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원주교구 풍수원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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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5-31 ㅣ No.970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상)

첩첩산중에 자리잡은 '그림같은 성당'

 

 

(사진설명)

1.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에 있는 풍수원 성당 전경.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러브레터'의 배경으로 나온 곳이기도 하다.

2. 순례객들이 풍수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당은 6개씩 좌우로 늘어선 기둥과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조화를 이룬 전형적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먼저 입구에 하늘 높이 솟은 뾰족탑을 가진 고색창연한 고딕식 건물이어야겠다. 그리고 구석구석엔 오랜 역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배어 있어야 하겠고, 아늑함을 맛보기 위해선 크기는 적당히 작은 것이 좋겠다. 게다가 시끄러운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 언덕에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함께 서 있다면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같은 성당이 아닐까.

 

그림같이 아름다워 영화 촬영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당,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러브레터'의 배경으로 나와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그 성당이 바로 강원도 횡성 첩첩산중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풍수원 성당(주임 김승오 신부)이다.

 

6일 풍수원성당 앞마당에서 만난 백여남(가타리나, 39, 수원교구 수지본당)씨는 이 성당을 처음 찾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참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길은 또 얼마나 운치 있는지요. 의자 없는 성전 바닥도 시멘트가 아니고 나무라서 그런지, 차가워도 느낌은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합니다. 나중에 꼭 다시 오고 싶어요."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자 국내 일곱번째 고딕·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인 풍수원 성당이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인 1907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두메 산골에 세워지게 된 데에는 박해와 얽힌 간단치 않은 배경이 숨어 있다. 풍수원 성당 역사를 알아보기에 앞서 풍수원 성당의 아름다운 풍경부터 감상해보자.

 

서울에서 성당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고개를 넘으면 왼쪽 저 멀리에 족히 수백년은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에 살짝 가려진 성당이 수수한 자태로 다가온다. 왼편으로 뚫린 길을 따라 '유적지 풍수원성당'이라고 새겨놓은 표지석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늘을 가릴듯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사이좋게 마주한 고풍스런 성당이 말없이 객을 맞는다.

 

크고 으리으리하게 잘 지은 대도시 성당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참으로 아담하고 소박한 성당이 아닐 수 없다. 건물 전체 면적은 120평. '어떻게 생긴 성당일까' 궁금한 사람은 명동 성당을 떠올리면 된다. 물론 명동성당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지만, 겉모습은 19세기말 가장 일반적 성당 건축형태였던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명동 성당을 빼다박은 꼴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6개씩 좌우로 늘어선 기둥과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조화를 이루고, 반원형의 제대 뒷부분에는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성당은 아직 의자 없이 그냥 마루바닥이다. 그래서 더 정감있다.

 

성당 왼쪽으로는 성당만큼이나 고풍스런 2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유물전시관이다. 1912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지난 97년에 대대적으로 수리한 다음 유물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본당 차원에서 전시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320여점의 유물들 또한 흘깃 보고 지나칠 것들이 아니다.

 

100여년 전 이 성당을 지은 정규하 신부가 쓰던 책상을 비롯해 19세기말 당시 사용하던 촛대, 십자가, 성합, 기도서, 사진 등 유물 하나하나는 앞서간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톨릭 교회사에 관심있는 이라면, 유리 전시관에 진열된 성물 하나하나에서 신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이라면 둘러보는 데 최소한 한나절 시간은 배정해야 할 것이다.

 

풍수원 성당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자연 풍광을 빼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사색하고 싶은 사람은 성당 왼편 언덕으로 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 보자. 푸른 숲을 지나 더없이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걷는 그 길은 일상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다.

 

십자가의 길 끝에 펼쳐지는 묵주동산. 대형 십자고상과 마리아상을 빙 둘러 축구공 크기만한 묵주알을 땅에 박아 만든 동산은 단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너른 공간이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선조들을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쳐도 좋고, 같이 간 길동무랑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아마 세상을 잊을 것이다.

 

풍수원 성당 가는 길

서울에서 팔당, 양수리를 지나 양평에서 홍천 방면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용두 삼거리에서 오른쪽 횡성 방향으로 나가 6번 국도를 탄다. 10㎞쯤 가면 고개가 나오고 고개를 내려서면 왼쪽으로 성당이 보인다. 한강을 끼고 팔당과 양수리를 지나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적격이다.

문의 : 033-342-0035

 

<평화신문, 제724호(2003년 5월 18일), 남정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하)

200년 전 세워진 한국교회 첫 교우촌

 

 

(사진설명)

1. 멀리서 바라본 풍수원 성당 전경. 앞에 보이는 마을은 주민 100%가 가톨릭 신자인 교우촌이다.

2. 1986년부터 1943년 선종할 때까지 무려 47년간 주임으로 사목했던 정규하 신부(가운데).

3. 풍수원 성당 유물전시관에 진열된 십자가. 박해시대 흙으로 빚은 것이다.

4. 풍수원 성당이 1888년에 설립된 유서깊은 사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

 

 

90년대 베스트 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화두로 던졌다. 그냥 봐서는 그저그런 유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볼 수 있다는 뜻인데, 풍수원성당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자그만하고 예쁜 성당에 불과한 풍수원성당이 이 땅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이듬해에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짜기에 설립된 데는 이 지역이 모진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켜낸 교우촌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이곳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0년대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무렵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 지역에 살던 40여명의 신자들이 8일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메다 깊은 산골 풍수원에 정착한 것. 화전과 옹기구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80여년간 성직자 없이 신앙을 간직해오던 신자들은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에 강원도 최초의 본당을 설정하고 르메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파견함에 따라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된다.

 

1907년 지금의 성당을 완공한 2대 주임 정규하(1863-1943년) 신부는 초기 풍수원성당 역사와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정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 사제품을 받은 그 해 풍수원 본당에 부임해서 선종할 때까지 무려 47년을 오로지 이곳에서만 사목했던 그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본당에서만 무려 50년 가까이 사목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본당이나 사제 수 모두 얼마 안되던 교회 초창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수원 성당 공사는 전적으로 교우들의 땀과 정성으로 이뤄졌다. 벽돌 쌓는 방법을 몰랐던 탓에 서울 명동 성당 건립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을 불러온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 신자들이 산에 올라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성당 아래 200m 떨어진 가마에서 벽돌을 굽는 등 대부분의 일이 신자들 몫이었다. 여자 신자들도 줄줄이 서서 벽돌을 날랐다.

 

성당 건립 기금은 당시 돈으로 6천원. 강원도 일대 지주와 가난한 신자들이 크고 작은 돈을 내놓았는데, 거금 1500원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올라와 "내 돈 내놓으라"고 주정을 했다. 그러면 정 신부는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꾸짖었고, 할아버지는 그 때마다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빌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또 돈타령을 했고, 다음날 어김없이 정 신부에게 꾸중을 들었다. 땀흘려 일하던 신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성당을 찾게 되면 한적하기만 한 앞마당에서 100여년 전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한번쯤 떠올려보는 것도 색다른 맛일 게다.

 

정 신부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강원도 전교사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정 신부 사목 당시 주변 12개 군을 관할하며, 신자 수 2000여명에 달하는 전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풍수원 성당은 이후 춘천, 원주교구의 모태가 된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성당은 요즘 대대적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성당 일대를 세계적 성지순례 코스로 조성하는 바이블 파크(유현문화관광지) 조성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원주교구가 지난해부터 횡성군과 함께 추진 중인 이 사업은 95억여원을 들여 2005년까지 대지 78만평에 6만8천평의 바이블 파크 동산을 조성하는 것으로, 동산에는 수목원과 피정의 집, 미술관, 정규하 신부 동상, 천국동산, 가마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원주교구가 분담해야할 비용이 33억원에 이른다는 점. 지난 4월 바이블파크 조성을 위한 '성역화사업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풍수원 본당은 묵주기도 100만단 바치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뜻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후원금(1구좌 100만원)를 모금하는 등 기금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33억원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16대 주임 김승오 신부는 "한국교회사에서 풍수원 성당이 차지하는 비중도 비중이지만 이곳처럼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성지도 드물다"면서 바이블 파크 사업에 모든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했다.

 

"깊은 산골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유산을 간직한 풍수원 성당입니다. 와서 보면 알겠지만 지친 심신을 추스리고 나태해진 신앙을 반성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순례지가 바로 여깁니다. 한국교회 귀중한 유산인 풍수원 성당이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바이블 파크 사업에 관심과 협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문의: 033-342-0035

후원계좌: 농협 305053-51-024738  예금주: 원주교구

 

<평화신문, 제725호(2003년 5월 25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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