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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영원한 생명 (요한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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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3-11 ㅣ No.89

 

[사순 제4주일]영원한 생명 (요한 3,14-2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온 나라에 명을 내리고 칙서를 반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한다. (역하 36,14-16.19-23)
그 무렵 14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15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9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20 그리고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1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에페2,4-10)
형제 여러분,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내 왕국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사제와 레위인들 가운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싶어 하는 사람은 그대와 함께 가도 좋다.(에즈7,13)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2역대 36,14-16.19-23)

 

 

 

역대기의 마지막 장인 36장은 남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네 왕들에 대한 간결한 기사로 끝나고 있다. 요시야가 이집트 군대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후(2역대 35,23-24) 남부 유다는 급속히 쇠퇴한다.

 

요시야의 삶은 히즈키야(2역대29-32장)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 아들들이 하느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불과 22년 6달 열흘안에 네 명의 왕(여호아하즈/여호야킴/여호야킨/치드키야)이 외세에 의해 교체되고, 마침내 남부 유다 왕국은 멸망을 맞이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유다 왕국의 급격한 쇠퇴와 혼란의 표면적 이유는 그 당시 재편되고 있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며,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패역한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오늘 제1독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역대기 하권 36장 11절부터 나오는 치드키야 이야기 알아야 한다. 

 

바빌론 임금 네브카드네자르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며, 여호야킨의 삼촌인 치드키야를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게 한다. 치드키야가 통치한 11년의 상황은 예레미야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예레27-52장참조) 그 역시 재위 9년에 네브카드네자르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가 결국 바빌론의 침공을 자초한다.

 

치드키야는 악행을 일삼으며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과 자신의 아들들이 바빌론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무렵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14)

 

이것은 유다의 온 백성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제들도 악행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 당시 모든 유다 사람들이 범죄 행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지도 사제'는 24반열의 사제들과 대사제(사제단 조직)를 가리킨다.(1역대 24,1.3-19)

 

에제키엘 예언자도 치드키야 시대에는 백성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깊은 우상숭배에 빠진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에제 5,1-7 ; 8,5-18 ; 14,1-5등등)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5)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말'(hamar)는 '동정하다', '용서하다', '아끼다'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선택된 백성들이 계속해서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고, 파괴하고 심판하시기를 인내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이런 표현 형태는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발견된다.(예레 26,5 ; 29,19 ; 35,14.15)

 

여기서 '사자들'이란 '예언자'들을 가리키는데, 당시에 활약했던 에제키엘(BC593-570), 예레미야(BC627-580), 다니엘(BC605-530), 하바쿡(BC612-589)등을 지칭하며, 그와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6)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너무 극심하여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2열왕 24,4)

 

오늘 독서에는 빠져 있지만, 역대기 하권 36장 17절에, 하느님께서 "칼데아인들의 임금을 그들에게 올려 보내시어 그들 성소의 집에서 젊은이들을 칼로 쳐 죽이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그 임금의 손에 넘기신다. 

 

칼데아인들의 임금은 치드키야가 이집트에 사자를 보내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바빌론을 배반하자(에제 17,11-21),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그는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성전과 성벽을 파괴하고, 남부 유다 왕국 전체를 붕괴시킨 장본인이다.(2열왕 25,1-7)

 

한편, '모두 그 임금의 손에 넘겨졌다' 에서  '넘기다' 라는 말은 '붙이다', '양도하다', '(하느님께서)내어주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은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방인 네브카드네자르를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에제9,1-11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19)

 

성전의 유실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과 값진 기물을 파괴하고 탈취해 간 사실에 대해서는 열왕기 하권 25장 9-17절에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약탈은 여호야킴(2역대 36,5-8)시대에 있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철저했던 것 같다.(예레 39,1-8)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

 

'칼을 피하여 살아 남은 자들'이란 '칼에서 남은 자', 즉 '칼로 살해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전쟁에서 죽거나 쓰러지지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이들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예레27,7) 페르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그 중에서 몇 사람들은 상당한 지위와 총애를 받았다.(2열왕 25,27-30 ; 다니 1,19 ; 2,49 ; 4,3) 이 때 유다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압제로 인해(이사 14,2.3) 대부분 포로 초기에 낙망을 경험하고, 점점 세속화 되어 갔다. (에제33,31.3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적으로 깨어 있음과 더불어 경건했던 자들은 더욱 신앙이 성숙되어 갔다.

 

'그와 그 자손들'

 

이는 네브카드네자르와 그의 계승자들, 즉 Evil-Merodach (BC562-560), Neriglissar (BC560-556), Nabonidus(BC556-539)를 가리킨다.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는 BC 539년 페르시아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1)

 

결국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남부 유다가 포로되어 적국에 있는 동안에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은  레위기 26장 34-35절의 말씀이다.

 

"이렇게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가 원수들의 땅에 있는 동안, 땅은 비로소 제 안식년들을  줄곧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땅은 쉬면서 제 안식년을 누릴 것이다.  너희 땅은 너희가 그 곳에 살 때 안식년에 쉬지 못한 대신, 이제 황폐해 있는 동안  줄곧 쉬게 될 것이다."(레위26,34-35)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유다 백성의 70년간 포로 생활(예레25,11 ; 29,10-14)을 절망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고,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레위기 26장 34-35절을 기초로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은 온통 황무지와 폐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민족들은 일흔 해 동안  바빌론 임금을 섬길 것이다." (예레25,11)

 

"너희가 바빌론에서 일흔 해를 다 채우면 내가 너희를 찾아,  너희를 이곳에 다시 데려오리라는 은혜로운 나의 약속을 너희에게 이루어 주겠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부르며 다가와 기도하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 운명을 되돌려 주어, 내가 너희를 쫓아 보낸 모든 민족들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유배 보냈던 이곳으로 너희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 (예레29,10-14)

 

'일흔 해' 바빌론 포로 기간인데, 대체적으로 1차 포로때인 여호야킴 3년부터(다니1,1-5 ; BC605) 키루스의 조사로 인해 1차로 귀환한 시점(에즈2,1-70 ; BC536)까지로 본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BC539년부터 529년까지 왕국을 통치했다.(에즈 1,1 ; 이사 44,28) 주님께서 키루스를 일으키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케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이사야 41장 25절, 44장 28절, 45장 1-4절, 13절에도 발견된다.

 

키루스의 이같은 마음의 변화는 바빌론 포로들의 회복 정책과 지역 종교의 융화 정책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음을 움직이다' 해당되는 히브리어 '헤이르'(heir)는 '일어나다', '들어올리다',  '분발시키다' 라는 뜻의 '우르'(ur)에서 온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돋우는 것', '감동시키는 것' 가리킨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 생활 70년 후에 다시 본국으로 귀환될 것이라고 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한다.(예레25,11 ; 29,10-14)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로 반포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이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게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23)

 

본문은 에즈라기 1장 1-3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이다. 그런데 이 칙령은 BC 538년 키루스 원년에 선포되었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지 약 50년 이후의 일이어서, 연대기적으로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학자들은 몇 가지 추측을 하는데, 가장 타당성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이 본문(23절)을 역대기서의 부록으로, 이 책의 독자들 즉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희망적인 결론을  보여주기 위해, 역대기 저자가 추가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기 저자의 의도는 유다의 포로생활을 땅의 안식과 관련하여 보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왕기 저자도 여호야킨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존귀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며(2열왕25,27-30) 본서 저자의 의도와 비슷하게 희망적인 결론 맺고 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본절에서 키루스가 '예호봐'(Jehovah)라는 히브리적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키루스는 다니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예호봐(Jehovah)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히브리어의 거룩한 문학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서)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하느님을 나타내는데, 이같이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자신을 자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듯하다. 아니면 당시 사용된 외교적인 어법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전자든 후자의 주장이든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키루스가 유다의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이사44,28-45,5)  그러기에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와 하느님을 다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방의 왕들을 이용하셔서 당신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도 하고 약속을 이루시기도 하는 역사의 주인이신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예루살렘 멸망 때,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한다.(2역대36,17) 이것은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입하니까, 백성들이 대거 성전으로 피신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아마도 성전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들의 반응은 과거 반역을 시도했던 아도니아요압이 범죄하고 나서, 성소로 피해 제단 뿔을 잡은 행동을 연상시킨다.(1열왕1,51 ; 2,28)

 

그러나 그처럼 성전에 피한 그들은 바빌론의 군사들에 의해 성전 안에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들의 성전에 대한 신앙은 미신에 불과한 것임이 입증되고 말았다.

 

 

 

역대기 저자는 이런 불행한 최후에 대해서, 주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은"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2역대36,15-16)

 

백성들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곳도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잘못된 '성전 신앙'에서 벗어나 오로지 '말씀과 성체의 힘과 영성을 사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순 제4주일 복음(요한3,14~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6)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 21절까지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보내신 이유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를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란 사실과,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진리가 선명하게 비교된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밝혀진다.

 

특별히 이중에서 요한 복음 3장 16절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가장 드러내므로 사람들은 '작은 복음' 혹은 '복음서 안에 있는 복음'등으로 부른다.

 

 

 

여기서 '너무나'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 so)'이렇게', '이와 같이' 등을 뜻하는 부사로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대해 나타내신 사랑의 분량과 정도를 지시하는데,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문장의 서두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신'에 해당하는 '에가페센'(egapesen; loved)의 원형조건없는 사랑, 영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의 동사형인 '아가파오'(agapao)이다.

 

희랍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 '아헤브'(aheb)를 거의 다 '아가파오'(agapao)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아헤브'(aheb)에 나타난 사랑의 강도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애정을 말한다.

 

 

 

한편,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몬'(kosmon; world)은 일차적으로 '인류'를 가리켜 쓰였으나, 특히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될 성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구약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다는 고정관념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를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사랑을 본질로 하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당신의 신성(神性; 천주성)에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자유의지로 그것을 실천하는 계명 준수를 통항 영생의 길이었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신성(神性)에 참여하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지만, 본질이 사랑이신지라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당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마음을 풀기 위해서 당신과 위격(位格)과 레벨이 같으신 무죄(無罪)하신 외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 Redemptio)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회개)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물 한방울을 쏟기까지 자신을 사랑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믿음)은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구원(救援)과 영생(永生)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처럼 여겨진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행동하고 계심이 예수님께서 천국의 영광스런 옥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 특히 십자가상 죽음의 사건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 호 피스튜온 엔 아우토' (pas ho pisteuon en auto; whoever believes in him)는 앞선 요한 복음 3장 15절에서도 반복되는데,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

 

 

 

새 성경에서 '누구나'로 번역된 '파스'(pas)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지적되는 대상의 종류에 속하는 것을 모두 다 포함하는 '전체', '전부'의 의미이다. 둘째지적되는 대상각각의 '개체'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외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사실과 더불어,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사실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ho pisteuon)에서 '믿는'으로 번역된 '피스튜온'(pisteuon)현재 시제이므로 동작의 계속이나 반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진실한 믿음은 매일 매 순간 삶의 전과정에서 연속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지, 혹자가 생각하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한 번의 고백이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세상'이란 말은 '인류 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개인적으로 사랑하시며, 마치 사랑할 사람이 단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또한 철저히 개별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멸망하지 않고' 

 

'멸망하지'에 해당하는 '아폴레타이'(apoletai; shall perish)'아폴뤼미'(apollymi)의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 중간태이다. 

 

희랍어에서 능동태는 동작 자체를 강조하지만, 중간태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며, 동작과 주어를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말하자면, 이 문구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신, 바로 그 하느님의 목적이 잘 함축되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성부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서 '아폴레타이'(apoletai)에 이르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아폴뤼미'(apollymi)'파괴되다', '멸망하다', '죽는다'는 뜻인데, 희망의 단절과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의 처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당시에 백성이 하느님께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셨고,

 

불 뱀들이 사람들을 물어 죽이자

 

백성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하느님께서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민수 21,4-8).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이 이야기에서 ‘불 뱀’은 인간들의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구리 뱀’은 하느님의 구원과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는 행위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구리 뱀을 기둥에 달아 놓은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구리 뱀을 쳐다보아야만 했습니다.

 

쳐다보면 살고, 안 보면 죽는 것입니다.

 

그 선택과 실행은 인간들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모세의 구리 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준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 구원,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생명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사람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믿고 실천하면 생명을 얻고, 안 믿고 떨어져 나가면 멸망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믿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와

 

예수님의 활동 목적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 1서에 이 사랑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우리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목적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생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자비’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다가 멸망하게 될 인간들을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해 주신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1-32).”

 

마지막 날이 되면 ‘최후의 심판’이 있겠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은

 

인간들이 심판받고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 3,18-19).”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자다.” 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심판이라는 절차가 따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삶’이 그대로 심판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라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구원받겠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죄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선택한 대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0-21).”

 

여기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다.”입니다.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고, 숨는다고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악인들은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숨으려고만 합니다.

 

바로 그 모습이 그들의 죄와 악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5-03-15 / 사순 제4주일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박병규 신부

 

 

 

배꼽 

 

 

 

인간은 누구나 배꼽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배꼽은 우리의 기원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배꼽은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아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해 주는 표시다.

 

인간은 어떤 역경에 부딪히거나 시련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모태를 그리워한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는 편안함과 포근함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꼽을 지니는 더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 인생 여정이 나그네에 불과하며, 많은 실패와 좌절을 체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좌절을 체험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오늘날과 같은 경쟁 사회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더 많은 좌절을 체험한다. 공부를 못하면 성적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인해 좌절감에 빠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재물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인해 좌절감에 빠지게 되며, 못생긴 사람은 외모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인해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그밖에도 명예, 지위, , 권력, 건강, 재능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며 좌절의 쓰라림을 쉽게 체험한다.

 


 

이런 우리는 때때로 우리를 격려하고 지지해 줄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여 좌절을 맛보며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주셨다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거나, 공로가 있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에페소 2,8-9)  

 


 

우리가 받은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지 않고,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배신하며,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듯이 종처럼 살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같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서의 내용처럼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알렸다. 그분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려 그것을 본 사람들을 살려냈듯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가리켜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따를 때에만 그 존재 가치가 있듯이,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때에만 존재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와 같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니 우리도 선행을 통해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다. 우리의 부족함은 하느님에 의해서 극복된다. 우리는 우리 육신의 기원이 어머니께 있다는 증표로 배꼽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참 기원인 영혼의 배꼽은 어디에 있겠는가우리 영혼의 배꼽은 하느님께 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을 내주셨다.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내놓겠는가? 사순절을 반이나 넘긴 지금 생각해 볼 문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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