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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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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5-04-04 ㅣ No.42


[중앙일보]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려 있는 가운데 84세로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2세 성하(聖下)를 두고 사람들은 '평화와 인권의 상징' 또는 '평화와 화해의 사도'라고 입을 모아 칭송의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더없이 큰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는 그 칭송에는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목자 한 분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마음들이 담겨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교황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셨고, 전 세계 모든 이를 사랑으로 안았던 '품이 넓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막연한 회고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27년 재위 기간에 교황님 당신의 신학과 지칠 줄 몰랐던 활동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교황님. 그런 교황님은 한국 천주교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그 인연의 배경에는 한국 천주교가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분단 국가의 고된 시련을 넘어서기를 기대하는 당신의 관심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어려웠던 폴란드 현대사를 몸으로 부딪쳐 왔던 교황님 당신의 특별한 개인사적 체험도 녹아 들어 있습니다.

 

저는 교황님과 관련해 크고 작은 일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황으로 막 선출된 직후의 일입니다. 마침 교황과 격의없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교황님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해 주십시오"라고 대뜸 요청드렸습니다. 설마 그런 요청을 기억하고 계실까 싶었던 것이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1984년 5월 서울 여의도에서 시성식을 거행할 때 교황님께서는 뜻밖에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추기경, 당신과 한국 천주교가 나를 초대해 준 첫째 사람이자 국가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교황님의 한국과 한국 천주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8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셨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을 가슴 아파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셨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황님, 당신께서는 두 차례의 한국 방문 당시 거의 모든 활동과 의식에서 당신께서 직접 배웠던 한국어를 사용하려 했던 것도 그런 애정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81년 5월 12일 베드로 광장에서 한 이슬람교도 청년의 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병상 메시지를 통해 "나를 저격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화해는 평화를 건설하는 진리의 첫걸음입니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황님이 말씀하신 그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가슴에 깊숙이 새기려 합니다.


이제 교황님은 우리를 떠나 하느님 품으로 영원히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치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교황님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빌면서 당신께서 남기신 역사의 흔적들을 충분히 살필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분단의 땅에 사는 저희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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