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요한 (루카 1,57-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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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6-23 ㅣ No.109

 

2018.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요한 (루카 1,57-66.80)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이사야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한다. (사도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다.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이사49,1-6)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이다(49,1-7).

여기서는 주님께서 종을 태중에서부터 부르셨다는 것(1-3절)과 주님의 보상 선언(4절)과 주님께서 종의 사명을 이루고 영광과 승리를 얻게 하신다는 사실(5-7절)이 제시된다. 

이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본문은 주님의 종 자신이 앞으로 제시할 내용을 이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마땅히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법정의 상황에서 증인을 소환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본문은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부르심이 모든 이들이 다 받아들일만큼 매우 분명한 사실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1)

 '섬들'에 해당하는 '이임'(yiim)매우 먼 지역에 떨어져 있는 민족들, 세상의 땅 끝에 사는 민족들을 상징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관계없는 민족들,주님의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민족들,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민족들 대표하는 표현들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여라' 해당하는 '웨하크쉬부'(wehaqshibu)'깊은 주의를 기울이다', '청종하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샤브'(qashab)의 사역 명령형이다. 즉 본문은 점층적 동의 대구법이 사용되어 모든 민족들이 다 주의를 기울여 메시야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1)

주님의 종이 자신의 소명의 기원을 강조하여 밝히는 표현이다. 원문은 동사 앞에 주어가 선행하여 부르신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시고'라는 표현은 소명과 관련되어 있으며, '모태에서부터'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에 의한 절대적 선택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간택하심에 따른 주님의 종의 권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모태에서부터'라는 표현은 종의 소명이 그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 존재 자체가 소명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해당하는 '히즈키르'(hizkir)'기억하다'라는 의미의 '자카르'(zakar)의 사역형으로서 '특별히 기억하다', '언급하다',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름'에 해당하는 '셈'(shem)은 단순히 호칭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은 그 이름으로 불려지는 대상의 존재 자체나 인격이나 일 등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그의 일과 삶을 완전히 책임지고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이며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 독립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도 주님의 종의 사명은 종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2)

본절에서는 주님께서 주님의 종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비하시고 보호하셨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종의 일(사역)이 말로 하는 활동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50,4). 여기서 '날카로운 칼'이란 큰 영향력이 있는 말씀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주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을 하느님의 권능의 말씀으로 채우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느님의 권능의 말씀(히브4,12)으로 무장한 주님의 종은 그 말씀을 선언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메시야의 전쟁은 무력을 통한 전쟁이 아닌 말씀을 통한 영적 전쟁이 될 것이란 예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당신의 손'에 해당하는 '야도'(yado)의 원형 '야드'(yad)'권능', '능력','소유'의 의미도 내포한다. 

'그늘에'에 해당하는 '베첼'(betsel)의 원형 '첼'(tsel)'어둡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그림자', '그늘'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늘이 더위로부터 막아준다는 의미에서 파생한 것으로 위험을 피하게 하여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를 나타낸다. 

'숨겨 주셨다' 해당하는 '헤흐삐아니'(hehbiani)'하바'(haba)의 사역형으로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숨겨줌을 나타낸다(여호6,17; 1열왕18,4). 주님께서 그 종을 가장 적합한 순간에 세상에서 일을 하게 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구원 사업의 과정 하나 하나를 완전히 섭리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2)

'화살'에 해당하는 '레헤츠 빠루르'(lehets barur)정성스럽게 마름질하여 끝이 날카롭게 된(갈고 닦은) 화살촉을 의미한다.이런 화살은 한 번의 발사로 적의 심장을 뚫어 버릴 수 있는 치명적 무기이다. 상반절의 '날카로운 칼'이라는 표현과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이 표현은 영적으로 원수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할 능력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리고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라는 표현은 '당신의 손 그늘에 숨겨 주셨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을 들어쓰기 전까지 철저하게 보호하여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 아무렇게나 보관한다면, 화살은 부러지거나 혹은 날이 무디어져 전투의 도구로서 제대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정한 날에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완벽히 보호하여 보관하신다는 것이다 (갈라4,4 ; "때가 차차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3) 

여기서 '종' 해당하는 '아브띠'(abdi)'섬기다','일하다'는 의미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소유물인 노예나 왕국의 가신(1사무19,1)을 언급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창세33,5). 그러나 본문에서 이 종은 주님을 지칭하는 1인칭 접미어와 결합하여 '주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트파아르'(ethpaar)의 원형 '파아르'(paar)어떤 물체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되 그의 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너에게서'로 번역된 '뻬카'(beka)'메시야의 삶과 일(사명)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오직 주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메시야의 삶과  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요한17,4).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4) 

본절에 제시되는 '주님의 종'의 한탄 실패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며  메시야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메시야의 고난과 메시야의 인성(humanity)과 관련된 예언이다. 

메시야는 이 땅에 오신 처음부터 구원사업을 마치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을 뿐 아니라(요한1,11;  마태26,56),  무죄한 자기 몸을 바쳐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류를 향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마태28,17). 

그런 측면에서 그의 죽음은 헛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본절의 상반절은 메시야의 한탄을 나타내는 예언이지  결코 메시야의 사역이 실패할 것을 말하는 예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메시야가 이러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는 사실은 바빌론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내 권리' 해당하는 '미쉬파티'(mishipati)의 원형 '미쉬파트'(mishipat)법정에서 법과 규정에 따라 판결 및 심판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샤파트'(shapat)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심판', '판결', '판단', '공의'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행하는 구속 사업의 정당성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내 보상' 해당하는 '페울라티'(beulati) 원형 '페울라'(beula)공들여 행한 일에 대해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yeward)을 의미한다 (레위19,13 ; 잠언11,18 ; 에제29,20).

 

본절의 상반절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사역이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 주님의 종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일을 통한 열매를 바라본다는 사실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받을 보상은 죄인들이 새 생명을 얻는 것과 자신이 하느님 옥좌 오른편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히브12,2; 1베드2,24).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6) 

'지파들을'에 해당하는 '쉬브테'(shibte)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파간 골육상쟁의 비극이 끊이지 않았으며(판관12,6 ; 21,15) 북과 남으로 나뉘어 결국에는 둘 다 멸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종을 통하여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끊으시고, 열 두 지파를 단 하나의 지파도 궐이 나지 않게 완전하고도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루카1,57~66.80)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59~60)

 

'할례식에 갔다가'로 번역된 '페리테메인'(peritemein; to circumcise)의 원형 '페리템노'(peritemno)는 원래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할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식을 통해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임을 드러냈고(1사무17,26), 또한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임을 인정받았다(창세17,11).

 

그리고 이 할례는 출생 후 여드레째 되는 날에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출산한 여자가 이레 동안 부정했듯이(레위12,2) 그 아이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통해 이레 동안의 부정을 깨끗히 씻어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갔다가'로 번역된 '엘톤'(elthon; came)'오다'의 뜻을 가진 '에르코마이'(erchomai)부정(不定) 과거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들은' 루카 복음 1장 59절 후반절에서 아기의 이름까지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즈카르야의 가까운 친척들이거나 아웃들로 여겨진다.

 

원래 자녀의 할례는 가장(家長)에 의해 시행되는데, 친척들과 이웃들이 함께 참석하여 공개적인 의식으로 치러진다.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짓고자 한다.

 

여기서 '부르려 하였다'로 번역된 '에칼룬'(ekaloun; they called; they were giong to name)'부르다', '이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칼레오'(kaleo)미완료 과거로서 이름을 짓고자 했던 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즉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그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부르고자 계속 고집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고집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짓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풍습과 이름을 중요시했던 유다인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과 이웃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를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엘리사벳은 루카 복음 1장 13절'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는  천사의 예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에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짓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닌 '요한'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담대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의 이름으로는 흔한 것인데(1역대12,5.13),  '주님의 은총',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히브리어 '요하난'(yohanan)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늙어서 수태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미리 예비하는 자로 세우셔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되었기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큰 은총이 잘 표현되고 있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우리 교회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정해서 지내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여기서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과 “그분보다 먼저 와서” 라는 말과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라는 말은 모두 메시아 강생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사실상 ‘메시아 강생 예고’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라는 뜻이고, 이 이름도 메시아 강생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여기서 “함께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축하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못 낳고 있던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게 된 것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자기들에게(전체 인류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의 서막과 같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알았다면, 자기들을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오시는 것을 더 기뻐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출생은 ‘남의 집안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입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1,59-63).”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 때문에 벌어진 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고,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한 것은, 요한의 출생을 일상적인 일, 인간 세상의 평범한 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아기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던 엘리사벳이 그 나이에 아기를 낳은 일 자체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웃과 친척들은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을 처음부터 아기의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들이 하려고 했을까? 아마도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면서(루카 1,22),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하고, 가정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뒤로 물러서 있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요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은,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을 전해 들었고, 그래서 아기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즈카르야가 말은 못했어도, 글을 써서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강하게 주장하는데도 사람들은 엘리사벳의 말을 무시합니다. 이것을 세례자 요한의 인생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한 일은 회개 선포, 세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몇몇은 그의 소개를 듣고 예수님께 갔지만, 사실 그의 말을 안 듣고, 무시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헤로데는 그의 말이 듣기 싫어서 그를 죽였습니다.) 어떻든 엘리사벳 덕분에 즈카르야는 아버지의 권한을 행사하게 됩니다. 즈카르야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것은,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고,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선포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4-66).”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한 말은, 아마도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일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아기가 하게 될 일의 예언은 76절과 77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의 구원과 메시아 강생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의 노래’도 사실상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던 즈카르야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만 놀랍니다.

여기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하느님께서 아기를 특별히 보살피시는 것으로 보였다는 뜻인데, 만일에 그들이 ‘즈카르야의 노래’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이야기들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오늘날의 우리는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요한의 증언과 회개 선포는 유효합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잉태와 출산의 사건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즈카르야를 방문하여 그의 출생과 앞날을 알려 줍니다. 그의 이름까지 정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맞이하도록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요한의 삶은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보여 줍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출산했을 때, 이웃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기뻐했습니다. 친척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할 때,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요한’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실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수천 년 동안 기다리던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의 탄생은 구원의 약속이 이 세상에 곧 실현될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앞날도 계획해 두십니다.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벗어나 우리의 욕망대로 살 때 우리 인생은 꼬이고 뒤틀려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겸손을 배웁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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