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구원에 대하여 [인터넷전교] [교리학습] 28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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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3 ㅣ No.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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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신 분들께서는 이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의 요약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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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젤뚜르다)

누군가 카톨릭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분께서 대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아영세받고 그냥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거듭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령안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행복해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카톨릭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지가 않아 괴롭습니다.

 전  출근길에 자주 기독교 방송을 듣습니다. 가톨릭 방송과 기독교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놓았었는데 가톨릭 방송을 거의 안듣게 된것은 출퇴근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 뉴스를 하거나 노래도 찬양은 거의 들을 수 없고 일반 가요가 나옵니다. 하지만 기독교 방송은 언제나 말씀을 들을수 있고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주임 신부님의 말씀으로 아무런 은혜가 없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깨달을때가 많습니다.  전 신부님들께서 말씀 준비를 좀 더 열심히 해주셨으면하는 아쉬운 마음이 많습니다.  그리고  주일 강론시간에 다른 사람, 예를 들면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나 후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시간을 주고 말씀은 안전하실때.. 또는 주보에 있는 말씀을 그냥 읽어주실때.. 특히 가지 않으려는 남편을 억지로 데리고 갔는데 말씀이 없을때 전 정말 속상합니다. 물론 성체가 미사의 꽃이라고 하지만, 말씀 또한 크게 역사하는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다보니 4, 5년전에 한번 심하게 했던 고민을 다시 하게되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인데요. 왜 성당에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지요? 종교 배타주의가 좋은건 아니지만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서 성당을 좋아하는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피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것을 교리로 알고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목숨을 걸고 신앙을 이어왔는데 왜 점점 보편화로 방향을 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착하게만 살면 구원되는것인지요? 개신교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말다툼까지 벌였었지만, 제가 그 친구와 다투면서 느끼는건 제가 아는게 없다는 점과 그 아이의 말이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요.. 전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 착하게만 살면 구원이 된다고 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당을 다닐필요도 예수님과 친교을 맺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면 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피를 흘려야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당에만 열심히 다니고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지금 생각은 예수님의 피로 내가 깨끗해졌다는 확신이 있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옳게 생각하고 있는건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개신교신자들이 선교에 그렇게 열심인것과 가톨릭 신자들이 선교에 관심이 없는것을 한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천주교신자들이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신자들과 이야기해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들을 구원시키기위해 자기의 시간을 쪼개서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믿는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사람들이 성당에 안다닌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다. 그들도 구원받을테니까요.. 그렇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일일히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는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구원보다 더 중요한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구원에 대하여 저뿐만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제대로 배우고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성직자와 지도자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지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구원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교육이 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이 되는지 모른다면 이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십일조도.. 가톨릭 신자들이 헌금을 아주 조금 하는것도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 말씀으로 감동시킨다면 알아서 십일조를 하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때는 꼭 내용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 성가를 불러야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전 솔직히 성가대에서 라틴성가로 굉장히 긴 성가를 부를때 딴 생각을 많이 합니다. 노래는 잘하는구나.. 연습하는데 힘들었겠다.. 뭐 그런 생각입니다. 찬양도 기도라고 했는데 꼭 그런 노래만을 성당에서는 해야하는지요.. 운전하다가도 복음성가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기도도 되고 회개의 눈물도 주르르 떨어지는데.. 너무 형식적인것에서 탈피했으면 좋겠습니다. 전 예수님께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시는 분은 꼭 자세히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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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찬미 예수님!


 

가톨릭 교우님들 중에 자매님께서 주신 그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사제나 주변의 가톨릭 교우님으로 부터 듣지를 못하고 개신교 교회로 떠나간 분이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개신교 측은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갈라져 나간 형제들로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구원관을 버리고 나가 나름대로 새로운 구원관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500년 정도 노력하였으나, 이렇다 할 구원관이 없습니다. 주신 말씀을 읽어 보면 본의아니게 개신교측 주장에 상당히 물이 많이 드신 듯 합니다.

 

이미 몸에 베인 물을 닦아내는 데에는 물이 든 시간만큼 참고 인내하며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구원관에 대하여 요즈음 사제들께서 제대로 말씀들을 해 주시 않는 문제가 있고하여 일전에 마련한 글이 다음이 글이오니, 시간을 내어 차분히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성당이 있는 지역에서는 가톨릭교회의 구원 이외의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관 자체가 없는 개신교 교회를 통한 구원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개신교 신자와의 대화 게시글로 바로가기..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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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전 개신교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신부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개신교에서 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뿐이지 물이 들었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이 들었다는 표현은 나쁜것에 접촉했을때 하는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개신교을 통한 구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을 알고 싶은겁니다. 저도 통신으로 신학공부도 하고 성경도 많이 읽었습니다. 오히려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에 대해 알지도 못할뿐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으니까 그런건 충분이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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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라틴어 성가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톨릭 교회를 단 한개의 교회, 영생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으로 세우셨기에 단 하나 뿐이었고 또 앞으로도 단 하나 뿐이어야 하는 구원의 여정이 펼쳐지는 단 하나 뿐인 교회로 우리들을 한가지로 묶어 주는 전례음악입니다. 일찌기 그레고리오 대교황님께서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만드시어 우리들을 한 형제 자매로 엮어 주신 성가가 바로 라틴어 성가 즉 그레고리오 성가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2000년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잘못이므로 자매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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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전 개신교에 대한 감정적인 글을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개신교와 천주교에 대한 글은 무진장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데 글을 남기다보면 느끼는건 항상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는겁니다. 전 기도하는 맘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저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이 꼭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글이나 책은 소개해주시면 많이 참고하겠지만, 제가 거의 읽었을것 같습니다. 개신교를 무조건 배척하는것도 문제고 모든 종교를 다 포용하는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이 궁금해서 글을 올린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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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아래에 라틴어 성가와 관련된 몇 개의 게시글을 알려 드립니다. 내용이 좀 복잡하고 길더라도 역시 시간을 내어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지는, 미사 전례예식은 미사에 참석한 인간들이 듣고 즐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천주흠숭지례를 주로 하는 성스러운 제사의 자리이므로, 천주께서 가까이 하실 천상의 음악, 즉 천국에서 내려 온 성음악(Sacred Music)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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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전 단 하나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단 한줄로 표현하면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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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구원은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로서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 아마도 구원의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이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사제은 이미 선을 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사제께서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확신에 찬 말씀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서 책을 읽어서는 지금 갈구하고 계신 부분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부분이 가톨릭 성교회의 전승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특별한 은총으로 만드신 천주의 뜻은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단 한마디로 그렇게 쉽게 표현할 수도 없고 또 이해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가톨릭교회는 모든 지극 정성을 다하여 천주의 인류 구원을 바르게 구체화 하기 위하여 노력해 온 줄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한 줄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떠나온 바로 그 곳 즉 천주가 계신 곳으로 되돌아감"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간에 주신 댓글 답변에 대하여 언급하느라, 옆으로 좀 벗어 났는데, 다음의 몇 개의 게시글들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일고 이해하는 데에 쉽도록 순서대로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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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성령기도회 지도 신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신부님의 성함을 밝혀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전 빛 님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로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많은 걸 알고 계시겠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감화를 주는건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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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성 (Sacred) 글자의 가톨릭 교의적 의미.. (클릭하세요)

 

지금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에 대하여 크게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그리고 지역에서 누가 보더라도 선행을 많이 베풀고 하신 착한 분께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 구원의 은총을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내용이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의 전부입니다. 더도 없고 덜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드리는 말씀은, 지식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묻지 않으셨다면 굳이 제가 말씀드릴 이유가 없는, 그러나 어디 가서 물으셔도 잘 듣기 힘든 내용들입니다.

 

한 두해 혹은 책 몇 권 읽고 드리는 그러한 답변이 아닙니다. 수십년에 걸쳐 미사 중 강론말씀 중에 사제를 통하여 주시는 천주의 말씀 속에서 그 실체를 알게 된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는 데 말씀하신 성령기도회 지도 신부님의 존함을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반드시 확인할 부분이 있는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기도회"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성령기도회는 작위적인 표현으로서, 생활성가라는 단어, 열린미사라는 단어와 함께 지금 국내 가톨릭 교우님들께 가장 많은 교리적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사용하여서는 곤란한 틀린 표현들입니다. 이들 세 단어는 국내 가톨릭 교우님들만 사용하고 있는 즉, 다른 나라의 가톨릭 교우님들이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는 이상한 표현들입니다. 이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말씀드리면, 모두가 개신교에서 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보고서는 모방하여 부르는 단어들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한 용어 혹은 표현이 절대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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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빛 님.. 답변 감사합니다. 하지만 성령기도회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한 명칭을 제가 잘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님이 승인하시고 주임신부님이 계신 그런 기도모임입니다. 마치 위험집단을 보는 듯 하시는것 같은데 그건 잘못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존함을 빛님께서 확인하실 필요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빛님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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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사제가 아니므로, 가르칠 권한이 없는 평신자이기에 제가 전해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잘 전달해 드리려고 할 뿐입니다. 성령기도회라는 용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하여 모르고 계시니 의아해 하시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만, 그러한 용어는 사용하면 안되는 매우 곤란한 작의적 표현입니다. 그러한 모임 자체를 제가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단체명이 많은 과오를 불러 일으키고 있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교황청으로 부터 경고를 받았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로 부터 제재를 받은 사제들께서 집필하신 책들이, 가톨릭 관련 출판사를 통하여 지금도 여전히 팔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모르고들 계시니, 보통 문제가 아닌 셈입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이 책 저 책 읽는 것이 자매님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다성 성가 (Polyphonic Chant)를 부르고 또 듣고 싶어할까? (클릭하세요)

 

조금 기다리시면 성령기도회의 영어 명칭, 교황청 인준을 받은 영어 명칭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 루터파 개신교 교회 공동 선언문.. (클릭하세요)

 

 의화(Justification)는 성화(Sanctification)의 첫 단계일 뿐.. (클릭하세요)

 

[

게시자 주: 2006년 들어와 감리교회 측과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회일치 노력에 관한 내용이라, 추가하였습니다. 본문 내용도 내용이지만, 특히, 지난 2006년 7월 중순에 서울을 방문하신 교황청 카스퍼 추기경님의 말씀을 보도하고 있는 " 바로 아래의 글의 댓글들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파문당한 마르틴 루터는 과연 복권될 수 있을까? (클릭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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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뚜르다 (2006/02/21) : 올려주신 글(가톨릭교회-루터파 개신교 교회 공동 선언문) 잘 읽었습니다. 그 글에서 가톨릭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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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성령기도회라는 용어가 잘못 번역된 표현임을 아실 수 있습니다


신심단체명 정의.. (클릭하세요)

 

젤뚜르다 자매님,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구체적으로 연옥교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들고 나올 때에도 연옥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교황청으로 부터 파문을 당하고 나서 부터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을 부정하기 위하여 진실로 하여서는 안될 몇 가지 대죄를 천주께 범한 자 입니다. 개신교 목회자들 대부분도 이러한 내용을 잘 모르고 계시고요.이번의 대화를 통하여 구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발견하셨다니 저도 참으로 기쁩니다. 자매님의 성가정에 더 큰 천주의 은총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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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운)

제목: 모두다가 으뜸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것입니다...

 

전에  추기경님의 TV 대담에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도 열심히 믿으면 지름길은 아니지만 구원있다고 하시면서....

 

주된 내용중 기억나는 것을 정리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부처도, 공자도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따라서 옛날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던 시절,  이웃을 사랑하고 열심히 살다 간 선조들은  연옥이나, 천당에 갈수 있고 열심히

 

  불교나 유교 믿으면서  살다간  선조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도 모르게 따른 것이니까

 

  다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현재도 마찮가지이고....]

 

흔히 개신교에서  꼴통에 속하는 자들중에서 오직  시멘트와 벽돌로 지은  건물에서 기도를 해야 ,  수준이하

의 먹사들에게 11조 를 상납해야...천국간다는 이야기는  여기서는 제외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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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구원은 온전히 하느님의 권한이므로, "갈 수 있다.."가 아니라.. "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즉, 기록과 문헌으로 말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사제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도 바로 이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면서 주장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지금과 같은 예상 밖의 큰 교리적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이신 듯 한데, "하나님"은 "하느님" 의 평안도 사투리라고 합니다. 개신교 측에서 자꾸 틀린 표현을 사용하므로,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말로 된 자료들을 찾아 볼 때에, 가톨릭 측 자료인지 혹은 개신교측 자료인지를 구분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이외에는, 한국인이 아닌 기독교 신자(가톨릭 신자 및 개신교 신자 포함)가 이런 호칭의 문제를 참으로 의하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도 개신교측에서 여태까지의 폐쇄적인 한반도에서만 설득력 있는 주장은 이제 좀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약성경 중 4 복음서 말씀에 근거한 삼위일체 신앙고백을 하시는 개신교 신자들로서, 연옥교리를 인정하시고 또 미사 중 영성체를 매 주일마다 모시면 "구원의 은총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 가실 수 있습니다. 즉, 누구가 뭐라고 하여도 의화(Justification)는 성화(Sanctification) 의 처음 시작일 뿐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즉, 마르틴 루터가 "오직 내가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면서 버리고 나간 부분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핵심 내용입니다. 이 점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을 지나치게 국내의 정서에 맞게 확대 해석하다가, 몇 분의 사제께서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 교우님들께 사제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퍼뜨리다, 현재의 교황님께서 바티칸 신앙교리성 담당 추기경으로 계실 때에, 두 번에 걸쳐 이들 한국인 사제들에게 경고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또 이 분들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내린 제재를 지금도 받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적 주장이 많은 국내의 분위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 또한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천주의 구원에 대한 계시가 전혀 없는 국내에 특히 많은 단순한 "범신론적 주장"과, "천주의 계시가 담긴 구원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같은 종류가 아니므로, 대등한 입장에서 이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어불성설입니다. 염려스러워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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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규)

+ 찬미예수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2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결코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오며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젤뚜르다님이 말씀하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말은 대담이나 대화 중 나온 말로써 명확한 신학적 정의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교에 몸을 담고 있더라도 구원의 가능성은 있다."입니다.

공의회는 이에 대하여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선언합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종교 다원주의로 해석하여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구원의 종교는 가톨릭교회만이며 구원이 없는 종교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는" 각 개개인에게는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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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2006/02/24) : 윗글에 동의하며 다른종교에 구원이 있을수 없는 이유를 한토막 붙이면.. 타종교를 통해서는 성부의 영이시며 하느님 자신이신 성령이, 참자기인 절대아가 거하는 뇌에 임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와의 실재적 접목이 불가능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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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1. 구원

구원이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여 한 처음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기에 눈이 너무나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어 이루어 주셨으며,

이를 통해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완전한 제사이며, 이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체성사는 이를 계속 재현하고 있는 것이며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그 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 교회는 단순한 이 세상의 인간적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며,

천국의 성인들과 연옥의 갇힌 영혼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의 교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연대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교회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하여 세워졌으며 사도좌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 자체는 그 안의 인간의 불완전함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거룩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내용이 제가 알고, 믿고 있는 가톨릭의 구원관입니다. 

 

2.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점을 포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다른 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종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도

우리 가톨릭 교회와 연결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를 온전히 알게 된 이후에도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면 교회의 존재 의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선교에 소극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오해했거나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인류복음화성이 있겠습니까. 

 

3. 프로테스탄트와의 차이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프로테스탄트와의 차이를 말씀드리면,

 

첫째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가톨릭은 원죄로 인해 인간의 눈이 많이 어두워졌다고 보지만

그래서 스스로 구원은 절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구원은 은총을 통해서 오지만, 인간은 교회를 통해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원죄로 인해 인간은 장님이 되었다고 봅니다.

 

둘째, 성사의 문제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동방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성사가 그 자체로써 효력이 있다는 이른바 사효성의 이야기이자 그리스도 신비체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합니다.

'성서에 없는데? 증명할 수 있어? 원죄 때문에 완전히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인간은 그저 구원의 객체일 뿐이야'라고요.

그 결과 가톨릭은 세례를 통해서 깨끗해지고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인간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구원되었다고 쳐준다'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았는지 못받았는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알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아주 더러운 상태로 캄캄한 밤에 뭔가에 이끌려 아버지의 집에 찾아갔다고 합시다.

아버지를 알게 되고 그 품에 안기는 순간 우리 몸과 옷이 깨끗해지고 아버지와 기쁜 마음으로

관계회복을 한다는 것은 가톨릭의 입장입니다.

반면 우리는 정말 더럽고 추한 존재이지만 안아 주시며, 그 품 안에서 '저는 더러워요. 추해요'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안기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도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회의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캄캄한 밤 정도가 아니라 눈이 멀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프로테스탄트식 논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습니다.

 

셋째, 성전의 문제입니다.

계시는 글로 쓰여진 것과 입으로 전승된 것이 있다는 것인데요,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역시 미약하나마 이를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시 프로테스탄트는 부인하지요.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프로테스탄트에도 수 많은 분파가 있고 견해가 너무나 다르지만

프로테스탄트즘의 출발은 바로 저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그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세상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입니다. 바로 연옥교리의 출발점이지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말입니다.

성사도 마찬가지지요.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가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변화시킨다는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안 보이니까요. 증명이 안 되니까요.

완전타락한 죄인이 인간이 그런 것을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에 있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알 수가 없거든요.

제일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문자화되고 눈에 보이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완전하게 복원시키기 위해서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하면서 분석합니다.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는 미사에 자주 참례하여 함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나누는 사람이지만,

모범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책상에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구원은 연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끓어오르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어떨까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말이지요.

성사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지상에서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과 성화의 과정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자 교회에 따뜻함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가톨릭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황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톨릭 교회 내에는 그러한 개인적인 확신과 열정을 확인하는 용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당신은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음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임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이 가톨릭 신자의 구원관을

살짝 보여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그리고 이웃과 사랑을 나눌 때 천국을 느낄 수 있습니다."

 

p.s. 1. 책을 한 권 추천합니다.

랄프 맥키너니 저 , 이재룡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의 위기 진단"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십시오.

 

p.s. 2.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구석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버렸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열정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열정의 근거가 주로 성경뿐이어서

협소한데다가 성사를 무시하는지라 제도화되지 않아서 열정이 식어 버리면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설령 냉담을 하더라도 스스로 신자라고는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부록.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퍼왔습니다. ^^;;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839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유다인들과 교회의 관계.

새로운 계약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자신의 신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주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신”332) 유다 민족에 대한 유대를 발견한다.333)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달리 유다인들의 신앙은 이미 옛 계약의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유다 민족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로마 9,4-5).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로마 11,29).

840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서로 유사한 목적, 곧 메시아의 오심(또는 재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들 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고 오해하는 비극 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그 모습이 가려진 메시아를 기다린다.

841 이슬람 교인들과 교회의 관계. “구원의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이슬람 교인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334)

842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교회의 관계는 먼저 인류의 공통적 기원과 공통적 목적에 따른 유대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이고, 그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거룩한 도성에 뽑힌 이들이 모일 것이다.335)

843 교회는 다른 종교들이, 알려지지 않으셨지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결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336)이라고 생각한다.

844 그러나 사람들은 그 종교적 행동 양식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오류와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더 섬기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337)

845 성부께서는 죄 때문에 흩어지고 길 잃은 당신의 모든 자녀를 다시 모으시기 위하여 온 인류를 당신 아들의 교회로 불러모으고자 하셨다. 교회는 인류가 그 일치와 구원을 되찾는 곳이다. 교회는 “화해를 이룬 세상”338)이며, “주님의 십자가의 돛을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 이 세상을 잘 항해하는”339) 배이다. 교부들이 즐겨 쓰는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는 홍수에서 유일하게 구해 주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된다.340)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341)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342)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신앙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343))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344)

   교회의 보편성이 요구하는 선교

849 선교 명령. " '구원의 보편 성사’가 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교회는 그 고유한 보편성의 내적 요구에서 또 그 창립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한다.”345)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850 선교의 기원과 목적. 주님께서 내리신 선교 명령의 궁극 원천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이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46) 그리고 이 사명의 궁극 목표는, 바로 인간들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시는 친교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347)

851 선교의 동기.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선교 의무와 열성의 원천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재촉합니다”(2고린 5,14).348) 과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앎으로써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구원은 진리 안에 있다. 진리의 성령의 활동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위임받은 교회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기 위해 그들의 희망을 맞으러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한다. 구원 계획이 보편되다고 믿기 때문이다.

852 선교의 길. "교회의 모든 선교의 주역은 성령이시다.”349) 성령께서는 선교의 길에서 교회를 이끄신다. 이 선교(missio)는 “계속되며 또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missio)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 나가야 한다. 곧,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또 죽음에 이르는 자기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그 죽음에서 승리자가 되셨다.”350)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351)

853 그러나 교회는 그 나그넷길에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복음이 맡겨진 자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352) 경험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참회와 쇄신”353)의 길로 나아감으로써만 “십자가의 좁은 길”354)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355) 사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356)

854 바로 이러한 사명을 통하여 “교회는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 존재한다.”357) 선교 활동은 인내를 요구한다. 우선 이 일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시작된다.358) 그리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359)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고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이어진다.360) 이러한 노력은 민족들의 문화 안에 복음을 토착화하는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다.361) 그리고 실패를 겪는 일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집단들 또 민족들과 관련하여 교회는 그들을 오로지 단계적으로 만나고 파고들며 또 그렇게 하여 그들을 가톨릭 교회로 온전히 받아들인다.”362)

855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향한 노력을 요구한다.363)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자녀들에게서 교회가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다. 더욱이 교회 자체로서도 그 현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충만한 보편성을 드러내기가 어렵게 되었다.”364)

856 선교 임무에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의 존경 가득한 대화가 포함된다.365) 믿는 이들은 “마치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과도 같이 이미 민족들에게 있는 진리와 은총”366)을 더욱 잘 알게 됨으로써 이 대화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베푸신 진리와 선을 공고히 하고 보완하며 향상시키려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367) 그들을 오류와 악에서 정화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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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다음은 구원과 관련하여, 위의 가톨릭 교리서 내용 (http://222.109.34.30/pds/bishop_docu/CATECHISMUS/CATECHISMUS_01_2_3.htm#i683 )과 관련된 가톨릭 교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발췌 내용들입니다.

 

참고입니다만, 가톨릭 교리서는, 7성사를 세우는 등, 최소한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에 지속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 (1543 - 1563)의 제일 큰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디 한 구절만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시고, 전체 문맥 안에서 이해를 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스테파노 형제님께서 답글을 주시기 전 며칠 전에 이들 자료들을 준비하였으나, 제가 귀국 관계로 너무 바빠 올려 드리는 것이 좀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스테파노 형제님께서 잘 정리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스테파노 형제님께서 주신 신앙고백 및 제가 드리는 신앙고백이 이들 문헌 내용과 같음을 아실 수 있을 것이고, 또 더 나아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시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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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222.109.34.30/pds/council/03lumen.htm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TIUM)

 

가톨릭 신자
14.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먼저 가톨릭 신자들을 생각한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마르 16,16; 요한 3,5 참조),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다. 그러나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12) 그러나 교회의 모든 자녀는 자신의 뛰어난 신분을 자기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총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13)

 

성령의 감도를 받아 명백한 의지로 교회에 합체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예비신자들은 이 소망 자체로 교회와 결합된다. 어머니인 교회는 이미 자기 자녀가 된 그들을 사랑과 배려로 감싸 안는다.


교회와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15.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도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14)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영예롭게 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진실한 종교적 열정을 보여 주며,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믿고,15) 세례의 인호를 받아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다른 성사들까지도 자기 교회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정하고 받는다. 그들 가운데에 많은 이들은 주교직도 향유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며 천주의 동정 성모님께 대한 신심도 존중한다.16) 기도와 다른 영적 은혜의 친교가 이루어지고, 성령 안의 어떤 결합까지도 진실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은혜와 은총으로 그들 안에서도 거룩하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시며, 그들 가운데에서 어떤 이들은 피를 흘리기까지 그 힘을 북돋워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인 양 떼 안에서 한 목자 밑에 평화롭게 일치되게 하려는 열망과 활동을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에게서 일으켜 주신다.17) 이 일치를 이루고자 어머니인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희망하고 행동하며, 그리스도의 표지가 교회의 얼굴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도록 자녀들에게 정화와 쇄신을 권고한다.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16. 끝으로,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18) 먼저, 계약과 약속이 주어졌던 저 백성이 참으로 그렇다. 인성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서 태어나셨으며(로마 9,4-5 참조), 선택에 따라 보면 그 백성은 조상 덕택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소명을 다시 거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11,28-29 참조).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모슬렘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디모 2,4 참조).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19)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20)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로마 1,21.25 참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과 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증진하고자,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선교 촉진에 진력하고 있다.


교회의 선교 특성
17. 성자께서 성부에게서 파견되신 것처럼 성자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요한 20,21 참조)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이 장엄한 명령을 교회는 사도들에게서 받았으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이 명령을 이행하여야 한다(사도 1,8 참조). 그러므로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16)이라고 한 사도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아, 교회는 끊임없이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새 교회들이 완전히 세워지고 또 스스로 복음화 활동을 지속하게 한다. 성령의 재촉을 받아 교회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 구원의 근원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도록 협력하고 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는 청중을 신앙과 신앙 고백으로 이끌어 세례를 받도록 준비시키고, 오류의 예속에서 구출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합체시켜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게 한다. 교회는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또는 민족들의 고유 의례와 문화에 심어져 있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없어지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치유되고 승화되며 완성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누구나 다 제 나름대로 신앙을 전파하여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21)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있지만, 성찬의 희생 제사로 “몸”의 건설을 완성하는 것은 사제의 임무이다. 사제는 예언자를 통하여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말라 1,11)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행한다.22) 이렇게 교회는 동시에 기도하고 일하여, 온 세상이 모두 하느님의 백성, 주님의 몸, 성령의 궁전이 되어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의 창조주이신 성부께 온갖 영예와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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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222.109.34.30/pds/council/08unitatis.htm#002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 UNITATIS REDINTEGRATIO)


가톨릭 교회와 갈라진 형제들의 관계
3.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15)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16) 후세기에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안는다.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교리나 때로는 규율 문제에서 또는 교회의 조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 완전한 교회 일치에 적지 않은 장애가, 때로는 중대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지만, 일치 운동은 바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17)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다.18)

더 나아가서, 교회 자체를 세우고 교회에 생명을 주는 요소나 보화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 오히려 탁월한 많은 것들이 가톨릭 교회의 눈에 보이는 울타리 밖에도 있을 수 있다. 곧 기록된 하느님 말씀, 은총의 생활, 믿음, 바람, 사랑, 성령의 다른 내적 선물과 가시적 요소들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께 모이는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귀속된다.

그리스도교의 적지 않은 거룩한 행위들도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교회나 공동체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는 이 행위들은 의심 없이 은총의 생명을 실제로 낳아 줄 수 있으며, 또한 이 행위들이 구원의 친교로 들어서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갈라진 교회들과19)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갈라진 형제들은 개인이든 그들의 공동체이든 교회이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루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함께 살아가도록 그들에게 베푸시고자 하신 저 일치, 성서와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천명한 저 일치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수단이 완전한 충만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앞장 서는 한 사도단에 신약의 모든 보화를 맡기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지상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으며, 어느 모로든 이미 하느님 백성에 소속된 모든 이는 그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동안 비록 그 지체들 안에서 죄로 상처를 입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약에 따라 천상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영광을 충만히 받아 누릴 때까지 하느님의 온유한 인도를 받는다.


II. 서방의 갈라진 교회와 교회 공동체

 

이 공동체들의 상황
19. 서방에서 중세 말엽에 시작된 저 중대한 위기나 그 후대에 로마의 사도좌에서 갈라져 나간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교 백성이 과거 여러 세기 동안 교회적 친교 안에서 살아 왔던 오랜 생활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 특별한 친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은 그 기원과 교리와 영성 생활의 차이 때문에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게 다르므로, 거기에 대하여 공정하게 서술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여기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려는 평화의 열망과 일치 운동이 아직 모든 곳에 파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치 정신과 상호 존중이 점차 자라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교회들이나 교회 공동체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특성의 차이만이 아니라, 특히 계시 진리의 해석에서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일치를 위한 대화를 더욱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이 대화의 토대와 격려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할 몇 가지 요점을 다음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
20.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공적으로 선언하며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드리는 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본다. 물론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 구원 활동, 교회의 신비와 직무, 구원 활동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역할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가볍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갈라진 형제들도 그리스도를 교회 일치의 원천과 중심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고 우리는 기뻐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더욱더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며 어디에서나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서 자기 신앙을 증언하려고 한다.


성서 연구
21. 성서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존경은 우리 형제들을 항구하고 치밀한 성서 연구로 이끌어들인다. 복음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이다”(로마 1,16).

성령을 부르며, 그들은 바로 성서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다.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하느님이신 스승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치고 수행하신 일들,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관상한다.

우리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지만, 성서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와 달리 저마다 참으로 다르게 생각한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에서 정통 교도권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거룩한 말씀은 바로 대화 자체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 안에 있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는 저 일치를 이루게 할 것이다.


성사 생활
22. 세례성사는 언제든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바르게 주고 또 필요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받는다면, 누구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새로 태어나게 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골로 2,12).3)

그러므로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된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는 오로지 시작이며 출발일 뿐이다. 세례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얻도록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완전한 신앙의 고백,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구원의 제도로 들어가는 완전한 합체, 마침내 성찬의 친교를 나누는 완전한 참여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와 갈라진 교회 공동체들은 비록 세례에서 흘러 나오는 완전한 일치를 우리와 함께 이루지 못하고 또 특히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고 우리는 믿지만, 그래도 그들은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이 만찬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다른 성사들, 예배,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
23. 이러한 형제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자라나고, 세례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길러진다. 이러한 삶은 개인 기도, 성서 묵상, 그리스도인 가정 생활, 하느님을 찬양하려고 모인 공동체의 예배에서 드러난다. 또한 그들의 예배는 공통된 옛 전례의 분명한 요소들을 때때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기도와 찬양에서 열매를 맺는다. 또한 생생한 정의감과 진실한 이웃 사랑도 생겨난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정신적 육체적 불행을 덜어 주고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사회 생활 조건을 더욱 인간답게 개선하며, 세계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적지 않은 활동들을 펼쳐 왔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도덕 문제에서 언제나 가톨릭 신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또 현대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똑같은 해결책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인 덕행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고,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로 3,17) 한 사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복음의 도덕적 적용에 관하여 일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결론
24. 이렇게 일치 운동의 실천 조건과 지도 원칙을 간단하게 제시한 뒤, 이제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눈을 들어 미래를 바라본다. 이 거룩한 공의회는 신자들이 일치의 참된 진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온갖 경솔함과 무지한 열정을 자제하도록 권고한다. 온전히 또 순수하게 가톨릭적이 아닌 일치 활동은 있을 수 없다. 곧 우리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이어받은 진리에 충실하고, 가톨릭 교회가 언제나 고백하는 신앙에 합치하며, 주님께서 당신 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그 충만함을 지향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이 거룩한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자녀들의 활동이 갈라진 형제들의 활동과 결합되어, 하느님 섭리의 길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고 또 성령의 미래 인도를 가로막지 않고 발전하여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그리스도의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화해시키려는 이 거룩한 목표는 인간의 힘과 재능을 초월한다는 것을 공의회가 잘 알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성령의 능력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둔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에,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로마 5,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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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전

제 3 권      교회의 교도 임무

제 751 조 이단이란 세례 받은 후 천상적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그것에 대해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란 교황에게 대한 순종 또는 그에게 종속하는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2810 (가톨릭대백과사전)

 

이단

세례 받은 사람이 가톨릭의 교의(敎義) 중 일부를 거부하는 행위, 또는 거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 이 말은 특정 이론을 지지하는 행위, 는 지지하는 자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airesi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런 의미로 사용된 예는 바리사이‘파’(사도 15:5), 나자렛 ‘도당’(사도 24:5) 등의 경우이다. 한편 이 말은 이교(離敎)의 뜻으로(1고린 11:19), 육정이 빚어내는 일의 하나로(갈라 5:20), 또는 해로운 교설을 도입하여 주님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2베드 2:1) 사용되었다. 후자의 경우 즉, ‘이단’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교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선례(2베드 2:1)는 교회사를 통하여 존중되어 왔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서 벗어난 이단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이단자는 진리의 적(Ambrosius)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견해를 앞세우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진리에 머무르기 위해서 사도의 교리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Lyons의 Irenaeus), 교회와 일치하여 살아가야 한다(Cyprianus). 초대 교회 때 교회의 신앙적 일치에서 떨어져 나간 이단은 중죄에 이단에 빠진 자는 오랜 기간의 참회과정을 거쳐 안수를 받고 나서 교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단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교회에 입교하려는 자에게는 이단의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참회과정을 생략하고 안수하였다.

 

교회법에 의하면 이단이란 세례 받은 신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다(751조). 즉 이단의 성립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가 세례 받은 신자여야 하고, 둘째 계시진리 즉 교의에 관하여 오류나 의심이 있어야 하며, 셋째 오류나 의심을 지속하자고자 하는 의지가 외부적으로, 언어 기타의 표시로 표현되어야 한다(교회법 1346조). 내면적으로 교의를 부정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신앙을 거스르는 죄가 될 뿐이다(2베드 2:17, 호세 2:12-). 파문의 사면권은 내정(forum internum)에서는 성좌에, 외정에서는 지역 재치권자에게 속한다.

 

이단자의 파문을 규정한 교회법 조문 (1364조)은 가톨릭 신자가 자기 탓으로 가톨릭 신앙과 친교에서 떨어져 나간 경우에 적용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오래전에 갈라진 개신교 공동체에 속하여 있는 신도들에게는 가톨릭 교의를 거부하거나 이에 관하여 지닌 오류나 의심을 지속하려는 완고한 의지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단과 이단자라는 말을 피하고 그 대신 갈라진 비가톨릭 그리스도 교인 혹은 갈라진 형제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공의회 이후에는 이단의 개념이 달라졌다. 일찍이 가톨릭 교회 밖에서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은 자는 이단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한 아우구스티노의 견해가 오늘날 그대로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단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치는 교의를 고의로 거부하여 교회 형벌의 대상이 되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Heribrnt Heinemann, Heresy, in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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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

                     구원에 대하여 : 젤뚜르다 자매님

 

찬미예수님. 자매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하느님 만이 하십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 한분이신 하느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무시부종 無始無終 하신 영원하신 분, 전지 전능하신 분, 공의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인류를 구하시고저 하느님

의 독생 성자 (聖子) 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 그리

스도이시며,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에수

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시고 또 당신 제자 사도들에게 복음 사업을 마끼

시고 귀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타 종교나 타 교회에서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하느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죄에서 해방을

얻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고도 일상생활에서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는 또 다시 하느님

으로 부터 떨어지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또한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또 다신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

을 보장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세례성사는 세례성사를 받기 전 까지 지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고

고해 성사는 셰례성사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구원을 보장 받습니다. 구원

은 우리 가톨릭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는 종교외 다른 종교에는 구원

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결정하시는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창조 하시고 또 구원하셨기 때문

에 하느님은 이들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영혼들입니다. 공자나 석가가 구원 바았느냐 못 받았

느냐 하는 문제는 하느님의 영역이며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

는 이들 한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이들고 구원 받기를 희망하고 또

저들도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제르뚜르자 자매님이 지적하신 타종교나 타교회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신 것은 이 구원 문제를 누군가가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받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

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성실히 받으면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고해성사를 받지 못할 때는 우리는 하느님께 통회

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

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고해 성사를 받지 않고 하느님께 직접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은 물증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승을 떠나 저승

에 갈때 정말 안심이 되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마치 장치와도 같습

니다.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이 죄의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들어왔다면 아마 그 사람은 밖으로 내쫓겨 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죄를 하늘 나라에 드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씼어버리게 하실 것입니다. 고해성사

로 죄를 씼으면 하늘 나라의 컴퓨터에서 삭제해 버리시지 않겠나 생각

합니다. 여하튼,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우리는 왜

주님께서 고해성사를 세우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아시

고 주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되

겠습니다. 그동안 나는 고해 성사를 수 백번 받았습니다. 고해성사가

필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해성사 받고 나서 편안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에 내영혼은 평안함을 느낍니다. 나눈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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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월 11일]

 

게시자 주: 


다음은 지금까지의 대화를 매우 잘 요약한 글입니다. 좋은 요약글을 마련해 주신 대구 대교구 전광진 (엘마노)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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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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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사람들은 자기네 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모두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순신장군도 지옥 가는지 궁금합니다.

더러는 우리 천주교도 이단이라고 하고 천주교신자들도 모두 지옥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더 데레사수녀님도 지옥 가는지 궁금합니다...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큰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모차르트음악을
너무나 좋아하였던 그는 죽기 전에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천주교 신자였기에 반드시 지옥에 갔을 것이고...
모차르트가 없는 천당에 가면 심심해서 어쩌나... 하고요...

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이웃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교파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포용력이 넓은 교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보수적인 교파들은
자기네들과 신앙이 같은 사람들만 사랑하는 폐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과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이 아니라 사탄으로 보고 배척하고 저주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의미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불교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어느 누구라도 최종적 의미에서 적이나 원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대국적인 마음이 필요하다하겠습니다.

1. 성서와 교부시대(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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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는 구원을 위해 반드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결된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있어야 구원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자 오리게네스(253년 또는 254년 사망)와 치쁘리아노(258년 사망)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사상이 개진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누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계속 발전되었는데, 신학자 풀겐시우스(468-533)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음의 사실은 의심 없이 가장 명백하다.
모든 이방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 모든 열교인과 이교인들, 즉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악마와 그 졸도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2. 중세(500-1500)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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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와서 이 사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마침내 플로렌스공의회(1439-1445)는 풀겐시우스의 표현을 빌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나 열교인,
이교인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악마와 그 졸도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오직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만 교회의 성사가 구원이 된다.

누가 아무리 많은 선행과 자선을 하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를 흘렸다 하더라도,
그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 속에 그 품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구원될 수 없다.”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교부시대에 발전되어 중세에 확립된 이 엄격주의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대로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비정한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3. 근대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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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격주의는 역사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첫째,
1400년대 말부터 유럽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와의 만남으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유럽만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생각했던 유럽사람들은
특히 인도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와 종교를 만나면서
동아시아 사람들 모두가 멸망된다는 생각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
1500년대 유럽의 교회분열은 가톨릭교회의 승리주의와 자만심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도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정식을 심사숙고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1883년, 교황 비오9세는 회칙에서
“참된 그리스도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은 희망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불가피한 무지로 참된 그리스도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 부여한 자연적인 법과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943년, 교황 비오12세도 “교회에 명시적으로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과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열망을 통해
구세주의 신비로운 몸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4. 신학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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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1904-1984)와 이브 콩가르(1904-1996)를 비롯한 현대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제2차 바티칸공의회신학자로 활동하면서
바티칸공의회정신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은 이 어려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누가 하느님 보편적 계시의 숨은 부르심을 받아들여 양심에 따라 선의를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신앙과 희망과 사랑 안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내포하고 있는 명시적이지 않은 신앙은
그리스도교회와의 만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몸으로만 교회에 머물러 있고
마음은 교회를 떠나 사는 사람들보다 구원에 훨씬 더 가깝다고 확신하였습니다.

5.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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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플로렌스공의회의 결정을 바꾸고 있습니다.

먼저 선교교령은 간접적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선언 합니다:

“본인의 탓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록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길로 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으시긴 하지만,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과 성스러운 의무를 아울러 갖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선교활동은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그 힘과 완전한 필요성을 갖고 있다.”(교령7항)

교회헌장은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보편적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비자들의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비자들은 교회에 결합되려는 소망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된다.’(헌장14항)

다음으로 정교회나 개신교의 구원가능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은 완전한 신앙, 성사,
로마교황과의 일치라는 세요소를 다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결합되어 있다.’(헌장15항)
다음으로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헌장 16항)
마지막으로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헌장16항)

천주교신자가 아니더라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을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정도''입니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은 ''구원의 예외적인 길''입니다.
구원의 정도인 가톨릭교회의 ''참된 신앙''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대구 대교구 교구청 사목기획실장

전광진 (엘마노)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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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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