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6주일(가해) 마태 21,28-32;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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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9-15 ㅣ No.5527

연중 제26주일(가해) 마태 21,28-32; ’23/10/01

 

 

 

 

 

 

 

언제부터인지 세계화라는 단어와 함께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이 단어는 우리를 각박하고 냉엄한 무한경쟁의 승부 속으로 몰아내어, 우리도 모르게 루저나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압박감과 위기의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혹자들은 요즘의 사회풍속도를 가리켜 이렇게 풍자하곤 합니다. 45세 이하의 직장인이 5565세대가 되면, ‘신 보릿고개의 공포가 밀려온다고 말합니다. 정년은 55세에 닥쳤지만, 국민연금은 65세까지 기다려야 하고, 자식들이 들러붙어 있어, 소득은 줄었어도 애들 뒷바라지는 여전히 해야 하며, 나이 든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계속 노부모는 모셔야 하고, 노화가 본격화하면서 병원을 자주 찾게 되어 병원비는 급증하며, 그간 생활비 등으로 꾸어온 은행 빚이 명함이 없어지면서부터 대출상환 압박이 심해지고, 한동안 직장에 다니느라 일에만 빠져 있다가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하나둘 돌출되기 시작하면서, 툭하면 다투게 되고, 재산은 있어도 현금 흐름이 막혀, ‘흑자도산의 형태로 본의 아니게 자린고비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의 미래도 녹녹하지 않아 보입니다. 미지의 미래를 향해 무한한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이 사회가 나를 기쁘게 맞아 줄지, 내 자리가 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신기술, 신제품, 신마케팅 등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데 반해, 현실은 좀처럼 간극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고, 사회의 기득권과 여러 가지 장애들이 우리 앞길을 막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이 숨 쉴 곳이 있나 봅니다.

 

현실은 우리를 반기기보다 쥐어짜는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결의를 다지듯 이를 악물고, 동료와 이웃을 나의 경쟁 상대요 적이라는 경계심을 가지고 덤비지만, 모두 나보다 못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힘겹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어도 앞서가기 힘든데,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경계를 하면서 나아가자니, 발걸음이 한층 더 무겁기만 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4) 라고 권고합니다. 시쳇말로 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고,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네가 떨어지거나 떨구어져 나가야만 하는 듯한 사회조건 속에서,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너를 배제하고 젖혀야만 내가 살 수 있다면, 내가 살아난 다음의 세상은 나 홀로 외톨이일 뿐이고, 너 없는 나로서 나의 존재마저 없어질 것이라면, 너무 순수하거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로 치부되고 말겠습니까? 아니면, 너를 배제하고 젖히기 위해 쏟는 힘을,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존재양식과 방법을 모색하고 이루기 위해 쏟는다면, 너와 내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눈앞에는 단지 흑과 백, 좌와 우의 두 개의 선택만이 보일지 모르지만, 정과 반의 합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비전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1-3.5)

 

우리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라는 새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유다교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한 백성들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벌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어진 소명을 따라,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죗값의 대속제물로 삼아 희생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총체적인 삶을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내 한 몸 살아남기 위해 서로 찍어내고, 깎아내리며 원수같이 싸워 누르려 하고 있는지?

내가 너와 함께하기 위하여 양보하고 희생당하면서 살아온 결과로 지금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싸운 결과로 많은 사람을 잃었고, 아직도 힘겹게 더 싸워야 하며, 불안하고 불행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묻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마태 21,28)의 말에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29) 맏아들과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은”(30) 다른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

 

우리가 일찍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대답만 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생각을 바꾸지 않은채 끝내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그 방법이 진정 우리를 함께 살 수 있게 할 것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믿지도 않고, 실행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유다인처럼 예수님께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1-32) 라는 지적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합시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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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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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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