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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쇄신 운동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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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철 [kcoh] 쪽지 캡슐

2006-01-31 ㅣ No.4345

 

성령쇄신 운동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가톨릭교회 내에 성령쇄신(Charismatic Renewal)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듀케인 대학에서의 일이고, 그것이 한국 내에서 모판 파종의 형식으로 수용된 것은 1971년 한국 주재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였으며, 다시 그 모판의 모를 쪄서 한국인의 가슴에 첫 모심기를 한 것이 1974년의 일이니, 이제 한국의 성령쇄신 운동은 1974년을 그 기점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언 30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게 된 셈이다.

  

  "성령세례", "은사체험", "하느님의 체험", "심령기도", "치유봉사", 그리고 "예언" 등 입으로 말하거나 귀로 듣기에 이질감을 풍기는 용어들이 그 10여년의 정착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이제는 어느새 별 부담 없이 가톨릭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친숙한 용어들이 되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령쇄신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쇄신과 봉사를 다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의 구체적 표현이었으며, 온 세계 가톨릭 신자와 교황 요한 23세의 간곡한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의 가시적 현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회의의 개최에 즈음하여 "오! 주여, 오순절 성령강림을 새롭게 하시어 당신의 경이를 이 시대에 다시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또 교황 바오로 6세도 "교회의 일차적 급선무는 언제나 성령강림을 생활화하는 것이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운동에 호응하면서 그 후 각종 평신도 신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중에서 오늘날 전 세계 천주교회 안에서 가장 큰 호응을 받는 평신도운동이 된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증거 하는 신앙을 쇄신하기 위해 성령으로 세례 받을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 성사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세성사 때 이미 받은 은총을 새롭고 분명한 방법으로 정확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 라고 부르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열매(갈라티아 5,22)를 맺게 되는 일과 주 예수님을 증거 하는 힘과, 은사적 선물(코린토 전서 2,4-11)등은 성세성사와 견진성사에서 받는 은총이다.


  그러나 정확 분명하고 또 의식적 준비과정을 거쳐 다시 성령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세 때와 견진 때에 받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체험하는 놀라운 변화가 성령안수를 받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성령안수를 받음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결과는 다양하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유별된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 하느님이 곁에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현존의식, 기도의 성장, 성경 봉독의 열망 및 깊은 묵상, 치유와 예언 등의 갖가지 은사체험, 교우들과의 일체감,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는 힘의 쇄신, 선교와 봉사에 대한 열의와 용기 및 그 능력 등이다.


  이와 같은 은사체험의 생활을 추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스스로를 철저히 의탁하고, 주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신선한 통찰로 깨닫도록 돕기 위해,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령안의 생활 세미나" 묵상 과정을 이수하도록 권한다. 이 묵상 과정을 통해 전 생애에 걸친 일체의 과오를 회개하고 세속적 욕구에서 탈피하여 복음적 삶을 지향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강조한다.


  성령쇄신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더 사무치게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더 깊이 감동하고 성부와 성자의 협조자이시며 우리를 성화시키는 성령께 더욱 온전히 자아 봉헌을 결행함으로써,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기쁘고도 열렬하게 참여코자 하는 자발적이며, 또한 의식적 자아위탁의 신심 운동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심 운동이 왜 있어야 했는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나약한 타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심 생활은 궁극적으로 뒷걸음을 모르는 끊임없는 발전이어야 한다.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다.(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회 헌장 5장 40)


  그러나 현대사회에 팽창하는 물질주의와 합리주의 속에서 유리의 신앙은 의미를 상실한 타성적 생활의 일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인은 이기적 기복기도에 급급하게 되었고 교회는 세속적 사회집단의 하나로 오해될 요소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장코자 하는 신앙생활의 활력소로써 교회 안에 자생된 신심 운동이 다름 아닌 성령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쇄신은 이 시대의 교회가 정체되었다면 그 교회를, 이 시대의 개인이 냉담상태에 있다면 그 개인을 일깨우고 활성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몸으로 살아 나아가게 해 주시는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하겠다. 성령의 불길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성령쇄신을 날로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성삼위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 맡겨야 할 것이다.


- 출처: 서울대교구 성령쇄신 봉사회 홈 페이지(www.crks.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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