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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두아들의 비유(루카 15,1-3.11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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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3-30 ㅣ No.154

 

 

 [사순 제4주일]두아들의 비유(루카 15,1-3.11ㄴ-32)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는다. (여호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며,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권고한다. (2코린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여호5,9ㄱ.10-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12)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거쳐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첫 농사를 지어 소출의 첫번째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그 다음 그 소출을 먹었다.

아무것도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서 가나안이라는 땅을 이용하여

그곳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지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멈추었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만나가 필요없게 된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이교인들의 땅을 정복한 후, 그곳의 이교 관습 즉 우상이나 미신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니 소출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시고,  하느님께 맞갖은 제사를 드려 감사를 표시하게 할 것이다.

 

'만나가 멎었다'

 

'만나가 멎었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와이쉬뽀트 함만'(waishibboth hamman)이다.

'멎었다'에 해당하는 '와이쉬뽀트'(waishibboth)는 접속사 '와우'(wau)

'그치다', '중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샤바트'(shabath)의 미완료형

'이쉬뽀트'(yshibboth)가 결합된 형태이다.

 

'만나'('만'; man)광야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그들의 주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지 두달 째부터 만나를 먹기 시작해서 40년 동안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 주식으로 사용했다(탈출16장).

 

이 만나는 먹을 것이 없었던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그 시대에만  허락하여 한시적으로 주어진 음식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목적을 깨우치려는 의도에서

아론으로 하여금 계약의 궤 안에 만나를 넣어 두게도 하셨다(탈출16,32-34).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하여 자신들의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신명8,3.16).

 

오늘날 모든 삶의 자리에서 신앙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물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통로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통로를 이용해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시다.

육신의 양식은 물론 날마다 신앙 생활에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도

하느님 자신이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헌신적 배풂이라는 사명의 절정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다(요한6,35).

따라서 말씀과 성체성사로서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결코 주리거나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한편, '난 것'에 해당하는 '밋테부아트'(mithebuath)'~로 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민'(min)'산물','소산','열매'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테부아'(thebua)의 연계형이다.

 

새 성경'테부아'(thebua)'난 것'으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열매 뿐만 아니라 땅에서부터 소출되는 모든 종류의 '농작물'을 다 가리키는 용어이다


 

사순 제4주일 복음 (루카5,1-3.11ㄴ-32)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2)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카15, 2. 21~24 참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카15, 21~24 참조)

  

원문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휘오스 수'(hyos su;

your son) 즉 '당신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주인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는 것을 드러내 준다.

아들에게 있어 그의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의 자의식(自意識) 속에는 아버지가 주인(主人)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서'라고 표현되는 '타퀴'(tachy; quickly)라는

부사로서 응답하신다.

 

'재빨리','신속하게'로 시작되는 이 말에는 아들을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깨끗하게 단장하여 집으로 맞아들이려는 부성애(夫性愛)가 녹아 있다.

 

한편,'옷'이라고 번역된 '스톨렌'(stolen; robe)은 발까지 내려오는

남자용의 헐렁한 겉옷을 말한다.

이런 류의 옷들은 주로 왕들과 사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만 입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존귀하게 여겨 이전에 그가 지녔던 아들로서의

권위와 품위와 지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으로 번역된 '프로텐'(proten; best)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처음의', '첫째의'라는 의미로서 명사, 관사와 함께 쓰여

실제로나 생각에 있어 가장 완벽한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그가 입었던 옷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옷을 말한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에 해당하는 '도테 닥튈리온 에이스 텐 케이라 아우투'(dote daktyllion eis ten cheira autu; put a ring on his finger)에서 '가락지'('닥튈리온'; daktyllion; a ring)는 '손가락'을 뜻하는 '닥튈로스'(daktyllos)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손가락이나 가락지는 어떤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가락지도 아버지의 재산이나 권위를 이어받는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반지를 끼었다는 그 사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위를 아들에게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에서 '신겨 주어라'에 해당하는 '휘포데마타'

(hyodemata; shoes; sandals)는 '휘포데마'(hypodema)의 목적격

복수로 '발에 매는 것' 즉 '샌달'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였다.

 

당시의 종들은 맨발로 생활하였고, 또한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신발을 벗게 되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주인(主人)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가 신을 신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종살이하던 먼나라에서

맨발로 돌아온 아들을 집을 나가기 전과 같이 여겨주었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상속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락지도

손가락에 끼웠으며, 더군다나 아버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인만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가져다가 신김으로써, 아들의 신분은 이제 집에서

나가기 전에 누렸던 상속자의 위치로 회복되었다.

 

작은 아들이 자신을 스스로 아버지의 종으로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살진 송아지'로 표기된 '톤 모스콘 톤 시튜톤'(ton moschon

ton siteuton; the fattened calf)는 가장 귀한 손님이 오는 날에

잔치를 베풀기 위하여 준비해 둔 것이다.

 

이 송아지는 여러 마리 송아지 가운데 살이 가장 많이 오르고

기름이 흐르는 것으로서 귀한 손님이 올 경우에 잡으려고

특별히 양육해 왔던 송아지이다.

 

그것은 원문상으로도 '톤 모스콘'(ton moschon; the calf)로서

정관사 '톤'(ton; the)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잡아라'로 표기된 '튀사테'(thysate; kill it)의 원형인

'튀오'(thyo)가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주로 희생

제사에 관련된 것이기에 일단은 사람이 먹기 위해 송아지를 죽이는 의미가

있지만, 그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송아지는 어쩌면 죄를 지은

자신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 앞에서 송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송아지가 죽는

저 자리에 죄를 지은 자신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버지와 하느님께

크나큰 죄를 지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제 그래서 잃은 것의 회복과 그로 인한 주인의 기쁨이 '먹고 즐기자'에

해당하는 '파곤테스 유프란토멘'(pagontes eupranthomen; let's have

feast and celebrate; let's eat and be merry)로 나타난다.

 

이처럼 하느님을 떠났다가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온 자를 맞이하는 하느님의 기쁨이 바로 이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이렇게 다시 정리되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죄인들인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 돌아왔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이런 감당치 못할

자비를 영적으로 얻어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런 주님의 크신 용서와 자비로 표출되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사랑으로 보답해야 되겠는지를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묵상하게 된다.

               

 

 


오늘 복음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준 비유입니다.

이렇게 보면 비유 속 첫째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상징하고, 아버지 가산을 탕진하고 후회하며 돌아오는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이시어 그들과 음식을 드시며 잔치를 벌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못마땅해 합니다.
비유 속 큰아들의 대사는 그들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이 말을 듣고 큰아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복음서는 큰아들의 반응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종의 열린 결론입니다.

바로, 독자인 우리가 큰아들이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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