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유승원님 잘 보세요 이런 걸 글이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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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진 [tianshi] 쪽지 캡슐

2009-06-29 ㅣ No.9752

어느 '반공소년' 의 최후!
(서프라이즈 / 내과의사 / 2009-06-25)


학창시절, 나는 잘나가는 ‘열혈 반공소년’이었다.

해마다 한국전쟁 발발 기념일이 되면 학교에서는 반공을 주제로 한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표어 만들기, 웅변대회 등을 개최하곤 했었다. 웅변은 배워본 적이 없어서 나가질 않았지만 나머지 종목들은 나에게 종종 ‘수상의 기쁨’을 맛보게 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극단의 적개심만 표현하면 되었으니까. (쥐새끼 까는 나의 곱지 못한 글의 뿌리가 그 당시 반공 글짓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주말 오후, 골든타임이 되기 직전에 ‘ 배달의 기수’라는 국군 홍보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다. 나는 배달의 기수도 즐겨 보았었다. 그리고 나시찬 주연의 ‘전우’와 김희라 주연의 ‘3840 유격대’도 나를 브라운관 앞에 찰싹 붙여 놓은 TV 드라마들이었다.

이들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국군용사가 기관단총 한 번 휘두르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던 인민군.... 답은 ‘국군에 의한 인민군 대량 학살극’이다.

나는 행복한 ‘반공소년’이었나 보다. 인민군은 정말로 ‘나쁜 놈’들이었고, 북한은 말그대로 ‘악의 무리’였다. 선과 악이,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내 의식 속에서 그 때 만큼이나 분명했던 적은 다시 없었을 거다.

공직에 몸담고 계셨지만 마음만은 ‘철저한 민주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신과 5공 시절 내내 나는 반정부적 정치의식으로 사춘기를 보냈건만, 70~80년대를 관통한 냉전논리 자체를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기엔 나는 너무도 미숙한 소년이었다.

그 시절 나의 정서를 요약하자면 “박정희와 전두환은 사악한 독재자이다. 하지만 북한이 쳐들어온다면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겠다.” 가 될 것이다. 비록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을 위한 총알받이 신세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외부세력이 무력침공을 가해온다면, 지킴이가 되어 싸우는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행해야 할 ‘절대성의 원칙’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나에겐 ‘동원 지정 통지서’가 온다. 무의촌 근무로 병역을 대신한 나에게는 너무도 어색한 서류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중위인지라 장교라는 이유로 나는 여전히 동원 예비군 신분이다.(내년이면 끝난다.)

쥐새끼 등장 이후 시절이 하 수상하니 불현듯 쌩뚱 맞은 생각을 한다. 만의 하나라도 다시 전쟁이 발생한다면? 나는 정말 참전하여 “종군”할 수 있을까?

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쥐새끼 삽질에 쓰일 줄 뻔히 알면서도 내가 세금 내는 일을 거부하지 못하듯, 동원소집령이 떨어지면 나는 옷장에서 낡은 군복을 찾아 입고 주저없이 집결지로 향할 것이다. 우습게도 내가 가는 곳은 전쟁터가 아닌 야전병원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군인이 되어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정치가와 군전략가의 소모품이 되는 거다.

내 고민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지금도 나에게 “행복했던 반공소년”의 순수한 열정이 남아 있느냐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마저 아깝지 않은 지킴이가 될 의지가 나에게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거다.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든지 나의 터전을 짓밟고 처들어오는 놈은 악의 무리가 맞다. 선과 악의 구분,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침략자를 대상으로 할 때보다 더 분명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나는 고민한다. 다른 날도 아닌 한국전쟁 발발 59년이 되는 오늘에 말이다. 말 돌리지 않겠다. 내 고민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오늘날 쥐새끼의 정권 아래에서 대책없이 살아가야 하는 역겨운 나의 운명 때문에 나는 번민한다. 쥐새끼의 추악한 권력에 대한 기계적 복종이 아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권자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국가에 대한 헌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행복했던 반공소년”의 열정이 단 한줌이라도 나에게 남아 있는가를 말이다.

‘복종’과 ‘헌신’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믿는다. 적어도 쥐새끼를 쥐새끼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복종과 헌신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쉽게 이야기 하자. 땡볕도 마다하지 않고, 차가운 밤바람도 싫다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대한문 앞에 줄을 서서 절 한 번 올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 헌신’이다. 이미 더럽혀진 긍지의 표식에 불과한 제복의 그늘 뒤에 숨어서 쥐떼마냥, 떼도둑마냥 몰려다니며 나라의 큰 어른 빈소를 능멸하는 종자들의 작태는 사고 능력을 상실한 영장류의 ‘복종’에 불과하다.

권력은 잠시나마 사람을 복종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헌신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복종은 권력의 수준을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다. 쥐새끼의 권력은 모두를 쥐새끼로 만들 뿐이다. 내가 쥐새끼의 권력에 복종하는 순간, 나도 쥐가 된다. 쥐가 한 마리이든, 4천만 마리이든, 한 인간의 사고와 양심을 넘어서지 못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불행의 나락으로 빠져든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패했는가. 그것은 복종의 무력과 헌신의 무력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싸운 독립전쟁 때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자신들의 군대가 당대 최신, 최고의 무력이던 영국군을 격파한 이유를 망각했다. 권력은 어느 나라든지 군인을 전장에 보내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꽃다운 병사들 죽음의 이유가 기계적 복종이냐, 숭고한 헌신이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쓰여질 수밖에 없다.

쥐새끼는 오늘도 복종을 강요한다. 사람들의 양심과 사고를 철저히 쥐어짜 백치상태의 공백으로 만들려 한다. 서러운 오늘이다. 그러나 이건 우리들이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업보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10년. 선한 권력은, 선량한 권력자들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헌신을 갈구했었건만, 그것을 모르쇠 한 존재 또한 우리들 아니었던가.

한국 전쟁 발발 59주년 기념일이다. 희미하긴 하여도 전쟁의 위협은 한반도에 상존한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고 또 반문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시민이라 자부하는 나의 헌신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공동체인가.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유린하는 침략자에게 "나의 조국을 너희들의 더러운 군화발에 내줄 수 없다!!“고 절규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상식과 가치가 쥐새끼가 권력을 희롱하는 오늘날.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 남아 있는가.

한국 전쟁 발발 59년. 그 옛날 행복했던 ‘반공 소년’은 최후를 맞이했다. 다름 아닌 쥐새끼가 죽여버린 거다. 헌신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군림의 권리만을 향유하며, 인간에게 설치류의 복종만을 강제하는 쥐새끼가 내 안에 숨 쉬고 있던 순진무구한 ‘반공 소년’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이 땅의 “지존 빨갱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쥐새끼가 맞다. 헌신하는 시민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노예만을 좋아하는 쥐새끼가 빨갱이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빨갱이란 말인가.

 

(cL) 내과의사

* 이 글은 저작권이 절대로 없어요....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67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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