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7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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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7-03 ㅣ No.60

 

1.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ꡒ그들(바르나바와 사울)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ꡐ그리스도인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ꡓ(사도 11,26).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ꡒ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ꡓ고 말하였다.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ꡐ그리스도인ꡑ이라고 할 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오지만 간디의 ꡐ그리스도인ꡑ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체험 가능한 분으로서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체험되는 한 분 하느님을 현존하시는 하느님(창세 32,29: 탈출 3,14), 사랑 그 자체이신 분으로(1요한 4,8)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으며,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고백한다. 특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존재임을 믿는다(창세 1,26).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해졌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마 6,3~9)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일치로 불린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2코린 13,13)를 누리도록 불린 이들이요, 서로에게 축복의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믿는다.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교회를 일치시키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더 정확히 ꡐ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기원하는 교회ꡑ를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로 주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결합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과 친교와 사랑으로 만난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용서를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그 은총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새로운 삶이 있음을 믿는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죽음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느님을 찾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며, 그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새 창조를 믿고 바라는 사람이므로,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의롭고 거룩한 삶과 영원한 생명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켜진 사람(콜로 2,12)이며, 하느님의 작품이고(에페 2,10), 예수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갈라 3,27)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 새 창조 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고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 하느님 안에서 현존하며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세상의 순례자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_김현준 율리오 신부


2.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를 빌며

금년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지 1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며 오는 5일은 특별히 신부님의 장하신 삶과 정신을 기리며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아프리카 자이레 남쪽 나카투바라고 하는 작은 고장 신자들은 흙벽돌로 정성껏 성전을 짓고 1976년 6월 6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교구장 가방가 주교님을 모시고 새 성당을 봉헌하면서 멀리 한국의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을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인위에 올림을 받지도 않으셨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멀리 아프리카의 소도시에서까지 그처럼 받들어 모실 정도로 성 김대건 신부님은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성인의 생애를 일별해 봅시다. 김 신부님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순교자 집안의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년 시절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로 이사를 했고 15세 때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뽑혀서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마카오로 유학갔습니다. 열여섯 살 소년의 이 먼 유학길,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힘겨웠던 도정(道程), 이로부터 그분은 온전히 순교자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마카오 유학 1년 반 만에 동료 최방제의 죽음을 지켜보는 슬픔을 안고, 기해박해(1839년) 때 자형의 밀고로 아버지가 체포돼 순교했다는 소식까지 들으시면서 사제수업을 쌓아가셨던 김대건 청년의 단장(斷腸)의 비애를 생각해 봅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돼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 일행을 모시고 귀국해서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1846년 6월 5일, 연평도 부조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조선입국의 길을 트려다가 잡히셨고, 그해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수 순교하셨습니다.

순교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충성스런 전사 여러분!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영적 지도자인 오늘의 우리 사제들을 생각하고 또한 사제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이며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사제란 대체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며 하느님 대전에 종교적 행사인 제사를 봉헌합니다. 인간이면서 초자연적인 일에 참여하고 인간이면서 초자연적인 생활에 불림받은 이들이며 성사집행권과 그리스도 신비체를 성화시키는 권리와 품위를 지닌,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존귀한 사제직분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제들은 ꡐ한국 사제들의 수호자ꡑ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제는 그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겹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그 삶 전체를 철두철미 오직 한 분 스승 그리스도님을 모방하며 사는 온전한 봉사자입니다. 검은 수단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으면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참목자들입니다. 그러나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나며, 추우면 추위를 타고 감기에 걸리며, 더우면 더위를 먹는 인간적인 약점과 조건을 그대로 지닌 채 사제적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제품을 받으면 성소(聖召)가 분명해졌다고 하며 제의(祭衣)를 입고 관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제성소가 완결되었다고 합니다. 사제란 스스로 끊임없이 수덕생활을 하며 구원과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순례도상의 ꡐ길 가는 나그네ꡑ(Homo Viator)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제의 부족하고 모자라는 면과 약점을 보충하고 애덕과 사랑으로 이해하고 감싸며 그 소중한 삶을 옹호하고 지켜야 할 과제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도의가 어지럽고 황폐되어가는 어두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승리를 내다보며 이 시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최후와 김대건 신부님의 최후를 함께 묵상하면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후예인 우리의 사제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해하고 감싸며 옹호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의 어머니시고 저희 레지오의 사령관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한국교회와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_최홍길 레오 신부


3. 겸손된 봉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끼게 되는 하느님 체험과 은총을 간직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좀 멀리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면 느낄수록 내 자신이 보잘것없고 부끄럽고 죄스럽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앞에 내가 드린 것은 너무도 작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의 작은 마음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철철 넘치고 그분의 자비로우심은 더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체험을 하고도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모습이라 실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도 하느님의 크고도 깊은 사랑을 체험한 후에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는 은총이 큰 곳에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번민과 갈등도 늘 우리 주위에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기도하셨던 겟세마니에는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기다렸다고 하는 장소인데, 그곳의 제대 밑에는 두 개의 조각이 있습니다. 두 명의 제자가 졸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2년 전 예루살렘에서 지낼 때 그곳에 가면 많은 위로를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급박한 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나는 어떠한가? 나의 부족함을 위로해주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럼에도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ꡒ부족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시니 감사합니다.ꡓ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굳게 믿으십시오.

우리의 모자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드리는 솔직한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겸손된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민과 갈등에 휘둘리지 말고 굳센 믿음과 용기를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위로가 없을 때(준주성범 2권 9장)

1.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면 사람의 위로를 업신여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도 없고 하느님의 위로도 없이,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즐겨 마음의 유배를 견디고자 함은 어려운 일이며, 매우 위대한 일이다. 은총이 있어, 마음에 좋고 신심이 난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냐? 이런 좋은 시간은 누구나 다 원하는 바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이끄신다면 그는 참으로 유쾌히 말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이 어려움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무엇이냐? 전능하신 분의 손이 그를 붙들고, 제일 훌륭한 안내자가 그를 이끄시지 않느냐!

2. 사람이 무슨 위로가 되는 것을 곧잘 좋아하지만, 자기 편익을 도모하지 않기는 퍽 어렵다. 치명 성인 라우렌시오는 자기가 모시던 사제와 세상을 함께 이겼으니, 이것은 세상에서 무슨 즐거움이 될 만한 것은 다 천히 보고, 또 자기가 극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대사제 식스토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그러이 떠나 이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조물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조물주를 더 사랑하였고, 인간의 위로를 구하는 것보다도 하느님의 원의를 따라 행하려 하였다. 너도 그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함에 필요하다면, 아무리 없지 못할 벗이요, 극히 사랑하는 벗이라 할지라도 떠나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벗이 너를 버리고 떠났다고 괴로워 말아라. 우리는 다 한 번은 서로 떠나고야 말 것이다.

_윤병길 신부


3.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

세례식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합니다. 남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아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몸소 이것을 실행하셨으며 세례예식 때에 우리들은 그분의 그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이 그분에게 한없이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열정적이고, 몸소 베푸시는 것이며, 한이 없고 변하거나 멈출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ꡐ모든 사랑 중에서 제일의 사랑ꡑ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혹은 그분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베네딕토 교황 성하의 첫 번째 회칙은 우리들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다시 깨우치고 있습니다. ꡐ하느님은 사랑이시다ꡑ 라고.

그러나 세례와 파스카의 신비에는 더욱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우리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게 되며 이와 같은 깊은 친밀함으로 우리들은 그분과 결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교의(敎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처럼 포도나무가 그 가지와 결합되듯 우리는 그분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레지오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교의와 실재성(實在性)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비체의 교의가 레지오의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비체의 위대한 설교자이며 신학자인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ꡒ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ꡓ(갈라 2,20). 바오로 성인의 위대한 외침을 더욱 간명하게 말한다면 ꡒ나의 삶이 곧 그리스도이다ꡓ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의 실재성과 진실성에 관하여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 에델 퀸, 알피 램과 그 밖에 훌륭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의 관심은 오직 이 묵상과 기도뿐이었습니다. ꡐ교회ꡑ는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인 사회, 즉 건물 등 구조물들이 있거나 준수해야 할 법률 등 질서체계를 갖추거나 그 안에 이런저런 단체들이 있고 고유한 성직을 맡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동체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당신과 내 안에 또 교회의 모든 신자들 안에서 살고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프랭크 더프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ꡒ교회의 봉사에는 당신 안의 가장 좋은 것들을 우리들이 이용하는 문제만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혹여 잃어버릴지도 모를 훨씬 더 귀중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ꡐ주님께 맡길 때에ꡑ 그분은 당신이 드리는 것을 모두 받습니다.ꡓ

주님께서 거두시는 당신의 봉헌 안에 그분이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맡기는 그 봉헌으로 자신을 우리들에게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봉헌을 그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신성적(神性的)으로 이용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ꡐ신성적ꡑ이란 말은 ꡐ우리들의 봉헌을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ꡑ 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봉헌을 단순히 이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봉헌은 아무리 잘 보아도 미약할 뿐입니다. 나는 그 봉헌 안에 주님께서 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작은 봉헌, 작은 노고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큰 것들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신비체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이렇게 기도, 전구합시다. ꡒ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가톨릭 교회의 지체들임을 날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측량할 수 없는 큰 선물임을 알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ꡓ

_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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