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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교황 장례미사 강론과 교황선출 기원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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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5-04-19 ㅣ No.23

요한 바오로 2세 장례미사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강론
2005년 4월 8일(금), 성 베드로 대광장



“나를 따르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양떼를 돌볼 목자로 선택하신 제자에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의 유언과도 같은 이 말씀은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이 우리에게 남겨준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영원한 생명의 씨앗으로 땅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기쁜 희망과 깊은 감사의 마음도 지니게 됩니다.

지난 며칠 동안 수많은 사람이 모여 조용히 기도하던 이곳 성 베드로 대광장과 인근 거리들, 그리고 로마 시내 여러 곳의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의 마음은 이러한 느낌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저는 추기경단을 대표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드리며, 이 미사에 참석하신 각국 지도자, 정부 수반, 그리고 여러 국가의 사절단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한 다른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과 공식 대표들께도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오신 대주교,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즐겨 교회의 미래와 희망이라고 말씀하셨던 젊은이들에게도 인사드립니다. 아울러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도 인사드립니다.

나를 따르라. 카롤 보이티와는 젊은 학생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과 시에 심취했으며, 나치의 공포에 둘러싸여 위협을 받는 한 화학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할 때에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사피에하 추기경이 설립한 비밀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아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와 자서전에서 교황 성하께서는 1946년 11월 1일에 받은 사제 수품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 이 글들에서 그분은 자신의 사제직을 특별히 주님께서 하신 세 가지 말씀을 준거로 설명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16)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 말씀에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음과 영혼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쉬지 않고 찾아다니셨습니다. “일어나 갑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두 저서 가운데 첫 번째 책의 제목입니다. “일어나 갑시다.”라는 말을 통해 교황 성하께서는 침체되어 있는 신앙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과거와 현재의 제자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 갑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제이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으로 고통이 심한 가운데에서도 날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양떼와 전 인류 가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시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알며 자신의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여셨던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주님의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참 사랑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십니다.

나를 따르라! 1958년 7월, 젊은 사제 카롤 보이티와는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카롤은 카누를 즐기는 젊은이들과 함께 마수리 호수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이때 그는 당시 폴란드 교회의 수장이었던 비진스키 추기경의 호출장을 받아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만남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쿠프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학문의 세계와 젊은이들과의 의욕적인 만남, 그리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신비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현대 세계에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전하기 위한 위대한 지적 노력, 이 모든 것을 뒤로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 젊은 사제의 인간 정체성 바로 그 자체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카롤 보이티와는 보좌주교직 임명을 수락하였습니다. 교회의 부름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루가 17,33).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황 성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지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위하여 주저없이 바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주님의 손안에 맡긴 모든 것이 어떻게 새롭게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말과 시, 문학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사목 임무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그것이 반대받는 표적일 때에도 복음 선포에 새로운 활력과 새로운 절박성,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1978년 10월 추기경이었던 보이티와는 다시 한 번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에 나오는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이 때 다시 한 번 이루어졌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카롤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크라쿠프 대주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을 지배한 힘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론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내린 덕분에 그분은 그리스도의 양떼, 곧 보편 교회의 목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거운 짐을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임기 동안의 치적을 구체적으로 다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오늘 독서 말씀 중 그분이 남기신 메시지의 핵심적 내용을 반영하는 두 구절만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 베드로 사도와 함께 교황 자신은 ―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그것은 만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사도 11,34-36).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 바오로 사도와 함께 교황 자신은 ―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필립 4,1).

나를 따르라!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는 이 명령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순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편 목자의 임무와 사랑에 관한 대화를 결론짓고 요약하는 이 말씀으로써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루어졌던 또 다른 대화를 상기시키십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여쭈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3.36).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부터 십자가를 향해, 부활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곧 파스카 신비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아직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부활 이후에야 그 때가, 그 “나중”이 옵니다.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파스카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한 21,18). 교황 성하께서는 아직 젊고 활력에 넘쳤던 재임 초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끄심에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점점 더 깊이 동참하게 되었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라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가는 바로 그 때에도 그는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가운데서도 지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영원한 사랑의 신비인(요한 1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파스카 신비가 하느님 자비의 신비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저서에서 그분은 악에 부여된 제한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비”(Memory and Identity, 60-61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셨으며, 새 질서를 세우셨다. 이 질서는 사랑의 질서이다 …… 바로 이 고통이 사랑의 불꽃으로 악을 태워 없애고 죄에서조차 선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는 것이다(Memory and Identity, 189-190면). 이러한 시각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고난을 받고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그분의 메시지와 그분의 침묵은 그토록 감동적이고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교황 성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어머님 안에 가장 순수하게 반영된다고 보셨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분은 성모님을 더욱더 사랑하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당신께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들으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또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한 것과 똑같이 하셨습니다.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저는 온전히 임의 것입니다(Totus tuus). 성모님에게서 그분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황 성하께서 지난 부활주일에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교황궁 창가에 나와 마지막으로 로마와 전세계 신자들에게 축복을 보내신 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교황 성하께서 오늘 아버지의 집 창가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축복해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 저희를 축복해 주소서. 우리는 날마다 당신을 인도해 주셨고 이제 당신을 그분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해 주실 당신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께 당신의 영혼을 맡겨 드립니다. 아멘.




교황 선출 기원 미사


추기경단장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05년 4월 18일 월요일



제1독서: 이사 61,1-3ㄱ.6ㄱ.8ㄴ-9
제2독서: 에페 4,11-16
복음: 요한 15,9-17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은 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들려주시는 말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오늘 선택된 제1독서, 제2독서, 복음의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직시하게 해 줍니다.

제1독서(이사 61,1-3ㄱ.6ㄱ.8ㄴ-9)는 메시아의 모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하고 말씀하셨을 때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 구절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언뜻 듣기에 모순된 말을 발견하게 됩니다. 메시아는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이사 61,2)하도록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총의 해에 대한 이 선포를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은 악을 제압하는 은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격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만나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제 사제 수품을 통하여 말과 행동 그리고 성사의 효과적 표징들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라고 했을 때 그가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이 대목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봉독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끝난 뒤에 실제로 사람들이 수군거린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이 말씀의 참 뜻을 친히 밝혀주셨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1베드 2,24) 하고 말합니다. 또한 바오로 성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또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갈라 3,13.14).

그리스도의 은총은 값싼 호의가 아니고, 악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악의 모든 무게와 파괴적 힘을 당신 몸과 마음으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그리고 당신의 고통받는 사랑의 불로 악을 태워버리고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과 주님의 은총의 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동시에 성취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복수입니다. 이는 곧 성자의 위격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고통 받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입을수록 우리는 그 만큼 더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골로 1,24) 우리 안에 채우려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합시다.

제2독서(에페 4,11-16)는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은총으로 베풀어 주신 교회의 여러 직무와 은사에 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치를 누리기 위한 조건과 내용으로 성자께 대한 믿음과 지식을 쌓아가는 것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데에 함께 참여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서 곧 주님과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여정을 살펴봅시다. 이탈리아어 본문에서는 다소 간단하게 ‘그리스도의 성숙’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더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완전성의 척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여 신앙에서 진정한 어른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신앙에서 미성숙한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서 어린아이란 어떠한 상태이겠습니까? 바오로 성인은 신앙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란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에페 4,14)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현실에 부합하는 설명입니까.

최근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교설과 이념, 사고방식들이 범람하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실은 작은 배는 극에서 극으로 치닿는 풍랑에, 곧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까지, 집단주의에서 극단적 개인주의까지, 또 무신론에서 모호한 종교적 신비주의까지, 영지주의에서 종교혼합주의까지, 이 모든 풍랑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고, 바오로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의 간교한 유혹과 속임수로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일이(에페 4,14 참조) 실제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경에 따라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 할 때는, 이따금 근본주의처럼 격식에 얽매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상대주의, 곧 “교설의 풍랑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도록” 방치하는 것이 현 시대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자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만이 궁극적인 척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상대주의의 교설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척도, 곧 참 사람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바로 진정한 인간성의 척도이십니다. “다 자란” 신앙은 최신 유행의 풍랑을 좇지 않습니다. 다 자라고 성숙한 신앙은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야말로, 모든 선한 것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해 주고, 참과 거짓, 기만과 진실을 식별하는 기준을 갖게 해 줍니다. 우리는 이 성숙한 신앙을 키워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양떼를 이 신앙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 이 믿음만이 일치를 낳고, 이 믿음은 사랑 안에서 실현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성인은 풍랑에 흔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겪는 시련과 대조하여, 사랑 안에서 진리를 이루라는 아름다운 말을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 공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사랑은 일치를 이룹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와 사랑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께 가까이 다가갑니다.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눈먼 장님과 같고, 사랑이 없으면 진리도 “울리는 징과”(1고린 13,1) 같을 것입니다.

이제 복음(요한 15,9-17)을 살펴봅시다. 이 복음의 풍요로움에서 저는 두 가지만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15,15)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보잘것없는 종에 불과하다고(루가 17,10 참조) 느끼고 또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고 당신 벗으로 삼으시며 우리에게 우정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정을 보여주십니다. 우선, 벗들 사이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셨으며,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애정과 열렬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는 내 몸이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맡겨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를 우리에게 맡겨 주시고, 나약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손에 당신의 진리,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신비, 곧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요한 3,16) 하느님의 신비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벗으로 삼으신 그분께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요소는 의지의 일치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따라 우정을 정의하셨습니다. 로마인들도 우정을 “같은 것을 바라고 -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Idem velle -idem noll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14). 그리스도와 맺는 우정은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세 번째 청원의 표현과 일치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게쎄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반항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고 일치하는 의지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율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비극을 겪으신 다음, 하느님의 손에 인간의 의지를 맡겨드림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이처럼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 것입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의 벗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벗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알게 될수록 그 만큼 더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구원의 기쁨도 커져 갑니다. 예수님의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강조하려 했던 복음의 다른 요소는 열매를 맺으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16). 여기서 그리스도인들, 사도들의 삶의 역동성이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나가라. ……” 우리는 신앙의 은총,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의 은총을 모든 이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염려를 하며 활력을 얻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봉사하는 사제로서 우리가 받은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변치 않는 자취를 남기고자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변치 않고 남는 것이겠습니까? 돈? 아닙니다. 건물들? 아닙니다. 책들? 물론 아닙니다. 길든 짧든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이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영원히 남아 있을 유일한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영원불멸하게 창조하신 인간의 영혼입니다. 따라서 썩지 않을 열매는 인간의 영혼에 뿌린 씨만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 씨앗은 사랑과 앎,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 주님의 기쁨에 마음을 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썩지 않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이 땅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느님의 포도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페소서의 독서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독서에서는 시편 67[68]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에페 4,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승리하신 그분께서 선물을 나누어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사제 직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건설하도록 곧, 새 세상을 건설하도록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직무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로 실천합시다. 그러나 지금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큰 은총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이을 새로운 목자, 주님 마음에 드시는 목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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