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광장

한 성직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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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선 [delltapose] 쪽지 캡슐

2007-09-04 ㅣ No.1773

한 성직자의 고백
                                       한국대학선교회 총재  김준곤 목사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간절하고 목마른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사랑하는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온 나에게도 
한동안 주님에게 섭섭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말도 행동도 생각도, 심지어는 존재조차도 
얼어붙듯이 정지해 버린 어떤 제로점에 서 있었다.   
그 뒤로 나에게 한 기적이 일어나 주님에 대한 감사함이 
되살아날 때까지 나는 그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주님을 원망하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16년전, 82년 4월 26일 만 29세를 일기로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숨진 뒤, 나는 딸의 영전에 바치려고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란 글을 썼다.  

딸만 넷인  나에게 둘째인 신희는 유난히 착하고 여린 
딸이었다.  
몸매는 가냘프고, 순하고 영리하고 얼굴도 빼어나게 곱고, 심성은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만치 호젓이 피어난 꽃처럼 곁에 있어도 없는 듯이 조용하던 신희었다.
"얘야, 너는 왜, 어쩜 그리 미안하게 태어나 사는 아이처럼 그러느냐.”고 혼자  
물어볼 때가  종종 있었다.  


신희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는 중고등학교 교장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과학 교사로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출근할 때면 아내가 젖병에 우유를 타 놓고 나가면,  
집보는 소녀가 그 우유를 다 먹어버려 하루 종일 입술이 마를 정도로 굶었어도 
울질 않았던 신희었다. 털털거리는 시골길 만원 버스를 타도 쌕쌕거리며 예쁘게 
잠을 잘 자던 아이였다. 

신희에게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 것은 1981년 여름 무렵, 신희가 CCC에서 
만난 심종택이와 결혼을 하고, 5년 남짓하게 미국에 유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두 살 터울지는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그 때였다.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신희는 국내의 어느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았을 때는 이미 위암 말기였다. 

1981년 12월 10일 신희는 S 병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위와 비장 전부, 간장과 
췌장 일부를 절제해 버리고 소장 일부를 잘라내 대용 위를 만드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반년 이상 더 살지는 못할 거라고 주치의가 말했다.
소생 가능성을 묻는 나에게 십만 분의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신희는 밤마다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혼자 몰래 울어 눈이 
부었는데도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구들 앞에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며, 문병 온 사람들이 울어도 일부러 태연하려고 애썼다. 마지막 한 
달 가량은 목 밑 어깨 쪽에 주사 바늘을 꽂고 심장에 직접 주입하는 영양 주사만으로 
연명했는데, “아빠, 내 몰골이 말이 아니지요?”하며 쓸쓸한 웃음을 지었을 때는 
내 가슴은 미어지는 뜻했다. 

신희의 가장 큰 걱정은 어린 두 딸의 문제였다. 장마에 햇빛 나듯 잠깐 통증이 
멎으면 신희는 두 아이를 안고 창가 의자에 앉아 “엄마가 나으면 동물원에도 가고 
자장면도 먹으러 가자!”며 기약없는 약속을 하곤 했었다. 속으로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혀를 깨물면서도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4월 어느 날,   
여동생 윤희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즐거웠던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앉아 
나의 손을 꼭 잡더니, “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또한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신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조용히 
신희에게 말했다. "신희야  이제 너는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

그때 신희는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신희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남편과 두 딸과 부모를 위해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기도를 드렸다. 

세상 떠나기 전날 신희는 모처럼 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깨어나서는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하도 편안하게 보여 나는 내심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작은 기대를 
가졌을 정도였다. 

나는 이튿날 아침, 기도를 마치고 사무실에 있는데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곧장 달려가 보니 신희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주님의 품에 안긴, 종잇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신희의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다.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그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그 얼굴은 분명 티없이 해맑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나도 잔뜩 감겨 터질 것만 같던 고통의 태엽이 한 가닥 
풀리는 느낌이었다. 

수술한 날로부터 1백 67일 동안 끊임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나 수술 직후 
신희는 간호사에게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신희는 끝내 자신의 병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자신이 모르는 척 견디다가 
눈을 감은 것이다.   그렇게나 착하고 효성스러운 아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상 욕심을 다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졌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졌다.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주님은 신희를 땅 위의 아버지인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필요로 하셔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식으로, 더 좋은 
곳에 신희를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찬송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이요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이요, 나와 집사람에게는 
딸의 죽음이니, 아비된 내가 열두 번도 더 딸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주님만이 대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은 끝내 빼앗아 가셨지만, 빼앗은 그 손보다 다른 손에 예비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지금 사랑하는 내 딸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후일 내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날 때,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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