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민족들의 복음화 (전교 주일)]제자 삼으라.(마태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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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0-21 ㅣ No.130

 

 

 [민족들의 복음화 (전교 주일)]제자 삼으라.(마태 28,16-20)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이사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 로마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다.(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배론성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제1독서(이사야2,1-5)-배론 성지순례 소감을 곁들여서

zucchero123 


제1이사야(1-39장)에서 첫째 예언(2-12장)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징벌하시기 위해  이민족들을 끌어 들이신다. 그러나 징벌의 도구로 선정한 민족들이 이 사실을 잊고 만용을 부리자 하느님께서는 이민족들도 응징하신다.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에는 소수의 남은 자들이 하느님께 충성을 보일텐데, 이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이 모든 위대한 일, 곧 이스라엘의 징벌과 이민족들의 심판과 남은 자들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메시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이어진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2,3ㄴ-5)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전교 주일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ㄴ-20)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을 받들어 모든 민족들이 복음화되도록 기도하고, 선교와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날이다. 복음 선포와 선교는 교회의 첫째 사명이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해야 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

 

미국의 단독 주택은 개인의 사생활이 간섭과 침범을 받지 않고 보호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의 아파트 문화는 공간적으로는 닭장처럼 이웃과 가까워지게 했다. 그러나 둘다, 마음의 통교에 있어서는, 외롭게 하나 하나 떨어진 집채 만큼, 그리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만큼 단절되고 요원한 것 같다. 단단한 잠금 장치, 자신만이 아는 비밀번호, 도처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만이 자신만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남들도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손안에 다 있나이다."

전철을 타 보라. 이 시대의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라. 살아가는 군상을 보라. 스마트 폰에 올인해서 살아가는 노예의 삶속에서,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 폰 하나면, 가히 지상 생활은 전능에 가깝다.  

 

그러니 바로 옆 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일부러 친교를 나눌 필요가 없다. 이런 저런 관계에 얽히기 보다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과 관심사에 따른 최소한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편하다. 나도 너도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자.

집에 들어가면, 이성이 없는 애완 동물이 짖으며 꼬리를 쳐주고, 반갑게 맞이해 준다. 벽에 걸린 텔레비젼 안에서 자신의 취향에 따른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웃고 울고 한다. 아니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사이버 가상 공간을 떠돌며 자신의 실존의 부족함을 채우고,고독과 외로움을 달랜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접촉"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를 통한 "접속"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사람들의 내면과 영혼은 기계처럼, 기계 부품처럼 무감각해지고, 인간성은 상실되며 점점 비인간화되어 간다. 이렇게 살갑게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이웃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잘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피앗사랑> 카페는,이러한 시대에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한

새로운 사목적 패러다임일 수 있다. 옛날보다는 문명의 이기 때문에 훨씬 편리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으나, 상실되고 비인간화되는 인간성 회복을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

 

현세적인 그 모든 것이 주어져도, 인간 실존이 겪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실존적 공허감, 목적 상실감, 삶의 무의미, 뚫어진 공동은 우리 인간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신 주님만으로, 하느님만으로, 말씀과 성체, 성령만으로 채워져야만 해결이 나도록,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가, 어디서 채워 주는가? 대형 교회, 익명화되며 군중속에 고독을 느끼는 교우, 채워지지 않는 영적 요구, 딱딱하고 형식화된 전례~~~

뭔가 속 시원히 명쾌한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삶의 방향을 잡고, 말씀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구원의 길을 걷고 싶은데~~

한번 밖에 없는 생, 제대로 살고 싶은데~~

이 공기처럼 숨처럼 살아계시는 하느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고, 찬양하고 실컷 기도하고 싶은데~~     

우리는 이런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주님 계시는 본향(천국)으로의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 우리는 함께, 조선의 최초의 성 요셉 신학교가 있던 곳, 황사영(알렉시오)가  민족 복음화의 열정 때문에 백서를 토굴에서 쓴 곳, 사제가 되셔 귀국한 후, 12년동안(1850.1-1861.6)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지를 돌면서 4,000명의 신자들과 100여개의 공소를 맡아 사목하시고, 수많은 교리서와 기도문을 만드시고,  시복시성을 위한 순교자들의 자료를 준비하신, '땀의 순교자' 최양업(토마)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박해를 피해 만들어진 교우촌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4-50명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왔지만, 너무나 공기 좋고, 아름다운 산과 물과 단풍이 있는 곳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너무나 잘 가꾸어진 곳에서 이제는 조용히 혼자 묵상하면서 순례를 하고 싶다.

 

그런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소금창고>의 막달레나(아이디:대모)자매님,후안 디에고(아이디:눈덮인 산의 장미)형제님이 귀한 분들을 모시고 왔다.

<소금창고:카페의 (소개합니다)코너 참고>를 도와 주고 있는 목우(牧牛)스님과

개신교 집사와 권사인 가수 차도균(히트곡:해변으로 가요)씨 부부를 모시고 왔다.

함께 미사하고 강론듣고 찬양하고 안수도 받았다.

 

이 자체가 기적이 아니가?  이것이 성지 순례의 은혜인 것 같다. 우리 모두 하느님안에 하나였다. 미사 참례도 놀랍지만,스님은 나의 안수를 받으셨고, 레스팅이 되셨다.  

함께 대성전 앞에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목우 스님은 "나, 이제 천당갈 수 있겠어요."하시며 나에게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 개신교 자매가 하는 식당에서,스님은 "내 영혼 은총 입어" 복음 성가를, 우리도 모르는 3절까지 다 부르셨다. 

우리 차도균 가수도 "해변으로 가요" 노래를 "성전으로 가요"로 개사한 노래를 부르고 인사하였다.

 

우연인지 몰라도 어제 복음이 포도밭안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 비유였는데, 맛있는 곤드레 나물 비빔밥을 먹은 식당 천정에는 포도 송이가 주렁 주렁 달려 있었다.

저 멀리 로스안젤레스에서 온 한 레오 형제님부터 멀리 대구에서 어린 아이들 까지 데려 온 마티아 부부에 이르기 까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잘 가꾸어진 무화과나무들이었다.

 

나는 어제 배론 성지에서 짧은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 전교주일의 이사야 말씀을 미리 보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께서 피로서 구속하신,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이구나.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서, 인종과 피부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구나. 우리 모두, 한 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구나.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구나. 이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셨구나.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스님이 안수받고 레스팅이 되시고, 복음 성가를 부르신 사실이 전 세계에 전파되면, 분명히 종단에서 짤릴 것이다. 그러면 <소금창고>에서 일하시게 될 것이고, 훌륭한 선교사가 되어 말년을 거룩하게 잘 보내실 것 같다.

오늘 전교주일, 민족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날, 새삼 전교와 하느님안의 일치를  사랑이신 성령 하느님안에서 생각해 본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저의 대부님은 안성기 사도 요한입니다. 대한민국의‘국민배우 안성기’ 바로 그분입니다.

이분은 대부님이기 이전에 제가 존경하는 ‘형님’이자, 저의 ‘큰 바위 얼굴’입니다.

한마디 말씀도 없이 저를 천주교로 이끌어 준 분입니다. 영화 담당 기자와 영화평론가로서 지켜본 20여 년 동안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해, 저로 하여금 ‘언젠가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를 믿자’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서울형데이케어센터(왕십리)의 수녀님과 직원들을 보고 신자가 되자고 마음먹었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천주교 신자였고,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저의 대부가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저는 ‘전교’하면 신부님의 파견 말씀이 우선 떠오릅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이 말씀에 저는 예외 없이, 이내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미온적입니다.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교에 앞서 저 자신의 신심부터 돈독히 쌓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열의를 다지는 일환으로 ‘성경’과 ‘주님의 기도’ 등 기도문, ‘준주성범’ 등 신심서적 쓰기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전교’하면 저의 대부님도 떠오릅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에페 5,30)라는 말씀의 실체를 대부님을 통해 목격했고, 제가 스스로 대부님을 따랐듯이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게 진정한 전교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대부님은 가톨릭 신자로서 저의 으뜸 자랑입니다. 다른 분들도 제가 대부님 성함을 말씀드리면 저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그런 만큼 저는 대부님처럼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고, 대자답게 달라져야 한다고, 대자다워야 한다는 점을 늘 상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잘못하면대부님께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대부님처럼’을 반추해 봅니다. 신앙인으로서 대부님의 한결같음을 빼닮은 대자가 되고, 저도 그런 대부가 되자고 재삼 되새겨 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배장수 베네딕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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