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5주일(가해) 마태 20,1-16; ’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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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9-15 ㅣ No.5520

연중 제25주일(가해) 마태 20,1-16; ’23/09/24

 

 

 

  

 

 

 

가끔 태중 신자들이 새로 세례 받은 신자들을 보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느라 부모님이 하도 엄해서 하고 싶은 것도 다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를 다 사해준다고 하니,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다음에, 나중에 죽기 전에 세례받아도 되겠네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뭐 하러 일찍 세례 받고 신앙 생활을 합니까? 일찍 세례를 받고 올곧게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한 이들은 조금 억울해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결론을 말하자면,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를 지금까지 만끽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천국에 가서 주님을 온전히 뵙게 될 때에 그 만큼 더 기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15.21.27) 누군가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남들이 하는 것 다 못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주님을 겉으로뿐만 아니라 속으로까지 믿고 또 그 믿는 대로 사는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그 평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확인해 주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

 

교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과 관련하여,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마태 20,1-5)

 

그뿐 아니라 주인은 오후 세시와 다섯 시쯤에 나가서, 똑 같은 조건으로 일꾼들을 뽑아 자신의 포도원으로 일하러 보냅니다. 그리고는 일을 마칠 때 포도원 관리인에게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8) 하고는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이들부터 이른 아침에 맨 먼저 와 일하는 이들에게 모두 다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은, 일찍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이들과 늦게 온 이들에게 똑같이 품삯을 나누어 주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항의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13-14)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처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온 신자들과 뒤늦게 신자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똑 같은 기쁨과 평화를 선사해 주십니까? 먼저 시작하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 큰 기쁨과 평화를 선사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의 시간이 우리의 일생이라면, 그리고 우리 인생의 품삯이 액수의 정도가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영원한 새생명이라면 어떻게 달라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새로운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각자가 처해있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각자의 여건과 처지에 맞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들처럼.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0,6-7)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허락하는 권한이 주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

 

베드로 사도는 주님 구원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화는 그 기간과 질에 있어서 각자에게 다른 것이지,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 만큼 더 오래 그가 시작할 그 때부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으며, 또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마칠 때 주님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더욱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2베드 3,15.18)

 

단지,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미지근하게 한다거나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20,16)

 

한 가지 더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얻는 것이지, 누가 그 기쁨을 함께 누린다고 해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가 줄어들거나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기쁨과 평화는 함께 할 때 더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이 세례자이냐 비신자냐?’ 또는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선택이며 주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누구와도 비교됨 없이 각자가 주님 앞에 서서, 따로 따로 그가 처한 생의 여건과 처지와 상황에 맞춰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중단 없이 나아갑시다. 이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형제들과 함께 악마가 유혹하는 매 순간의 서로 다른 의견차이를 불목과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주님 사랑의 섭리와 안배를 청하면서.

 

아울러 이 시간에도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아무도 우리를 성당으로 가자고 하거나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이들이 없도록, 주 예수님을 전하고, 주님 대전에 모셔오도록 노력합시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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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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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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