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동성당 게시판

나의 자리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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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경 [sue60] 쪽지 캡슐

2000-01-18 ㅣ No.355

연수를 다녀왔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의 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지겹도록 반복되는 세상의 힘든 일들이 나름대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겸손한 것이라고 느꼈었지만,

그 자체도 얼마나 나를 편견과 아집으로 묶어 놓던 것인지...마음이 아팠다.

나의 기준으로 세상과 인간을 규정짓고,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함을 배제하고,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단절들을 만들어 내고...

무엇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하며 무책임한 일인가?

똑같은 사건과 사실을 두고서도 관점에 따라, 또 필요에 따라 무한대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왜 매순간 기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미움과 오만... 결코 다른 사람이나 나의 환경을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미워질 때, 나는 오히려 그를 미워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미워해야 했으며, 다른 이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나

조금 더 잘났다고 생각될 때, 나는 오히려 나의 편협한 눈과 마음을 치유해야 했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타인과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우둔함

때문이며 결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말씀은 나에게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나의 지혜로움이 드러났을 때 나는 오히려 나의 어리석음을 느껴야 하고,

나의 약함이 드러났을 때 나는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광야로 돌아왔다.  변한건 없었다.  연수를 다녀와서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또 마음 아파하며,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연수 때 만난 평화이신 나의 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겠다.

그리고 연수가 참 좋은 느낌을 주는 3박4일 이었노라고 기억해내듯 말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이시고 평화이신 나의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건 간에...

지금도 주님은 끊임없이 나에게 묻고 계신다.

 

   " 수산나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 네, 나의 주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삶의 문제와 직면하면 어느새

나의 구원자는 나도 모르게 바뀌어 있곤 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주님이

그런 변덕스럽고 지조없는 나를 더욱 뜨거운 팔로 감싸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이 광야에서 또 다시 넘어질 나를 보면서,

’과거에 내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라는 식으로 지금 나의 연수 후기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벌써부터 힘들어 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이런 나의 모습마저도 사랑해 주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전체주의적인 하나의 방법과 잣대로 우리를 가두러 오신분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형태 - ’시간과 공간’이 조합된 -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는 ’상황속의 하느님’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방식의 문제와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지만

결국 그것에 내재된 공통된 문제설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질문과도 통해 있다.

그 대답에 관한 자장안에서만이 나의 존재를 고백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고백을 통해서만이 내 삶에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의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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