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초막절과 생수의 강 예수 그리스도 (요한7,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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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4-08 ㅣ No.156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을 묵상하며

 

초막절과 생수의 강 예수 그리스도

(요한7,25-39)

25 한편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 더러는 '유다인들이 죽이려고 찾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26 저렇게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을 보면 혹시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정말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아닐까? 27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28 그 때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29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 주셨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31 그러나 군중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정말 온다 해도 이분보다 더 많은 기적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32 사람들이 예수를 두고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과 사제들은 예수를 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 33 그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얼마 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34 너희는 나를 찾아 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 있는 곳에는 올 수가 없다.' 35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가 자기를 찾아 내지 못하리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인가?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에게 가서 이방인들을 가르칠 셈인가? 36 우리가 자기를 찾아도 찾아 내지 못한다느니 또는 자기가 있는 곳에는 올 수 없다느니 하는 말은 대관절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다. 37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세상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의 영광과 자기 자랑과 자기 증명 그리고 자기 유익을 위해 예수님까지도 이용하려 한다라는 사실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과 그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었고 세상에 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사는 자들은 예수님에 겉모습과 배경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했던 유다인들에 모습을 통해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들은 자기들이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력에 결과는 이 세상에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라고 굳게 믿죠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서 믿지 않는 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율법과 절기에 그 진의를 아는 이들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로 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그 은혜를 의지하고 순종하게 되며 그 하느님에 은혜에 대해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빵이 아닌 하늘에 빵인 영생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구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되는 거죠 이 전자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에 열심인 거에요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믿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7장의 내용이에요

 

오늘 본문에도 역시 그렇게 율법의 외양을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거에요 먼저 25절에서 27절까지를 보면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유다인들이 예수님과 당국자들을 조롱하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가르치시고 계신데 당국자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못대고 있는 거에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 30절에 말씀에 의하면 아직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요 그랬더니 유다인들이 뭐라 그래요 우리가 저 사람이 어디서 온 줄을 아는데 당국자들이 저 사람을 진짜 그리스도로 아는 거 아냐? 이렇게 비아냥 거려요 26절에 보면 역시 예수님에 배경과 겉모습만으로 그분을 판단하는 세상에 힘을 추구하는 자들에 특징이 그대로 또 드러나고 있는 거에요 그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829절을 보겠습니다 28 그 때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29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 주셨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이 안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얇팍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는 말씀인 거에요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는데 너희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모두다 이 세상에 세계관과 가치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본 외곡된 것들이다는 말씀인거에요 너희는 나를 몰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볼때 그분은 결코 메시아일수가 없죠 가난하고 약하고 못생기고 작고 못배우고 초라한 그런 모습에 예수님은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그들에게 다윗 왕국에 영화를 다시 안겨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에게는 정말 매력이 없는 분이였잖아요. 다른 말로 세상에 영광과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인거에요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강력한 힘을 갖고 나를 도와줄 예수,그런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그게 뭐가 나쁜건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요한복음 7장이 바로 거기에 대한 경고에 메세지인 거에요. 예수를 믿는건 그런 식으로 믿는게 아니에요 세상에 가치관과 세계관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할려면 안되요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가치로 정해준 것들 그런 것들을 많이 얻어내고 쌓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일관성이 없는건 정말 가치있는게 아니에요

언제부터 얼굴이 작고 키가크고 다리가 긴 사람들이 미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었죠? 중세때 미인들 그림이나 사진 보셨어요 전부 퉁퉁하죠. 키도 작고 조선시대때 미인도 같은거 보세요 눈은 그냥 완전히 무슨 새우젓 같은 눈에다가 통통하고 뭐 키도 조그맣고 그게 미인의 기준이였어요 그 때 당시에는. 지금은 금은이 굉장히 비싸지만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소금이 더 비쌌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정해놓은 가치라는 것은 수시로 변해요 앞으로 미남 미녀가 어떻게 또 기준이 바뀔지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이 될 지 또 몰라요 옛날 조선시대때는 백정이 굉장히 천한 직원이였지만 지금은 정육점 사장은 돈 잘버는 좋은 직업 가진 사람이잖아요. 진짜 가치있는 것은 하늘에 것, 그걸 추구하는 거에요 그리스도교는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가시기를 당신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누가 보내서 왔는데 그 보내신 분이 참이시다 그러죠

 

유다인들은 참이시다라는 말을 들었을때 아 참된 분은 오직 한분 하느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렸어요 그런데 그 참이신 하느님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라고 예수님이 그들에 자존심을 긁어 버린 거죠 유다인들에 하느님을 향한 열심은 그야말로 대단한 거였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을 모른다라고 딱 짤라 말씀해 버리시는 거에요 그리고는 당신은 그분에게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분을 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참 얄미웠겠죠. 안다라고 하는데 니네는 몰라 그런데 나는 알어라고 이야기하니까 잡아 죽일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렇지 않아도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자가 자기들에 기대를 나는 세상에 빵 주러 온거 아니야 하늘에 빵 주러 왔어 이렇게 송두리채 무너뜨려서 속상해 죽겠는데 거기다가 자기들에 최후에 자존심 마져 깔아 뭉게 버렸으니까 무시를 당했으니 그들에 기분이 어땠겠어요 당연히 죽이고 싶었겠죠.

그러니까 세상에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반드시 죽여요.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천국에 절대 보낼 수가 없다니깐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예수는 반드시 그 세상에 힘을 나에게 공급해 주어야 된다 라고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 없이 살기 위해서 나의 자랑과 증명과 영광과 유익을 위해 살던 이 존재가 깡그리 부인이 되고 하느님의 영광만 오롯이 들어나는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추구하는 바에요

 

그렇다면 성도는요? 자기에 자존심이 깔아 뭉개지고 내가 자꾸 부인이 되고 무시되고 하느님의 크심이 드러날때 오히려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요렇게 만지고 계시는구나, 신앙의 목표지점인 그 거룩에 완성에 자리로 나를 부인시키고 하느님만 드러나는 그 자리로 나를 지금 열심히 끌고 가시는 것이구나 라고 오히려 찬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내가 부인이 되고 내가 무시를 당하면 그게 하느님일지라도 죽여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티끌이구나 라고 나는 무에서 창조된 자구나라는 것을 아는 그러니까 무에서 창조된 자가 자기는 유인줄 알았다가 다시 무로 재 창조되는게 신앙생활인 거에요 이 땅에서 여러분은 부지런히 죽으셔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에굽에서 60만명이 나와서 60만명이 광야에서 다 죽는 모습이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 60만명이 들어가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나를 죽이는 거에요 내가 자꾸 낮아지는 거에요 그리고 나는 자꾸 하느님 앞에서 무시당해야 되요 부인되어져야 되는 거에요 나는.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다 버리세요 내가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만큼 크신 분이라니깐요 우리가 상상할수도 없을만큼 크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분을 우리가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하여 우리의 유익을 채우는게 그리스도교라니 그거는 말이 안되는 거에요 그거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신론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못내리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과연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이분은 철떡같이 자기들이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너희는 몰라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만약에 우리한테 와서 그러시면 어떡할거에요 큰일나는거에요 우리는 地獄가는 거에요 우리는 지금 열심히 예수 믿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느날 오시더니 너는 하느님을 몰라 그러면 어떡하실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알까요 우리가 진짜 하느님을 알고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모르고 엉뚱하게 믿고 있는건지 어떻게 알아요? 메시아는 세상에 힘을 공급해주고 소원이나 들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생명인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 영생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삶에 원리인 십자가에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은 너희들이 뭔가 남들보다 잘나서 열심을 부려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난척 하지 말아라 라는 說敎를 한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우리는 가짜에요. 지금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똑같이 그렇게 이야기하셨는데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잖아요 분명히 그러죠?

 

계속해서 32절을 보시면 그렇게 자기에 영광과 유익과 자랑과 증명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이제 사람들을 보내죠 드디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 예수님 殺害작전이 실행에 옮겨지는 거에요 그때 주님께서 그 下屬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넌지시 이제 암시를 하시죠 나는 너희들이 도저히 올 수 없는 곳으로 이제 갈거야 나는 바로 그 일을 하러 온거야 라고 이렇게 이제 암시를 해주는데 그들이 못알아 들어요

그러니까 이 36절까지에 그 내용도 결국 자기 영광과 자기 자존심을 위한 신앙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인 거에요 자기 자신을 위한 신앙은 신앙도 아닐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살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라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거에요 이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이 요한복음 7장에 要節이라고 할 수 있는 37절을 보시면요 초막절에 마지막 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요 이 37절 이하도 역시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아닌 하느님에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영생을 설명하는 에피소드인 거에요

 

초막절에 마지막날 그러니까 8일째 되는 날이에요 8일째 되는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라고 이야기하셨어요 초막절에는 7일동안에 제사장이 그성전 번제단에다가 물을 열심히 갖다 부어요 7일동안 메일 아침 제사장이 금그릇을 들고 성전에 남쪽문으로 나가요 남쪽문으로 나가면 바로 보이는 것이 실로암 연못이에요 그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다가 다시 성전으로 들어와서 번제단을 한바퀴 돌고 번제단에다가 물을 뿌려요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은 번제단을 일곱바뀌 돌고 물을 뿌려요 여리고성 함락작전과 똑같은 모양으로 그렇게 물을 뿌린다구요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율법에 나와있는 의식이 아니에요 그럼 언제부터 왜 이런 일을 했을까요

열왕기상 810절 보세요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야훼의 전에 차 있었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이 너무 짙었으므로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야훼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죠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이렇게 야훼의 영광이 가득했어요 그런데 그 영광이 어느시점에 성전을 떠나 버렸죠 에제키엘서에서 보셨죠 1018절 보세요 18 야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거룹들 위에 멈추셨다. 19 그러자 거룹들은 날개를 펴,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아 떠나 갔다. 바퀴들도 함께 떠나갔다. 거룹들이 야훼의 성전 동쪽 정문간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거룹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스라엘이 불심판을 당하는 그런 모습인데 그때 성전에서 야훼의 영광이 떠나버렸다 그래요 그런데 그 야훼의 영광이 성전에 다시 돌아왔을때 그 모습을 어떻게 묘사를 하는지 한번 보자구요

 

에제키엘서 444절 다시 그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지나 성전 앞에 들어 가 보니,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돌아왔죠

그 모습을 에스겔서 47장에서 이렇게 기록해요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2 나는 그분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돌아 가 보았다. 물이 그 대문 오른쪽에서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보세요 야훼의 영광이 성전에 돌아왔을때 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린다구요 사실 이거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솟아나는 생수를 상징하는 거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에제케엘서를 읽으면서 아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 넘쳐야 하느님에 영광이 돌아온거고 영광이 가득한 거라고 믿은 거에요 그런데 하깨가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재건한 성전에는 또 이 야훼의 영광이 없어요. 볼까요

하깨 233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하지 않느냐?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포로귀환 이후때부터 야훼의 영광이 다시 돌아와 화려하고 찬란한 다윗 왕국 솔로몬 왕국을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들이 물을 떠다가 계속 부은 거에요 초막절에 율법에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냥 자기들이 야훼의 영광이여 어서 돌아와 다윗 왕국 솔로몬 왕국을 회복시켜 주옵소서라는 의미에서 물을 갇다부은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7일동안 그렇게 열심히 부었는데 8일째는 물을 안 붓거든요 예수님이 8일째 나타나서 내가 물이야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니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이 지금 이 번제단에다가 물 갖다 붓는 거는 이 세상에 힘 화려한 다윗 왕국 솔로몬 왕국을 바라면서 너희들에 힘으로 자꾸 물을 갖다 붓고 있는데 내가 물이고 물인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것은 그런 다윗왕국 솔로몬 왕국같은 이 세상에 힘이 아니라 하늘에 영생인 거야를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8일째에 내가 물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라고 그 초막절 8일째 된날 말씀하시는 거에요 7이라는 숫자는 창조에 숫자죠 7일동안 창조하셨으니까 그리고 안식일에 숫자이기도해요 완전수라고 부르죠. 그러면 8은 뭐에요 8 안식의 수 창조의 수 바로 넘어 그 다음날 재창조의 숫자에요 8은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있는 옛 창조에 것들을 허무시고 재창조를 위해 새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항상 안식후 첫날인 8일에 부활하시고 8일에 제자들을 보내시고 8일째에 승천하신 거에요 항상 예수님은 8과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도 안식후 첫날인 주일날 8일째에 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념하는 거니까 찬양하는 거니까 주님은 바로 그 8일째 성전에 나타나셔서 7일동안 열심히 율법과 절기에 물을 붓고 안식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너희들에 열심과 노력으로 하느님에 영광을 돌아오게 하려는 시도는 다 땡인거야 내가 물이야 하느님에 영광은 나로부터 회복되는 거야 그리고 그 물은 너희들에 열심과 노력이 아닌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물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화려한 세상권세에 회복이 아니라 하늘에 복인 영생이야를 말씀하시는 거에요 고 짧은 어구안에 그 내용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7장을 통해 공부한 내용에 확인도장을 찍어 주는 장면인 거에요

우리가 열심히 쏟아 부은 물은 곧 말라버려요 그러나 마르지 않은 물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요 우리에 어떤 노력이나 열심에도 열심도 하느님에 구원사역에 손톱만큼에 도움도 될 수 없어요. 헌금이나 구제나 선교 이런 것들이 우리가 쏟아 붓는 제단에 물이 되어서는 안되요 그게 우리 의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헌금하고 구제하고 교회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안심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것으로 안심하는 분들은 지금 열심히 자기가 물갖다가 붓는 거에요 그거는 열매로 나오는 거에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너무 감사하니까 우리에 삶 속에서 그런 나를 버리는 삶이 나오는 거에요 나를 버리는 삶이 바로 헌금이고 구제이고 봉사고 그런 거에요 그건 나를 버리는 거에요 내꺼를 손해보는 거잖아요 그런 행위가 나오는 거에요 십자가에 삶이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에 영광은 온전히 회복되요 오직 예수에 은혜만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은혜를 확실히 알게 될때에 우리에게 그런 열매들이 나오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지점 또한 화려한 이 세상에 다윗 왕국이여서는 안되는 거에요 우리는 나를 자랑하고 나를 증명하고 나에 영광을 드러내며 이 세상에 힘을 쌓는 것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들을 해요

 

인간은 하느님이 부어주시는 하느님에 생명력 즉 하느님에 영광에 의해서만 행복하고 만족한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에게는 참 만족과 참 행복이 주어지지 않아요 우리에 물붓기는 전부 허당이에요 오직 예수에 의해서만 우리는 참만족과 참행복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에 은혜에 의해 성도로 선택된 자들은 이 세상것들이 아닌 하느님에 생명력이 풍성히 나에게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거에요 하느님에 생명력이 뭐에요 하느님의 성품 인격 그게 하느님의 영광이잖아요 그리고 생명력이에요 그게 나에게 부어지기를 원하는 거에요 간절히 원하게 되는 거에요 그걸 소망한다구요. 그건 우리 힘으로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 간절히 원하게 되요 그걸 시편 기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목마릅니다 라고 표현을 하는 거구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된 자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목마름을 갖고 있어야 되요

 

오늘 본문 보시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죠 분명 초청된 사람은 누구든지에요 아무나 와라죠 그러나 누구든지 와서 다 마셔요 목 안마른 사람은 안마시죠 목마른 사람만 마셔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은 반드시 하느님에 생명력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과 배고픔이 굶주룸이 있어야 한다라는 거에요 그게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마셔라에요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마셔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께서 완성해 놓으신 그 온전한 해갈을 추구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참 소망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마름을 온전히 다 해갈을 해 놓으셨다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 그랬죠 그거 우리에 목마름을 예수님이 다 가져가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목마름은 이미 그분이 다 뺏어가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인제 목마르지 않은 자가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완성지점을 향해 계속해서 나는 이 완성된 자리에 반드시 서야 할 자야 그러니까 그 완성된 자리를 향한 목마름으로 계속해서 손발을 움직여 분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에요 주님은 참된 해갈을 가져다줄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죠

38절 보세요 38절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물이 뭐에요 물이 성령이에요 38절에 그 속에서는 헬라어 코일리아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가슴 자궁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존재의 핵을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속에서라는 이 어구는 나를 믿는 자에 배에서 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고 예수의 배에서 라고도 번역을 해도 무방해요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누구 배속에서 생수가 흘러 나와야 맞아요? 예수님에 배에서 생수가 흘러 나와야 맞죠 그런데 우리에 배에서도 생수가 흘러 나올 수도 있는 건가요 왜 요한이 이런 애매한 문법에 문장을 택했을까요 요한이 문법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에요 요한은 일부러 이 표현을 택한 거에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배에서 흘러넘치는 생수에 강에 푹 잠겨서 그 생수를 마시게 되고 그 생수에 강을 세상으로 흘려 보내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을 고러한 표현을 통해서 그려내고 있는 거에요 성령은 그리스도에 영이죠

 

로마서 89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성령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 넘쳐서 예수님을 닮은 작은 성전들인 교회에게 전해졌어요 교회는 바로 그 성령에 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람들인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느님에 성품이 흘러나오게 되는 거고 문득 문득 하느님에 됨됨이가 넘치게 되는 거에요 그게 교회에 배에서 믿는 자들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라는 의미인 거에요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작은 예수들이 된 거에요 그렇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인생이 다 부어져서 그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 인생이 우리에 삶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 배에서 나온 그 성령이 우리에 배에서도 나와요 성령이 나온다라는게 뭐에요 하느님에 성품 하느님에 됨됨이 그런 하늘나라의 삶이 내 안에서 나온다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뭐에요 십자가에 삶이거든요 내가 당해주고 고난받고 욕먹고 수난받으면서도 사랑해주고 용납해주고 섬겨주는거 그게 하늘나라에 삶에 원리잖아요 그걸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십자가에 삶 고난을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된다라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에 삶이 나에 삶과 이제 겹쳐져서 예수에 삶이 내 삶이 되었어요 그리고 내 더러운 죄인의 삶을 예수님이 가져가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제 내 삶 속에서는 예수의 배에서 흘러나온 그 성령에 삶 하늘나라의 삶이 내 삶 속에서는 이제 나와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에 삶 속에 고난이 있는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속에서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만을 꼭 붙들 수 있는 그런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거에요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에페소서 526~27절 보시면 26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27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물 성령은 이 땅에 왜 오신 거에요? 우리를 깨끗이 씻어 하느님에 백성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성령은 이 땅에 오시는 거에요

베드로전서 321절 보세요 21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습니다.

물에 역할이에요 이것이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인 거에요

고린도전서 123절 보세요 3 그래서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마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 하고 욕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자 또한 성령은 우리에 마음을 움직여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러 오시는 거에요

 

정리해 볼까요 성령은 왜 오신 거에요 물은 왜 온거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시고 그 우리가 그 은혜에 感吸하여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돕기 위해 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은혜로 우리가 하느님에 백성이 되었다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하느님에 백성에게서 보여져야 하는 하느님에 됨됨이 하느님에 성품들이 성도에게서 흘러 나오도록 도우러 오신 분이 성령인 거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에게 올바로 깨닫게 해주시고,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에 은혜가 이런 거야 라는거 까지 깨닫게 해주셔서 그 은혜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는데에 전혀 방해받지 않도록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그런 역할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참생수이시며 예수님만이 진정한 해갈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위해 오신 분이 바로 성령인 거에요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 주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 공로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라는 것을 믿으시면 이미 여러분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는거죠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에게서 흘러 넘쳐 우리에게서 하느님에 성품이 문득 문득 흘러넘치는걸 충만이라고 하니까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거에요

 

구원은 다 같이 받는거고 그 중에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세컨드 블레싱으로 성령세례가 주어져서 방언이 터지고 신유의 은사가 오고 그거는 샛빨간 거짓말이에요 성령세례는 모든 하느님 백성들이 성령세례로 거듭나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성품이 문득 문득 나오게 되는 거 그들이 하느님에 백성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그 모습을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오해해서 성령하느님은 마치 기적이나 일으켜 주고 신비한 체험이나 하게 해주는 어떤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복적 신앙을 갖고 있어요 그러한 기적이나 신비가 자기에 삶에도 일어나서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기를 소원해요 그러한 사람들에 특징은 대단한 열심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주위에도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간혹있죠 그분들이 얼마나 열심을 부립니까 그분들처럼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 보셨어요 백일작정기도 그건 불교에서 나온건데 금식기도, 산기도, 들기도, 왜냐하면 그게 나한테 유익이 된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굉장한 열심을 부려요 그러나 그렇게 신비한 체험이나 기복을 목적으로하여 부리는 열심은 7일간 인위적으로 재단에 물을 퍼부으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돌아와서 위대한 다윗 왕국을 제건해 주기를 기대했던 바리사이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행동인 거에요. 예수님이 그거 꽝이야 그랬대니깐요

그래서 8일째 오셔갖고 내가 물이래니깐 니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너희들 하는 행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을때까지 죽어라고 고생만하고 지옥가는 사람이 있어요. 차라리 그냥 먹고 싶은거 먹고 하고 싶은거 다하고 그리고 지옥가는게 훨씬 났죠 그러니까 죽을때까지 그냥 먹고 싶은 것도 못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경건하게 산다고 열심을 부리면서 살았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하느님이 니가 누구냐 그래버리면 어떻게 해요 큰일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올바로 배우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요

 

계속해서 40절 이하를 보시면요 그렇게 자기에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 치부가 완전하게 드러나는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下屬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그냥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사이인들이 당국자들이나 바리사이인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냐 라고 물어요 이거 굉장히 건방진 말이에요 이거는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나 예수를 믿는 것이다라고 비아냥 거리죠 그 말은 바리사이인들이나 당국자들처럼 많이 배우고 높은신 양반들은 절대 초라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문제를 삼는 것이 바로 예수님 출생지죠.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되는데 그 예수는 갈릴레아 사람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계속해서 그걸 반복하여 걸고 넘어져요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한데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어요 그렇죠? 그런데 왜 성경은 예수님을 갈릴레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를까요 베들레헴 사람 이렇게 부르면 오해도 없고 참 좋잖아요 그런데 왜 성경은 예수님을 갈릴레아 나사렛 사람으로 부를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혀요

마태복음 221~23절 보세요 21 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서 23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느님이 나자렛 사람이라고 칭하라고 정해 놓으셨다 라는거죠 그럼 하느님이 왜 그러셨을까 베들레헴 사람이라 부르리라 하심을 이루러 함이라 그러면 서로 좋잖아요 우리도 이해가 가기 쉽고 그런데 하느님이 이렇게 정하셨어요 오해를 당하게끔 하느님이 만들어 버리시는 거에요 거기에는 아주 깊은 구속사적 예언이 깃들어 있는 거에요 메시아에 탄생과 통치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는

이사야서 91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볼까요 고통에 잠긴 곳이 어찌 캄캄하지 않으랴? 전에는 그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을 천대하셨으나 장차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외국인들의 지역을 귀하게 여기실 날이 오리라.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어요 그런데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냈죠 헤로데 질투가 예수 그리스도를 에굽으로 쫒아 버렸던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에굽에서 나오셔서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레아로 향하셨고 그 일로 그분은 이방 갈릴레아에 빛이 되신 거에요 보세요 갈릴레아가 지금 이방에 갈릴리아라고 묘사가 되어 있죠 자기들이 적자라고 자기들 만이 선민이라고 자기들만이 율법을 받았고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던 유다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들고 있잖아요 그 일로 말미암아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어요 그런데 그 일로 유다인이 아닌 이방에 모든 이방땅에 흩어져 살던 하느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된거잖아요 그러니까 구속사의 과정과 내용이 고 안에 들어있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라 갈릴리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는거에요

 

지금 40 절 이하에서 보시면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을 율법으로 죽일려고 그래요 자기들만이 율법을 받은자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율법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그 율법으로 죽일려고 한다니깐요 그리고 결국은 죽였고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이방 갈릴리아에 교회들을 이렇게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자렛 사람인 거에요 그렇게 인간쪽에서 하느님 앞에 내어 놓는 것들은 그들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게 되는 원인 제공이 될 뿐인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물갖다 붓고 절기지키고 율법 행하고 했던 이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물이야 나한테 와서 마셔 그런거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요한복음 7장은 하느님에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하는자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들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거에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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