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용서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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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9-12 ㅣ No.472

 

 

제1독서: 집회 27,33-28,9.

제2독서: 로마 14,7-9

복음: 마태 18,21-35.

용서의 이유

  옛날 어느 섬에는 아주 엄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부녀자가 외간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게 되면 그 여인을 벼랑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서 죽이는 관습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 여인이 잘못을 범했습니다.

 

마을 원로 회의는 다음날 새벽에 그 여인을 처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그 결정이 내려지자 사라져서 처형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형은 예정대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에 보니 죽었어야 할 여인이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어찌된 연유일까요? 처형 전날에 남편은 밤새도록 배에서 그물을 가져다가 벼랑 중간에 쳐놓았고, 이 덕분에 부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정성에 감탄해서 더 이상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답니다.

 

  용서는 한 사람을 죽음의 나락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그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더구나 거듭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해서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즉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거의 불가능하게 여기지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듭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 어떤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졌다가 탕감을 받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대략 20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인데, 일 만 달란트라면 헤아릴 수 없이 큰 액수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이는 일만 달란트의 50만분의 일정도-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닦달해서 빚을 다 받아냅니다. 바꾸어 말하면, 헤아릴 수 없이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종을 불러다가 야단을 칩니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어서 왕은 그 종이 자신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두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큰 용서를 받고 있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간들은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종처럼 이웃에게 용서를 거절한다면, 이미 받은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1 독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집회 28,4)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지만, 우리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은 분입니다. 신앙인은 이런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들(제2독서)로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크나큰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본기도), 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역시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손희송 신부 (연중 제24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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