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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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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youngttong] 쪽지 캡슐

2009-02-17 ㅣ No.476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정 호 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 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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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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