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 (마르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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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7-08 ㅣ No.113

 

 

 [연중 제14주일] 예언자 (마르 6,1-6)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그를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다고 한다. (에제 2,2-5)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힘이 그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그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한다. (2코린12,7ㄴ-10)
형제 여러분, 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연중 제14주일 복음(마르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4)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했던 격언으로 보이는 말씀으로서 그들이 당신을 배척한 이유를 밝히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친숙한 사람에게서 특별한 것이 발견되면 잘 수용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통해 당시 나자렛 사람들의 닫혀진 마음을 질타하셨다.

여기서 '예언자'로 번역된 '프로페테스'(prophetes; a prophet)'앞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pro)'보여 주다',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로서 '앞에서 말하는 자', '미리 말하는 자'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문으로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예언'이라고 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 '예언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언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미래의 일을 미리 앞당겨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자신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들추어내고 비판하는 등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부정 접두어 '아'(a)'위엄', '존경'을 뜻하는 '티메'(time)의 합성어로서 '덜 귀하게 여기는'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비천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표현은 단지 존경받지 못하는 소극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로부터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취급받음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 6장 4절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친숙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지 않으신다.

마르코 복음 6장 5절은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일어날 수 없음을 계시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6절의 '믿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안'(apistian; unbelif; lack of faith)의 원형 '아피스티아'(apistia)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믿을 만한', '신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피스토스'(pistos)의 합성어로서 '불신앙', '불충실', '불성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믿지 않는 것'의 의미는 단지 온전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충실과 성실함이 결핍된 것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놀라셨는데, 여기서 '놀라셨다'로 번역된 '에타우마젠'(ethaumazen; he was amazed at; he marvelled)의 원형 '타우마조'(thaumazo)는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여 당황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인 기대치하고는 다른 반응을 보임에 대한 심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그의 공생활을 통해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결국 동족의 고발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몸 안에 가시를 안고 그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한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히는 약점과 남에게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이 오히려 자만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믿었기에,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숙명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숙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예언자 자신은 반대받는 표적이 될지언정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떤 처지에서든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는 소명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늘 곁에서 별다를 바 없이 자라던 고향 사람이 갑자기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비판하고 되돌아볼 것을 외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 약점을 들추어내고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싶어도, 때로는 그들의 비판 속에서 내 완고하고 편협한 생각을 열어 줄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의 약함을 통해 나를 성장시켜 주시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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