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교회음악

가톨릭 성가 329장 이후의 미사곡 여섯은 전례음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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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12 ㅣ No.2206

[성가와 함께 아름다운 미사를] 가톨릭 성가 329장 이후에 나오는 미사곡 여섯은 미사 때 쓰면 안된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1)



문 : 저는 OOO 본당, 경력 25년차 오르간 반주자입니다. 성가 329장 이후에 나오는 슈베르트 미사곡이 있는데, 워낙 선율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좋아해서 미사 때 자주 애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곡은 원래 미사 때 쓰이는 미사곡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들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가하고 여기저기 찾아봤는데도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곡은 미사 때 쓰이지 않는 곡인가요? 그렇다면 왜 가톨릭성가에 마치 미사곡처럼 미사곡 여섯에 들어있는 건가요?


답 : 일단 이 문제는 뭐라고 명확히 답변하기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질문이기도 하고, 성음악 학자들 사이에도 성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로마 성음악 대학에서 마지막 학년 지휘 시험을 보았는데, 이 문제를 묻더군요.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곡이 전례음악(musica liturgica)이냐?” 제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교수들이 “제대로 대답했다.”고 말하면서 한참 서로 이야기하더군요. 그때 모였던 교수는 세 명이었는데, 성음악대학 학장, 작곡 교수인 학과장, 그리고 담당인 지휘 교수였습니다. 전문가들, 특히 전 세계 성음악대학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곡은 전례음악이 아닙니다. 전례음악의 요건은 이렇습니다. 첫째, 작곡자의 의도가 전례를 목적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둘째, 전례의 형식에 맞는 전통과 규범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전례기도문은 생략하거나 마음대로 변형하면 안 됩니다. 또한 전례기도문이라 하더라도, 특히 지나치게 긴 시간동안 연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대중성을 위한다고 세속음악을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슈베르트는 이 미사곡을 미사 때 쓰일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사는 전례기도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노이만이라는 물리학 교수가 쓴 것입니다. 이 가사는 독일어로 된 것인데, 그 당시에는 라틴어 외에는 전례 때에 쓰이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가사는 전례 기도문을 독일어로 신중히 번역한 것이 아니라, 기도문을 하나의 주제로 삼아 작사자가 자유롭게 창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미사곡을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에서는 전례음악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종교음악으로서 공연은 당연히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 미사곡은 독일 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미사 때 쓰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슈베르트 서거 100주기를 맞아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에서도 이 미사곡을 전례에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2015년 4월 12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9면, 정범수 베네딕도 신부(성음악지도)]

 

 

[성가와 함께 아름다운 미사를] 가톨릭 성가 329장 이후에 나오는 미사곡 여섯은 미사 때 쓰면 안된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2)



답 : 가톨릭 성가에 실린 슈베르트의 이 미사곡은 오랫동안 독일 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슈베르트 서거 100주기를 맞아, 결국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에서도 전례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지난 호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이 미사곡이 보급되면서 사랑을 받아왔고, 우리나라에도 가톨릭 성가에 마치 전례 미사곡처럼 수록되어, 미사곡 여섯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당에서 이 미사곡이 실제로 미사 때 쓰이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에서도 허용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그러므로 전례 때 써도 무방한 것인가? 단호히 말하자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전례에 있는 기도문에 대해 잘 교육 받고, 그 깊은 의미를 충분히 알아듣고, 그리고 나서 기도문에 잘 봉사하고 있는 성음악을 통해 미사 전례의 의미를 깊이 알아듣기 시작한다면, 슈베르트의 이 미사곡이 전례에 쓰이기에 매우 부적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례 기도문인 ‘대영광송’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신비와 그에 따른 자비의 청원만 알아들어도, 슈베르트의 ‘영광송’이 그 깊이를 전혀 따라가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슈베르트의 미사곡은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목적 안에서 간혹 전례에 쓰이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식 전례음악으로서의 위치는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간단한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5월은 성모님의 달입니다. 성모님의 달에 꼭 생각이 나는 노래가 있지요. “맑은 하늘 오월은 성모님의 달.” 이 노래는 그 가사나 내용으로 볼 때 전례성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례에 쓰일 수가 없는가? 전례에 쓰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지역, 특정한 시기, 특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허용되어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례에 쓰였다고 해서, 정식으로 전례성가로서의 위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히 전례 안에서 무분별하게 쓰여서도 안 됩니다. 전례 외에 일상의 삶 안에서는 언제나 불리어도 됩니다. 성모님 성가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주 부름으로써 매일의 성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성가를 우리는 종교음악, 그중에서도 대중성가라고 부릅니다.

요컨대 슈베르트의 미사곡은 종교음악으로서의 가치, 대중성가로서의 가치는 지니지만, 전례음악으로서의 위치는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경우에 전례 안에서 허용될 수는 있지만, 전례미사곡으로서의 위치를 지니고 지속적으로 쓰일 수는 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2015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9면, 정범수 베네딕도 신부(성음악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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