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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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kimpaul25] 쪽지 캡슐

2005-02-27 ㅣ No.3247

 

그때 그 사람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 변화에 낙오되어 우는 마음이 있다. 이른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내 나이 이제 예순하나에 들어선다. 비교적 변화를 꺼리는 세대이고 나는 그 중에서도 더욱 그러한 듯하다. 지금도 노래방 노래책에 내가 좋아하는 흘러간 노래가 없을  정도이다.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 교장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 중년들이 부르는 노래가 유창하다. 거기다가 춤까지도 대단하다.

 “여보게들, 교장은 않고 엉뚱한 퇴폐나 배우고….”

 “어허, 모르는 소리. 노익장(老益壯)이라네. 늙을수록 마음은 젊어야…”

 귓가에 쟁쟁한 여운이 돈다. 무변(無變)한 고루만 품고 시변(時變)의 세상을 한탄하는 내 자화상이 변색된 흑백사진 속에서 멍하다. 이제 이순(耳順)이다. 옹고집을 버리고 이치에 순순히 따르는 이순(理順)으로 가야 하겠다. 하지만, 녹 쓴 귀가 열리려면 찢어지는 상처가 꽤나 아플 텐데.


 내 발로 영화관을 간다는 것은 강산이 한 번쯤 바뀔 적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요즘 ‘실미도’ 영화가 대단하다고 해도 못보고 지나갔다. 얼마 전에 ‘박정희’를 주제로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세상에 회자한다. 밥상 앞에서 혼자 두런거리는 말을 듣고 고루한 아비가 따분한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하여 부부 동반을 강요한다. 못이기는 척하며 코앞에 극장을 천 리 먼길로 갔다. 늙은 부부가 이리저리 꼬불꼬불 묻고 물어 어렵사리 극장에 들어갔다. 젊은이의 팝콘도 하나 사들고.

 아, 저 광경을 보라! 연산군인들 저럴까? 내 나이쯤이면 다 아는 얘기이지만, 영상으로 드려다 보는 감회가 너무나 아파서 가끔 고개를 숙여 화면을 회피하였다. 지껄이는 일본어, 경호원들의 욕설, 음란 등등. ‘김재규의 총구’가 열리고 발광하는 화면, 도륙, 25년 전의 그날을 가만히 기억한다. 독재 권력의 비참한 말로의 총성. 주(酒), 색(色), 권(權), 그리고 아부가 뒤범벅이 된 술자리에 감도는 참람함, 피가 흥건한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지고…. 다시 실탄을 채워서 들어가 마지막 확인 사살하는 김재규, 죽어가는 차지철과 박정희, 젊은 대학생의 인간적인 행태와 원로 정치인의 비굴한 행태 등, 내 젊은 날 틈틈이 읽으며 무릎을 치며 한탄하던 사서(史書) 속의 미련한 독재자의 비참의 재현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노년층이 꽤 많은 영화관에는 적막한 긴장감만이 대단하다. 가냘픈 한숨이 들리는 듯, 내가 신음하는 괴로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어 쉬자, 아내는 옆구리를 찌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준다고. 결국, 방황하는 김재규의 절규만을, 깊어가는 서울의 밤이 품어 안은 채로 그는 억척스러운 군화발길에 채이며 감금되고, 그 추종자들의 비참한 생애가 하나하나 그려지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관을 나서는 표정들이 무겁다. ‘저기 젊은이들의 표정이 꽤 진지하구먼! 우리나라의 장래가 좋아요.’ 두런거리는 말에 아내는 말이 없다. 돌아오는 내내 김재규의 허둥대는 모습이 걸린다. 25년 전 비참한 실화를 구체화한 듯이 나를 사로잡는다. 왠지 그가 육군본부 지하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이 거미줄에 걸린 고추잠자리처럼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왜 그럴까? ‘그는 우리나라의 권위인 대법원이 사형에 처한 살인범인데, 불충 죄로 영영 갔는데. 어쩌자고 조그마한 역사 교사인 내가 춘추(春秋)의 필봉에 빗대어 부질없는 자비심을 부리는가?’ 자문하면서 뛰는 가슴에 손을 대본다. 순간에 ‘안중근, 정몽주, 성삼문’ 등등 한 순간에 죽어간 인물들이 머리에 높이 떠오른다. 무거운 칼을 쓰고 주리 틀려 능지처참 당하던 그때 그 불충한 역적들이다. 이는 지나친 비약인가? 오락가락 갈림길에서 귀갓길이 심란하기만 하다.

 이는 사서(史書) 속에 꿈틀거리는 얘기가 아니요, 내 손발 그리고 마음을 얽어매었던 소년, 청년, 장년으로 이어진 내 성장과정에 즐비하게 세워진 가로수의 하나여서 다른 역사 기록보다도 사무치는 모양이다. 3. 15,  4. 19, 5. 16, 유신을 건너 지금 조그만 민주주의로 연결된 징검다리이다. 길거리에서 울부짖던 지난 내 젊음의 절규이다. 그래서 그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보다.


 오늘, 교중미사에 젊으신 사제의 강론이 절절하시다. 내 해방둥이로 태어나서 어두운 역사를 많이도 봤다. 그 가운데 역사교사로 교단에 서 있었다. 양심에 찔리는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맹자는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 말을 않는 것은, 말을 않는 것으로서 아부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역사와 만나는 때마다 나는 교단에서 겁에 질려 말을 못하였다. 역사에 죄인이요, 교사로서 죄인이요, 신앙인으로서 예언직을 외면한 죄인이다. 그 엄청난 독재를 알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궁벽한 논리로, 우리의 목자들이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올곧게 부르짖으시며 감옥에 가셔서 모진 매를 맞으실 때 멀쭈거니 십자가의 기적만 바라면서 묵주기도만 앵무새처럼 지껄인 나이다.

 논어에 ‘鳥之將死에 其鳴也 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 善이니라.’하였다.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하는 말이 착하다는 뜻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의 유언이 된 항소문을 다시 음미해본다.(…결국, 본인은 위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성삼문이 죽이려던 수양대군의 후손이 왕이 되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성삼문의 억울한 역적은 벗겨진다. 정몽주도 그를 죽인 후손에 의하여 역적의 누명을 벗으며 충신으로 복권된다. 그들이 붙잡으려는 거룩한 충(忠)의 정신을 유교적 양심에서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 김재규는 과연 그의 주장을 우리는 어찌 볼 것인가? 시대가 지난 우리의 판단이다. 더욱이 우리 신앙인의 판단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의 강론이 여기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광주 항쟁 그 당시 명동성당 미사에 참여하였던 30대 중반의 내 기억, ‘피가 부족합니다. 피가!’ 하시던 어느 강론을 듣고 성당 아래 성모병원에 줄을 서서 헌혈한 기억이 선히 떠오른다. 우리 동족이 그렇게 죽어 갈 때에, 나는 교단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가? 두려움에 질려 쉬쉬하였던 겁쟁이 나였다.

 며칠 전에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보고 청취소감을 적어놨다가 오늘 신부님의 강론을 경청하고 감회가 있어 부기하여 얹어본다. 생기 있는 강론이 참으로 좋다. 신앙은 역사 위에서 존재한다. 역사는 따르는 것이 아니요,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바른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역사 현장의 생생한 춘추필법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여 교회의 ‘예언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그래도 종교는 천주교이다.’라는 70년대의 말이, 오늘에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교는 그때그때로 이어지는 행위(진리)에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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