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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0일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Ave Maria-schu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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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5-10 ㅣ No.1754

 

축일:5월10일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St.Antonino

S. Antoninus Pierozz

St.ANTONIUS of Florence

St. Antoninus, Archiep

Sant’ Antonino Pierozzi (di Firenze) Vescovo

Born:1 March 1389 at Florence, Italy

Died:2 May 1459 at Florence, Italy

Canonized:31 May 1523 by Pope Adrian VI

Antonino (come Antonio) = nato prima, o che fa fronte ai suoi avversari, dal greco

= been born before, or that ago forehead to its adversaries, from the Greek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S. Antoninus Pierozzi (1389-1439)

 

안토니노는 1389년 3월 1일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피에로지였는데, 허약한 체질 때문에 친숙한 별명으로서 “안토니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토니노는 ”작은 안토니오“라는 뜻이다.

그러나 안토니노의 생애는 위대한 영혼의 삶이었으며, 광대하고 조직적인 악에 대항한 덕의 승리였다.

 

안토니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계시적인 이야기 하나가 알려져 있다.

그는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의 약함을 걱정했던 계모는,

식사 때에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기를 주었다.

그런데 수도생활을 결심한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그 자기의 고기를 식탁 아래의 고양이들에게 몰래 주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려는 꿈을 키웠다.  

 

그가 16살이 되던 어느 날,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라는 수도원의 대성당에서,

요한 도미니치의 설교를 듣고 커다란 감동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 위대한 설교자를 찾아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요한 도미니치는 피렌체 근처에 있는 피에솔레에서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개혁 수도원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도회는 엄격한 규율 준수를 위한 수도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안토니노는 이렇게 엄격한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게 보였다.

요한 도미니치는 열망에 찬 이 젊은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그는 안토니노에게  “데크레툼; Decretum (그라씨아노 수사가 하나로 재 편찬한 교회의 법령집과 규범들)"

이라는 방대하고 어려운 책을 외워 오라고 말했다.

이 책의 분량과 겉모양이 이 젊은이의 기를 꺾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토니노는 강철같은 의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에 가서 그 책을 외우기 시작했고 해가 질 무렵에 이 불가능한 일을 마쳤다.

그리고 요한 도미니치에게 돌아와, 그가 요구했던 대로 이를 암송했다.

그가 수도복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 약한 젊은이는

1405년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를 했으며 54년 동안 훌륭한 수도자로서 살았다.

 

 

안토니노는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치고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살며,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 명성 높은 교회법의 학자이자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서 신중함과 결단력 높은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폴리뇨, 피에솔레, 나폴리, 카르토나, 로마, 피렌체, 등의 도미니칸 수도원들의 원장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특히 1436년부터 1444년까지 피렌체의 성 마르코 첫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와 격려로 성 마르코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오랜 동료인 프라 안젤리코와 세밀 화가였던

프라 베네데토에 의해 프레스코화와 성가 책들이 그 수도회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첫 공식적인 공공도서관을 열었다.

그리고 안토니노는 1437-1447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설교자회 수도원들의 대리구장이 되었다.  

 

그는 1439년에 피렌체의 공의회에 신학자로서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관한 성 마르코 수도원의 공사를 마칠 때인 1441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

친구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직접 수도원의 성당을 축성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죽음에 임박하자 절친한 친구인 안토니노를 부를 만큼 안토니노를 존경하고 있었다.

겸손한 안토니노는 교회 고위 성직자를 원하지 않았지만, 교황은 그의 거룩함과 유식함,

그리고 신중함을 잘 알았기에 1446년 3월 13일에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임명이 기도와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를 원하는 겸손한 학자에게는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였지만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축복이었으며, 그들은 행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로서의 안토니노는 피렌체 공화국 지도자들, 특히 메디치의 코시모와 에우제니노 4세,

니콜라오 5세와 비오 2세 교황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평화의 대사로서 일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13년 동안 피렌체의 대교구를 개혁시키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끊임없는 기도속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지혜의 은사를 받은 안토니노는 다른 사람들을 조언과 상담으로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었으니

“조언의 안토니노”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윤리 신학집(Summa Theologia Moralis)”을 비롯하여 훌륭한 많은 책들을 썼는데,

이들 모두는 실용적인 내용으로 윤리신학에 대한 것과,

고해신부를 위한 지침, 세계사의 연대기(Chronicon),등 그 밖의 여러 실용적인 주제들을 다룬 것들이다.

 

 

 

안토니노는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친절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때 부유한 도시 피렌체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줌으로서, 살림을 담당했던 이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그 도시의 가난한 이들과 직접 만났고, 특히 부유하다가 파산하여 구걸하게 된 이들도 만났다.

오늘날의 빈첸시오회처럼 남모르게 자선 사업을 하는 것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성 마르띠노의 선인들”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특히 흑사병이 피렌체에 퍼졌을 때,

그는 모금활동과 병자 돌보는 일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59년 5월 2일에 안토니노는 성 마르코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온 도시의 탄식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교황 비오 2세가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8일 후에 장례식을 주례했다.

지금까지 그는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시체가 썩지 않고 남아있다.

“다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이 말은 그의 온 생애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1523년 5월 31일에 교황 아드리아노 6세에 의해서 시성 되었고 축일은 5월 10일이다.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는 훌륭한 도미니칸의 수도자이며 사제, 그리고 모범적인 주교였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었으며,

성 도미니코를 본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충실하게 복음적 권고를 지켰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으며, 특히 성체성사와 성모 마리아에게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다.

 

그리고 겸손하고 엄격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좋은 설교가와 교리학자이었으며, 당시의 종교적인 타락을 막고,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지혜의 은사를 가지고 성령의 빛으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여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안토니노 삐에로찌는 1405년에 설교회에 입회하여,

40여 년 동안 이탈리아의 도미니꼬회 수도원을 전전하며 훌륭한 수도자로 살았다.

그는 대부분의 수도 생활을 수도원장으로 지냈으나 두 차례나 관구장을 역임하였다.

1436년 플로렌스에서 그는 고시모 데이 메디치의 재정 지원으로 산 마르코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유명한 화가 프라 안젤리꼬가 벽면을 장식 하였고, 르네쌍스 인본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1446년, 안토니노는 플로렌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불굴의 정의감과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도록 자주 초빙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교구민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그 자신이 단순한 생활과 모범적인 처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교구를 순회하여 강론하였으며,

그로부터 물적, 영적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와 경제 발전에 대한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국가는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드리아노 6세 교황이 시성하였는데, 교회 개혁에 대한 그의 이상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는 자고로 수많은 유명한 미술가, 정치가, 문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로서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그시에서 자라난 성인도 결코 적지 않다. 성 안토니오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플로렌스 시의 피에로찌 가문에서 태어난 것은 1389년의 일이었다.

세례 때에는 저 유명한 파도바의 성인을 따라 안토니오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는 본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토니오 즉"작은 안토니오"라고 불렀다.

그는 체구는 작았을망정 지혜나 의지등의 정신력에 있어서는 강해

학문이나 덕행의 면에 있어서 일찍부터 현저한 진보를 보였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6월13일.게시판1220번.1813번.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게시판1572번.

*복자 프라 안젤리코 수도자 화가 축일:2월18일.게시판162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15세 때에 도미니코회의 유명한 설교가 도미니티 신부의 강론을 들은 그는 비상한 충격을 받아

수도자가 될 결심을 하고 수도회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도미니티 신부는 "그라시아노 교회법을 다 외우고 난 다음에 ..."하고 타이르며 그를 일단 집에 돌려 보냈다.

그라시아노 교회법이라 하면 극히 중요한 서적이기도 하고, 내용도 지극히 어려웠으므로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외우지 못하리라고 도미니티 신부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1년이 지난 다음 안토니오는 피에솔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신부를 찾아가

"말씀하신 대로 공부를 하고 왔으니 시험해 보십시오"하고 간청했다.

도미니티 신부는 여러 가지를 질문해 본 결과 교회법을 전부 암송할 뿐 아니라 다른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대답을 하므로 그의 용기와 머리 좋은 점에 감탄하고 그의 입회를 쾌히 허락했다.

 

수도자가 된 안토니오는 성덕에 있어서 수도원의 모범으로 공격을 받고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미네르바 대수도원의 원장으로 추천되고,

그의 폭넓은 학식 또한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로마 공소원의 참사회원에 임명되었으나,

곧 고향인 플로렌스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자 신학고문으로서 이에 참석했다.

이 같은 인물이었으므로 플로렌스 대주교가 서거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 부터 그 중직에 취임하라는

명령을 받게된 것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마침 안토니노는 시칠리아 섬의 수도원을 시찰하러 가 있었으나 자기가 대주교로 추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중책을 모면하려고 살디니아섬으로 피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교화의 명령이 이미 도착했으므로 그도 할 수없이 순명으로 취임을 승낙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던가를 가히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안노티노는 대주교가 되었어도 결코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들의 후계자는 덕행 외에 아무런 재산도 가져서는 안된다."하며

그 직분에 따르는 모든 수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교회 유지비와 빈민의 구제비로 돌리고

자기는 여전히 수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고행의 생활을 감수했다.

그리고 성실한 사람에게는 봄날과 같은 자애의 빛을 보였지만,

악에 물들어 고칠 줄 모르는 이에게는 추상과 같은 엄격한 태도로써 대했다.

당시 플로렌스에는 도박이 유행하여 그로 인해 재산을 낭비하고 집을 망쳐 거지로 몰락되는 이가 많았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그 악습의 근절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안토니노는 똬한 대주교로서 분주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강론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교훈을 받으러 오는 이에게는 기꺼이 이를 지도하고 기도와 묵상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므로 플로렌스 공화국의 대통령 고스마스 메지티가

"플로렌스의 번영은 무엇보다고 우선

안토니노 대주교의 열심한 기도 덕분이다"라고 말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지극한 자비심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1448년 플로렌스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와,

1453년 대지진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일 것이다.

그때 그는 대주교로서 받는 수입으로써는 도저히 안 되었으므로 많은 부호와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기부금을 모집하여 그것으로 병자와 이재민을 구제했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누구나 안토니노를 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며 사모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수많은 저서가 있어 그의 재능과 활동이 얼마나 다방면이었던가를 증명해 준다.

 

이처럼 대주교로서 힘든 직무를 맡아보기를 12년, 안토니노는 나이도 많아지고 몸도 쇠약해져서,

1459년 5월 2일 잠자듯이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축일은 교회의 제정에 의해 5월 10일 지내게 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8월8일.게시판1308번.

 

도미니코 수도회(도미니코회, 道明會) 또는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

수도회의 모토는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입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홈에서

 

 

 

암기

 

성 안토니오는 작고 연약한 소년이었지만 수도 생활을 몹시도 갈망하였다.

그는 15살 되던 해에 산타마리아노벨라에 있는 수도원에 찾아가서 입회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수도원장은 힘든 수도 생활을 하기에는 안토니오가 너무 허약해 보여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낙담해서 돌아서는 소년의 모습이 딱해서

<은총에 관한 교령>을 외우면 입회를 고려하겠다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안토니오는 1년 만에 그것을 다 외우고 입회를 허락받았다.

 

암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당시에 외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나 성구를 잘 외우는 사람이 있고 영화나 연극의 대사를 즐겨 외우는 사람도 있다.

또 유명인의 연설이나 좌우명을 줄줄이 외우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외우려면 항상 곁에 두고 자주 보아야 한다.

성구를 외우려면 우선 성서를 가까이 두고 자주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한다.

그리고 그 구절의 내용이 완전히 마음에 새겨지면 한 줄씩 외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잘 외워지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다 보면,

당신도 모르는 새 그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혼에 힘을 주는 성서 구절을 외우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Ave Maria-schubert

 

 

 

 

 

 

 

 

 

 

 

 

 

 

 

 

 

 

 

 

 

 

 

 

 

 

 

 

 

 

 

 

 

 

 

 

 

 

 

 

 

 

 

 

 

 

ANTONIUS of Florence

 

Also known as

People’s Prelate; Protector of the Poor

Memorial

10 May

Profile

When he first tried to join the Dominicans he was refused due to his poor health. When he persisted, the prior told him he could only enter if he could recite the whole of canon law from memory; a year later, in 1405, after spending his time in study, he recited it and was admitted. Priest. Worked for the reforms of Blessed John Dominic. Vicar of the convent of Foligno in 1414. Prior. Member of the Council of Florence which sought to end the schism between the churches of the east and west. Vicar-General of the Dominicans. Archbishop of Florence, Italy in 1446. Diplomat. Theologian. Healer. Wrote a biography of Blessed John Dominic, a history of the world, and a reference work on moral theology.

Born

1 March 1389 at Florence, Italy

Died

2 May 1459 at Florence, Italy

Canonized

31 May 1523 by Pope Adrian VI

Patronage

fever

Representation

lily; pair of scales in which he weighs false merchandise against God’s word; scales; wearing bishop’s mitre, holding the cross, and giving the sign of blessing in absolution

 

 

 

Antoninus, Saint

(1389-1459) Confessor, Archbishop of Florence, born Florence; died there. In 1405 he entered the Dominican Order and was a zealous promoter of the reforms of Blessed John Dominic. He was made vicar of the convent of Foligno, 1414, and governed several other convents until in 1446 he was raised to the archiepiscopal see of Florence. Among his writings are a valuable work on moral theology and a history of the world. He was among the first to attempt to adapt economic traditions to modern developments. Emblems: scales, lily. Canonized, 1523. Feast, Roman Calendar, 10 May.

New Catholic Dictionary - Catholic Encyclopedia

 

 

 

 

 

Sant’ Antonino Pierozzi (di Firenze) Vescovo

 

2 maggio - Comune  

Firenze, 1389 - 2 maggio 1459

 

Fu domenicano a quindici anni e, divenuto sacerdote, fu priore a Cortona, a Fiesole, a Roma, a Napoli, ricoprendo nel frattempo la carica di Vicario generale dei Frati Riformati.. Fondo la Societra dei Buonomini di San Martino per i poveri bisognosi. Divenne arcivescovo di Firenze prodigandosi durante la peste. All’attivita apostolica e agli incarichi di cui era gravato, uni un intenso studio e la realizzazione di opere che ebbero carattere giuridico-morale. Egli fu il primo a tentare una sintesi tra il diritto e la teologia, raccogliendo quanto riteneva utile al ministero della predicazione, della confessione e della direzione, per offrire una soluzione cristiana ai molti problemi del suo tempo.

 

Etimologia: Antonino (come Antonio) = nato prima, o che fa fronte ai suoi avversari, dal greco

Emblema: Bastone pastorale, Portamonete

 

Antonino Pierozzi fu uno dei piu bei fiori e il piu valido sostenitore della riforma dell’Ordine promossa dal Beato Raimondo da Capua. Fu ricevuto nell’Ordine dal Beato Giovanni Dominici nel convento di Santa Maria Novella, proseguendo la sua preparazione a Cortona, dove ebbe come Maestro il Beato Lorenzo da Ripafratta, del quale fu degno discepolo. Antonino a quattordici anni, a causa del suo aspetto gracile, aveva destato qualche apprensione nel santo Priore, ma in quel fragile corpo c’era un’anima gigante. La sua vita fu intessuta di penitenza e di preghiera. Nello studio fu quello che si dice un “lavoratore”, e ne fanno fede le numerose opere di sommo valore che scrisse. Da Cortona passo al Convento di San Domenico a Fiesole, alle porte di Firenze. Venne ordinato sacerdote nel 1413, divenendo Vicario a Foligno. Dette vita al glorioso Convento di S. Marco e fu Priore a Fiesole, Siena, Cortona, Roma, S. Maria sopra Minerva a Roma, Napoli, portando ovunque quella fiamma di zelo che in lui, fu dolce e forte a un tempo. Papa Eugenio IV, nel 1446, lo nomino Arcivescovo di Firenze e per indurlo ad accettare gli dovette minacciare gravissime censure. Come era stato modello di religioso e di superiore, cosi fu specchio di Pastore. Indisse guerra inesorabile a tutti i vizi e a tutte le ingiustizie. Fu il Padre dei poveri e degli sventurati. Anche da Arcivescovo osservo le austere regole dell’Ordine, fino alla fine dei suoi giorni. Sul letto dell’agonia pote esclamare: “Servire Dio e regnare!”, e spiro fragrante di verginita e ricco di opere sante. Per la sua consumata prudenza fu chiamato Antonino dei Consigli. Mori il 2 maggio 1459. E’ stato proclamato Santo da Papa Adriano VI il 31 maggio 1523. E’ il Santo Titolare, assieme al Vescovo San Zanobi, dell’Arcidiocesi di Firenze. Dal 1589 il suo corpo, incorrotto, si venera nella Basilica Domenicana di San Marco a Firenze. Il Servo di Dio e Arcivescovo Domenicano, Mons. Pio Alberto Del Corona, durante l’ultima ricognizione del corpo, ha scambiato il suo pastorale con quello misero di legno, che il Santo aveva con se nell’urna. Tale Pastorale dal febbraio 2001 si trova esposto permanentemente nella cripta del monastero delle Suore Domenicane dello Spirito Santo a Firenze, in Via Bolognese, dove si trova, dal 1925 il corpo del Servo di Dio, di cui dal 1942 e aperto il processo di canonizzazione, e i cui atti attualmente sono in Vaticano per la parte finale, e la cui figura e in questo libro ricordata al giorno 15 agosto, suo dies natali.

L’Ordine Domenicano lo ricorda il 10 maggio.

Autore: Franco Mari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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