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왜 10년좌파독재권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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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호 [skyrights] 쪽지 캡슐

2009-06-26 ㅣ No.9698

 
 
 
 왜 이런 사실을 두고 엉뚱한 싸움만 부추겼겠는가!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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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념, 모든 믿음은 자신을 위해 쓰이는 폭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신성시한다. 양극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경향들이 맞부딪치자 명동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분쟁은 특히 명동학교의 소유권을 둘러 싸고 심화되었다. 1928년부터 이듬해까지 용정 지역의 사회주의자들 은 명동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인민학교’로 만들려고 공작 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다가 선전선동이 통하지 않자 점 점 거칠어졌다. 학예회 때 독창만 하려 해도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나 왔다.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그들은 하는 일마다 이렇게 나왔다. 학교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고 주민들의 발밑에도 이념의 지도가 그려졌다. 학교에서 조선어와 양잠 을 가르치는 송창희 선생(송몽규 아버지)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고, 면학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준명 선생은 교회 편에 섰다. 각 가정에서 도 양상은 비슷해서 윤동주의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윤동주 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사상의 가열이 부른 폭력인데, 공산당이 밤마다 복면을 하고 들어와 흉기를 들고 위협을 했다. 나중에는 적색 테 러 때문에 중국 관헌들이 경비를 섰지만 피살자가 없는 밤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문익환은 그러한 현실에 참담하게 좌절했다. 교회측은 갈수록 열세인데 윤동주랑 셋이서 삼총사처럼 어울리던 소꼽동무마 저 사회주의의 편에 서버렸다. 겨우 12세에 소학교 5학년생인 송몽규 가 서슴없이 어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한때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권위를 떨쳤던 김약연 교장도 그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 떻게든 마을을 단합시키려 애썼지만 수습은커녕 세월 유수만 통렬하 게 깨달았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 중국인의 땅에 와서 마을을 일궈낸 망명자들은 모두 죽거나 늙어 있었다. 그들의 뜻을 이어줄 지 혜와 열정을 갖춘 젊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간절한 시기에 문재린이 하필 캐나다에 있었다. 김약연 선생은 뼈아프게 무너졌다.

“문재린만 있어도 한 번 싸워보겠는데, 이겨보았자 학교를 맡길 젊 은이가 없어서….”

일제가 그토록 개명시키려 했던 이름 명동(조선을 밝힌다는 뜻)만이 라도 살리기 위해 학교 경영권을 넘겨줬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 노구 의 몸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멀리 평양까지 가서 장로교 신학교에 입 학해버렸다.

이윽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었다. 아침마다 예배를 보던 시간 도 없어졌다. 사회주의 청년들에게 미움을 받던 한준명 선생님도 쫓 겨났다. 단순한 자연부락이 아니라 하나의 ‘항일애국단체’라고 칭 송되던 명동공동체도 해체의 길을 밟아갔다. 이것이 문익환이 체험한 최초의 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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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뀐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았 다.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縣立) 학교로 강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북만주 산지(山之) 역전에서 김좌진 장군 이 피살되었다. 암살자는 공산당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주 의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문익환도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 에 질려버렸다. 그때의 분위기를 한준명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점점 살벌해져갔습니다.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그 애들이 헌 찝차 같은 걸 타고-그때 벌써 그런 게 있었어요-지나간 뒤엔 일껏 추수해 서 쌓아놓은 곡식 낟가리에서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는 거예요. 지 나가면서 낟가리에다 불씨를 던져놓은 거지요. 경찰력이 그걸 막지 못했어요. 그걸 잡으려고 중국수비대가 뒤늦게 쫓아가며 또 한바탕 북새를 쳤지요. 나는 결국 1930년 12월 30일에 명동 마을을 아주 떴 습니다. 이미 공산당 사형선고 명단에 올라 있었고, 더 이상 있다가는 정말 일을 당하겠다고 부모님이 성화를 하셨지요.(...)그 후 다신 간도 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치안이 유지되는 곳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임시로 거처들을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집을 팔고 나중에는 송두리째 마을을 떴다. 문익환네는 1931년 초에 용정 으로 이사했고, 윤동주네는 같은 해 늦가을에 용정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교회도 주인을 잃었다. 돈도 명망도 없는, 아무것도 갖지 못해서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만이 예배당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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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둥이로 패 죽이고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





[....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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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910&C_CC=AZ


6.25 手記/초등학생이 본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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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칼에 찔려 밭고랑에 처박혀 있는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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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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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들이 김근호씨 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여인의 친정 아버지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빨치산들은 당장 친정 아버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여인의 시댁 식구들 뿐만 아니라 숨겨준 집 식구들까지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때까지 빨치산들의 행태를 보아온 여인은 빨치산들의 위협이 단순한 위협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느 쪽의 죽음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해산기도 가시지 않았던 여인의 선택은 친정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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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산당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잘못 걸리면 온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까. 운이 있으면 살고 운 없으면 죽고, 그 사람들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어』


현재 백수면 길용리에 사는 전계선(62)씨도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밤손님」(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만 10세였다. 당시에도 그는 백수면에 살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전씨는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 보였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한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다.



좌익 스승이 「반동」 제자를 죽이다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한 한참 후의 일이다. 백수 동초등학교에는 金모라는 교사가 있었다. 金교사는 음악을 잘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온 후 金교사는 본색을 드러냈다. 좌익이었던 것이다.


전씨가 동네 어귀 고구마밭 부근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다. 金교사가 한 아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용리에 사는 2학년 아니면 3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였다. 전씨와 함께 놀던 아이들은 金교사가 끌고 오는 아이가 「반동」의 가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씨는 그때 끌려오던 아이의 표정이 어땠는지, 몸짓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전씨가 눈을 떴을 때 金교사는 자신이 끌고 온 아이를 칼로 찌른 후 고구마밭 고랑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전씨는 다리를 후드득 떨었다. 金교사의 목소리가, 6·25 전쟁 前에 학교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토록 멋지게 들렸던 목소리가 귀신의 음성처럼 웅웅 울렸다.


金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칼에 찔려 밭고랑에 처박혀 있는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돌을 들었고 전씨도 돌을 들었다. 전씨는 그때 자신이 들었던 돌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전씨가 던진 돌은 힘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도망을 가면 경찰의 앞잡이로 몰려서 가족들을 죽일 텐데 도망을 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우리 백수면 사람들은 피란을 가면 밤손님들한테 반동으로 몰리고, 피란을 안 가면 경찰들에게 빨치산 앞잡이로 몰리던 상황이었어요.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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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형식적이지만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을 했어요.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죽였어요. 주로 군경 가족들이 희생됐죠.


빨치산들은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죽였어요. 나도 네댓 번 우익 쪽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있었는데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어요. 학살 후 구덩이에 묻기도 했지만 개울에 버린 시체도 많았어요.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구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때는 무덤덤하게 죽이라면 죽였어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백수면에서 우익 인사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최모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칼을 사용했어요.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우익 쪽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날도 최모씨는 칼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칼에 묻은 피를 빨아먹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기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했던 우리들도 전율을 느낄 정도의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빨치산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어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식구가 몽땅 죽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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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명부 발견

靈光 대학살 2만1225명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 ksdhan@chosun.com )

월간조선 2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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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910&C_CC=AZ


6.25 手記/초등학생이 본 인민재판


이용범





초등학교 3년生이 본 인민재판의 모습


몽둥이로 사람을 패죽이다




몽둥이로 때려죽인 시체를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 놓았다. 때려죽인 놈들은 인민재판을 구경나온 주민들에게 그 시체를 밟고 가도록 했다

이 용 범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읍내에서의 연극 구경


나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미곡리 277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윗마을, 아랫마을 합쳐 30여 호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장신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장전리 소재·그 당시에는 간이 학교였음)에 입학하여 10여 리 길을 산과 들길을 따라 등교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던 날(1950년 8월30일)은 내일로 다가왔고 나는 밤잠을 설친 채 일찍 일어나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급우들과 함께 선생님의 인솔하에 읍내 학교를 향하여 산과 들길을 따라 즐겁게 10여 리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에 비행기가 지나가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들은 풀숲에 숨기도 하며…. 이곳 저곳 각 동네에서 농악대를 앞세우고 흥겨운 농악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따르고 있었다. 나는 더욱 더 흥분이 되었다. 처음으로 읍내에 있는 학교로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다.

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집에 오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조금은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자리에 우리 아버지가 참변을 당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변하여 있을까?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대한 청년단 단장으로 계시면서 동네 청년들을 모아 놓고 넓은 광장에서 훈련을 지휘하셨기에, 1차 연극에서 호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차분히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죽든 살든 도망가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그 자리에 계셨던 본인(아버지)은 얼마나 마음 조이셨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며 10년은 감수하셨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 달 9·28 수복이 되면서 2차 명단에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과 2차 연극이 또 우리 학교에서 있을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수복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감격적인 일이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여기서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것은 이 연극을 주도한 사람들이 인민군이 아닌 이웃한 마을에서 살며 안면이 있는 자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 2005-11-24, 09:26 ] 조회수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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