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죄인 세리(稅吏) 마태오를 위한 변설(辨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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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9-23 ㅣ No.475

- 복음 말씀 -

(마태오복음 9. 9-13)

 

“죄인 세리(稅吏) 마태오를 위한 변설(辨說)”


사랑하는 동료 세리 여러분, 그리고 저의 식사 초대에 응하여 저의 집을 찾아주신 많은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 마태오는 오늘 제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음식을 함께 나누며 너무나 큰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감히 여러분 앞에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정말 제 생애에 이렇게 가슴 벅찬 감격은 처음입니다.

 

제가 죄인으로 단죄 받는 일은 너무나 익숙한 일인지라 기꺼이 수용할 수 있지만 오늘 예수님까지 죄인으로 몰아가는 저 바리사이의 궤변(詭辯)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떨치고 일어선 것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동포의 고혈(膏血)을 빠는 세리이기에 더 큰 죄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항상 죄인이었습니다. 솔직히 배가 고팠고 안락한 삶이 부러워 세리가 되었지만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었던 죄인이었습니다. 원수 로마에 빌붙어 동포를 등쳐먹는 민족 반역자라는 낙인(烙印)과 송곳으로 찔러대는 듯한 불편한 양심을 안고 살아가는 일에 비하면 나아진 살림살이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된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또한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선뜻 세관 일을 그만두지도 못했으며 그러기에는 재화(財貨)가 주는 안락함에 이미 길들어 힘 있는 결단도 줄곧 미루어왔으니 어느 모로 보나 저는 희망 없이 주저앉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놓은 죄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게 하느님을 향한 열망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은 더욱 그리운 분이요 제 소망의 정점(頂點)에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이율배반(二律背反)인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어찌합니까? 그분에게서 멀어질수록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분이 하느님이신 것을 말입니다. 도저히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또 그런 자유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진심입니다.

 

온전히 손을 털지 않는 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이런 와중에서 때로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보고자 미미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도 했습니다. 가능한 한 세금을 낮게 책정하여 로마 관리의 질책과 위협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되는 대로 제 주머니를 털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행위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지만 우리 종교지도자들과 심지어 제 도움을 받았던 형제까지 저를 한결같이 죄인으로만 취급하였습니다. 선행을 했기 때문에 제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행위만큼이나마 보이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아주기를 바랐고 더 욕심을 낸다면 가벼운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것인데, 돌아온 것은 예나 제나 절망 같은 죄인의 굴레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선배 세리들 중 몇몇 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힘든 결심을 하고 세리직을 그만 둔 경우도 여러 차례 보았지만 한번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우리의 변화를 위한 몸부림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포기하는 것도 연약한 의지의 우리에게 태산같이 어려운 일인데 더하여 그렇게 하더라도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더 큰 절망감 외에는 어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끝없는 집단가학(集團加虐)의 대상이요 동시에 죄인이기를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계속 죄인이기를 강요하였습니다. 저는 감히 묻습니다. 하느님이 과연 그런 분이십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그 뜻을 사람들이 뒤트는 것입니까?

 

저는 세리입니다. 현상적으로 저는 민족반역자요, 부정한 이익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천하에 못된 죄인입니다. 참혹한 심정으로 저는 제 죄를 자복(自服)합니다. 로마의 권력에 기대어 줄창 형제들의 등을 치며 살았으니 그 원망과 분노가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소연 하건데 이 죄인에게도 길을 열어주십시오.

 

또한 세리라는 직업 자체와 세리가 짓는 죄악은 부디 구별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리 노릇을 할 수 있는 길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못할 말로 제가 명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는 선한 뜻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이 된다 하더라도 어느 누군가는 계속 세관의 일을 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일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세리나 창녀라면 무조건 한 통속의 죄인으로 단죄해 버리고 벗어날 길도 헤어날 수도 없게 하니 그렇다면 제 안의 이 선의지(善意志는)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까? 우리 민족이 오롯하게 의지하는 하느님의 대자대비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래저래 영혼의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온 죄인 세리입니다. 그저 세리였을 뿐 아무도 저를 마태오로서 알아보지 않았고 이 마태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나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는 사람인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죄인 세리로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 절벽 같은 외로움을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영혼도 없는 사람인양 빈껍데기로 취급 받았던 것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이미 절망적인 죽음의 바다 위를 부유(浮游)하는 쓰레기 같은 저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마태오라고 부르셨고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동정이었고 인격적인 대접이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마음껏 소리 내어 울어 볼 수도 없었을 만큼 주눅이 들어 피폐한 삶을 살아왔던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늘 숨죽이고 있었던 제 의지에 불을 질러 주셨습니다. 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과 또 남모르게 흘린 눈물의 의미와 때로 순수한 마음으로 행한 선행을 좋게 보아주기를 소망했던 제 속내를 제가 꺼내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그 온화한 눈빛으로 모두 인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천지를 여는 창조의 말씀이었고 제 안에 새로운 뼈대를 세우고 다시 향기로운 살로 메우는 은혜로운 성총(聖寵)이었습니다.

 

 

앞으로 온전히 결백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제 결심만은 확고합니다. 소소한 이익에도 마음이 흔들렸던 제가 제 가족과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용기와 뱃심이 생겼습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희망찬 변화가 제 안에서 거역할 수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로 마구 저를 휘젓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고 제가 죄인이기에 그 아버지께서 저를 더욱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더욱 애타게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천지를 개벽(開闢)하는 천둥소리처럼 제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었습니다. 외람(猥濫)되게도 저는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그런 분이셔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주님께서는 제 생각이 옳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감격으로 밤을 새워 울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끝없는 자비가 대저 이러한 것이니 어찌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이제 제가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저에게 꿈틀대는 변화의 기운이 저절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영혼에 해방과 자유의 날개가 돋으면서 불가능한 일로만 치부(置簿)했던 일들이 너무나 태연하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저는 세리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지만 전혀 아쉽지도 않으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언가에 짓눌리고 핍박을 받아 그만 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부담을 느낄만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은근한 강요 같은 것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세관쟁이 일을 그만 두었으니 죄인 무리 속에서 제외시켜달라고 할 마음도 없고 또 그걸 바라면서 세관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예전 같았다면 어찌 그런 마음과 기대를 품지 않고서 결심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무엇이 이처럼 저를 마구 흔들어 다시 재편(再編)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그 질책과 단죄에 동의하면서도 또한 내심으로 항변의 논리와 반발심을 감춰왔던 제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서는 이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미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저에게 이상한 마법을 걸어 사리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일까요? 정말 이게 정신 나간 짓이라면 저는 그냥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이라고 담보해 주셨으니 저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행복을 지속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굴레와 핍박도 감내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가 닥친다면 기꺼이 제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 죄인이라고 말씀드리자 주님께서는 이미 죄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불치의 중병을 앓는 죄인이라고 거듭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바로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오신 의사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영혼이 망가진 채로 오래 방치되어 이미 그 영혼이 없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주님께서는 아픈 데를 제대로 알고 있으니 벌써 치유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갈등과 번민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밟혀 문질러진 자존감(自尊感)이 어느새 살아났고 지난 시간들도 더 이상 제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 감히 이렇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또한 당당합니다. 세리로서의 과거를 부끄러워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저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로 거듭난 예수님의 형제 마태오라는 사람입니다.” / 류종구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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