹은 작용(operation)이며,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받아들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간직하고자 하는 이해(understanding)에 속합니다.

 

8. 그리고 지성은 가끔, 어떤 연결되는 일련의 정도(points)들 혹은 단계(steps)들에 의하여, 붙잡거나(grasp) 혹은 이해합니다. 이것은 사물들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think out). 이러한 작용 중에 있는 지성[즉, 앎의 지성(the knowing intellect)인 수동적(passive) 지성]은 이성(reason)이라고 불립니다. 논증의 일(work), 연결된 일련의 사고 안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움직임의 일은 추론적 사고(discursive thought)라고 불립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니며, 이것은 지성이라고 볼리는 능력의 행위 혹은 작용을 말합니다. {- 가끔 이성(reason) 이라는 용어는, 지성과 의지 둘 다를 포함하는, 사람의 이성적 본성(rational nature)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자의 "이성의 사용에 도달함"에 대하여 말하며 그리고 감정(the passions)들을 "이성에 종속하도록" 유지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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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여기서 "이성(reason)" 이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그리고 "추론적 사고(discursive thought)" 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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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영원한 진리들을 묵상하는 더 높은 이성과, 세속적인 사물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더 낮은 이성 사이의 어떤 구별을 도출합니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구분이며, 능력들의 어떤 증식(a multiplication)은 아닙니다. 이성 그 자체는 지성으로부터 실제로 구분되는 어떤 능력이 아니며, 그리하여 그 결과 이성의 어떠한 종류들 혹은 변종(varieties)들이 별개의(distinctive) 능력들일 수가 없습니다. 

 

10. 앎이라는, 이해라는, 참된 판단의 산출이라는, 자신의 현실태적 작용(actual operation) 중에 있는 지성은 지능(intelligence) 이라고 불립니다. 재판관이 어떤 자명한 진리를 표현하거나, 혹은 즉각적인 추리(inference)에 의하여 알게 된 어떤 진리이거나, 혹은 추론적인 생각(discursive thinking)에 의하여 정당화하게 된(reasoned) 어떤 진리이든지간에, 판단함(judging)이라는 바로 이 행위(act)는 지성의 한 행위(an act)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지능은 지성으로부터 구분되는 어떤 능력이 아니며, 이것은 어떤 정확한(precise) 작용 혹은 행동(action) 중에 있는 지성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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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여기서 지능(intelligence) 이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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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지성은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를 아는 한 사변적(speculative)이라고 불리며, 그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한 실천적(practical)이라고 볼립니다. 따라서 사변 지성실천 지성은 두 개의 능력들이 아니라, 한 개의 능력의 두 개의 역할(functions)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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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여기서 "사변 지성(speculative intellect)"과 "실천 지성(practical intellect)"라는 용어들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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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신의 이성적 본성(즉, 이해와 의지를 갖춘 자신의 인간적 본질)에 의하여, 한 인격(a person)은 자신의 삶에 있어 일찍, 생각함과 행동함에 있어 자신을 교화하고(enlighten) 그리고 인도하는(guide), 지식의 특정한 항목들을 소유한 상태가 됩니다. 지식의 이러한 항목들은 첫 번째 진리(first truths)들 및 첫 번째 법(first laws)들이 되며, 우리는 그들은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s) 이라고 부릅니다. (a) 첫 번째 지성적 원리(first intellectual principles)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똑바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생각하는 바(what he thinks about)가 바로 그것이며(what it is) 그리고,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는 것에 대한, 한 인격의 직접적인 자각(direct awareness). (b) 첫 번째 윤리적 원리(the first moral principles)들, 혹은 의지-원리(will-principles)들 (즉 처신의 법들)은 올바름(right) 그리고 선(good)과 같은 그러한 어떤 것, 잘못(wrong) 그리고 악(evil)과 같은 그러한 것, 의무(obligation) 혹은 임무(duty)와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으로부터 도출됩니다. 그런 식으로 첫 번째 윤리적 원리들은, "선을 행하라," "악을 피하라" 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전적으로 추상적이지 않기에, 선한 바와 나쁜 바에 대한 확실한 분명한 객관적인 사례(objective instances)들을 수반합니다(involves). 한 인격이 유아기(infancy)로부터 책임감 있는 처신(responsible conduct)의 어떤 나이로 나옴에 따라 성취되는, 한 인간의 이러한 근본적인 윤리적 준비 상태(moral equipment)는 신데레시스(synderesis, 本性良心)라고 불립니다. 이제, 지성적 혹은 윤리적 첫 번째 원리들은 지성과 의지의 습관(habits)들, 즉 참을성 있는 특성(endduring qualities)들입니다. 첫 번째 진리들[즉, 지성적 원리들(the intellectual principles)]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first truths)은 한 개의 지성적 습관(an intellectual habit)이며, 그리하여 신데레시스도, 그것이 지식인 한, 그러하며, 그리하여 신데레시스는, 그것이 의지에 대한 어떤 습관적 안내(guide)이며 영향(infulence)인 한, 한 개의 윤리적 습관(a moral habi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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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여기서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 "첫 번째 지성적 원리(first intellectual principle)", "첫 번째 윤리적 원리(first moral principle)", 그리고 "신데레시스(synderesis)" 라는 용어들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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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 인격이 자신 고유의 임무에 관하여 어떤 정당화된 결론(a reasoned conclusion)에 도달할 때에, 이 결론은 어떤 실천적 판단(a practical judgment) 입니다. 이 실천적 판단은 양심(conscience) 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양심은 어떤 특별한 능력(faculty)이 아니며, 이것은 이성으로서(as) 지성의 능력의 한 행위(an action) 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양심(conscience) 신데레시스(synderesis)와 혼동하며(confuse), 그리고 신데레시스 자체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용어들에 대한 하나의 부정확한 사용입니다. 신데레시스어떤 습관(a habit)이며, 그리고 양심어떤 행위(an act)이며, 그리고 어느 것도 어떤 능력(a faculty)아닙니다. 신데레시스에 의지하는(draw upon) 이성은 양심-판단(conscience-judgment)을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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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여기서 "양심(conscience)" 이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개념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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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신학 대전, Ia, q79, a12, a13)
 

Article 12. Whether synderesis is a special power of the soul distinct from the others?

 

(생략) 

이와는 달리, 철학자 [즉,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따르면, "이성적 힘들은 반대의 사물들을 고려합니다(regard)" [Metaph. viii, 2]. 그러나 "신데르시스(synderesis)"는 반대의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선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므로 "신데르시스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이는, 이것이 짐승같은 동물(brute animals)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만약에 그것이 어떤 힘이었다면 그것은 어떤 이성적 힘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신데레시스(synderesis)"는 어떤 힘(a power, 즉 어떤 능력)이 아니라 어떤 습관(a habit)이며, 그리고 비록 어떤 이가 그것이 이성보다 더 높은 어떤 힘이라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이,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본성(a nature)으로서, 이성 자체라고 [Cf. Alexander of Hales, Sum. Theol. II, 73]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위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Article 8), 사람의 추론 행위(act of reasoning)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움직임(movement)이기에,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로부터, 즉, 어떤 움직일 수 없는 원리(immovable principle)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이성의 측에서 아무런 조사(investigation) 없이 본성적으로 알려진 것들로부터 나오는 점을 주목하여야만 하며, 그리고 또한, 본성적으로 알려진 원리들에 의하여 우리가 추론에 의하여 이미 발견한 사물들을 판단하는 한, 이해(understanding)에서 끝나는 점을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이제, 사변 이성(speculative reason)이 사변적 사물들에 관하여 논하듯이,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이 실천적인 사물들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성/자연에 의하여 우리에게 수여된(bestowed), 사변적 원리(speculative principles)들(*) 뿐만이 아니라, 또한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s)들(*)을 가져야 함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본성/자연에 의하여 우리에게 수여된 첫 번째 사변적 원리들은 어떤 특별한 힘(a special power)에 속하지 않고, 이것은, 철학자(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듯이 (Ethic. vi, 6), "원리들에 대한 이해(the understanding of principles)"로 불리는 어떤 특별한 습관(a special habit)에 속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본성/자연에 의하여 우리에게 수여된 첫 번째 실천적 원리들은 어떤 특별한 힘(a special power)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본성적/자연적 습관(a special natural habit)에 속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데레시스(synderesis)"로 부릅니다. 그러한 이유에 의하여 "신데레시스", 첫 번째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함(discover)으로 나아가며,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발견한 바에 대한 판단함(judge)으로 나아가는 한, 선(good)을 자극하며(incite), 그리고 악에 대하여 불평한다(mummur)고 말해집니다. 그러므로 "신데레시스"가 어떤 힘이 아니라, 어떤 본성적/자연적 습관(a natural habit)인 것은 분명합니다.(생락)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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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들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은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용어집"에 있으니 숙지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_principle.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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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Article 13. Whether conscience be a power?

 

(생략)

이와는 달리, 양심은 한쪽으로 제쳐놓을 수 있습니다(be laid aside). 그러나 어떤 힘은 한쪽으로 제쳐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어떤 힘이 아닙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여(properly speking), 양심은 어떤 힘(a power)이 아니고, 어떤 행위(an act)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이름으로부터 그리고 말하기의 통상적 방식에 있어 양심에 귀속되는 바로 그 사물들로부터 둘 다로부터 분명합니다. 이는 양심이, 이 단어의 바로 그 본성에 따라,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관계를 뜻하기 때문인데, 이는 양심은 "cum alio scientia," 즉 어떤 개별 경우에 적용되는 지식으로 설명될(resolved) 수도 있기(may)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적용은 어떤 행위에 의하여 행해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이름에 대한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양심이 어떤 행위(an act)인 것이 분명합니다.

 

양심에 귀속되는 바로 그 사물들로부터도 마찬가지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양심이 증언한다(to witness), 속박한다(to bind), 혹은 자극한다(incite), 그리고 또한 비난한다(to accuse), 심한 고통을 준다(torment), 혹은 나무란다(rebuke) 라고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우리가 행하는 바에 대한 지식(knowledge) 혹은 과학(science)의 적용에 뒤이어 일어나며(follow), 그 적용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이미 행하였음 혹은 아직 행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알아차리는 한에 있으며: "너도 다른 이들을 저주했음을 너 자신이 알고 있다" (코헬렐 7,22), 그리고 이 방식에 따라, 양심은 증언한다고 말해집니다. 다른 방식은, 양심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것이 행하여져야 하거나 혹은 행하여지지 말아야 함을 판단하는 한에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양심은 자극한다 혹은 속박한다 라고 말해집니다. 세 번째 방식은, 양심에 의하여 우리가 행해진 어떤 것이 잘 행하여졌거나 혹은 잘못 행하여졌음을 판단하는 한에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양심은 변명한다(excuse), 비난한다, 혹은 심한 고통을 준다 라고 말해집니다. 이제,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리가 행할 바에 대한 지식의 현실태적 적용(actual application)을 뒤따른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엄밀하게 말하여, 양심은 하나의 행위(an act)라고 불립니다(denominates). 그러나 습관(habit)이 행위의 한 원리이기에, 때로는 이 양심이라는 이름이 첫 번째 본성적 습관(the first natural habit), 즉, "신데레시스(synderesis)" 에 주어지며, 그리하여 그 결과 예로니모(Jerome)는 "신데레시스"를 양심이라고 [Gloss. Ezekiel 1:6] 부르고 , 그리고 바실(Basil)은 "판단에 대한 본성/자연의 힘" [Hom. in princ. Proverb.] 이라고 부르며, 그리고 다마스쿠스인(Damascene) [즉,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은 그것이 "우리의 지성의 법" [De Fide Orth. iv. 22] 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원인들과 결과들이 서로 서로의 이름에 따라 불리게 되는 것이 관습적이기(customary) 때문입니다.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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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상 살펴본 바로부터, "양심(conscience)"에 대한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7-1.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자연적으로, 소위 말하는 "첫 번째 진리(the first truths)들"이 주어지고 있다.
 
7-2. 이 "첫 번째 진리들"은 "신데르시스(synderesis)"로 결코 불리지 않으며, 그리고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양심(conscience)"으로도 결코 불리지 않는다.
 
7-3. "양심(conscience)"은, 
(i) 근본적인 윤리적 준비 상태인, 어떤 특별한 본성적/자연적 습관(a special natural habit)인 "신데르시스"와 
(ii) 어떤 행위(an act)인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양심(conscience)" 이라는
두 개의 양상들을 가지고 있다. 
 
7-4.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이 "첫 번째 진리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습관인 "신데레시스", 혹은 어떤 행위(an act)인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양심"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참고: 여기를 클릭하면, "첫 번째 진리들"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7-5. 이 "첫 번째 진리들"에 대한 직접적 자각인 "신데레시스"는 각 개인이 유아기로부터 책임감 있는 처신의 어떤 나이가 됨에 따라 형성된다.
 
7-6.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양심"은 어원이 말하듯이,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관계이므로,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양이 적고 많음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는 어떤 행위(an act)이다.
 
7-7. 따라서, 이들 두 양상들을 가진 양심은 각 개인이 유아기로부터 책임감 있는 처신의 어떤 나이가 됨에 따라 형성된다.
 
7-8. 따라서, "양심"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동일하게 그리고 획일적으로 개인에게 주입시켜 주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며, 즉 양심은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 과정에 따라 달리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양심"에 따른 행위의 책임과 의무는 항상 당사자인 자기 자신이다.
 
7-9. 그러므로, 태어나자 즉시 원죄를 사하는 힘을 가진 유아세례를 받게함으로써, 성화 은총과 함께 하느님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자에게 주입되는, 믿음(faith, 신앙, 신덕), 희망(hope, 망덕), 그리고 사랑(charity, 애덕)으로 이루어진 초자연덕들인 향주삼덕들은, 그가 은총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한, 올바른 양심의 형성을 위한 바로 그 초기 단계에서부터, 그에게 항상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유아 세례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이다.
 
7-10.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 각자의 "양심"은 평생에 걸쳐, 교도권에 의한, 교화(enlightenment)의 대상이며, "양심"에 따른 행위의 책임과 의무는 항상 당사자인 자기 자신이다.
 
7-11. 그러므로,
(i) 각자의 성장 과정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는 양심을 두고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책임 회피성 주장, 그리고  
(ii) 세례를 받는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양심이 믿음(faith, 신앙)을 앞선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가톨릭 교회의 성경 및 성전에 있지 않을뿐만이 아니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대단히 그릇된 주장들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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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이 글의 서두에서 이글에서 또한 다루기로 하였던
 
(2)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 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라는 주장
 
에 대하여서는, 이 글이 너무 길어져, 이 글에 이어지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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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자료 조사 및 분석/검토를 포함하여) 약6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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