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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 사도행전 5,31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번역오류] 1644_metanoia 912_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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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ㅣ No.1644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다음은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의 사도행전 5,31 전문인데,

 

(발췌 시작)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이 절의 전후 문맥 안에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라는 번역문이 전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요???

 

특히, "받개 하셨습니다" 라는 번역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예를 들어, 과거 완료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즉, 이스라엘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5,31에서 발언할 그 당시에, 예를 들어,

(i)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이전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혹은 

(ii) 무조건적으로(unconditionally)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인지요???

--------------------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 다음은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의 사도행전 5,31 전문인데,

 

(발췌 시작)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이 절의 전후 문맥 안에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라는 번역문이 전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요???

 

특히, "받개 하셨습니다" 라는 번역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예를 들어, 과거 완료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즉, 이스라엘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5,31에서 발언할 그 당시에, 예를 들어,

(i)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이전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혹은 

(ii) 무조건적으로(unconditionally)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인지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명백한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기존의 "받개 하셨습니다"  대신에 "받을 수 있개 하셨습니다"  로 번역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사도행전 5,31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5,22-33)다해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5,27ㄴ-32.40ㄴ-41) 에 포합됩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6495&gomonth=2015-04-16

(발췌 시작)

27 그들이 [즉, 경비병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1: 다음은 1977년에 초판 발행된 공동번역성서사도행전 5,31 전문인데, "새 번역 성경" 의 대응하는 절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gubun=new&code=51&JangNo=
5&JangSum=28

(발췌 시작)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1-2. 매년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5,22-33) 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는데, 사도행전 5,31에 대한 해설/설명은, 굳이 주석을 제시할 필요가 없기 떄문인 듯, 주어져 있지 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2_thu.htm

 

그리고 다음은 바로 위의 주소에서 발췌한 RSV(Revised Standard Version)의 사도행전 5,31 전문인데, 그러나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의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문과 결코 자구적 등가(literal equivalence)의 문장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발췌 시작)

[31] God exalted Him at His right hand as Leader and Savior, to give repentance to Israel and forgiveness of sins.

 

[31] 하느님께서는 영도자와 구원자로서 그분을 당신의 오른손 쪽에 들어 올리셨는데,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들에 대한 용서를 제시(提示)하기 위하여서(to give) 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졸번역 끝)

 

게시자 주 1-2: 만약에 사도행전 5,31, 이 바로 위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번역문처럼, 우리말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었더라면, 질문 1은 전혀 제시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1-3.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사도행전 5,31 전문인데, 위의 RSV 와 대동소이한 번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Z.HTM

(발췌 시작)

God exalted him at his right hand 5 as leader and savior to grant Israel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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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At his right hand: see the note on Acts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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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1-4. 그리고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측 일부 성경들의 사도행전 5,31은 다음에 있는데, 그러나 번역문이 동일하지 않고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bskorea.or.kr/infobank/korSearch/korbibReadpage.aspx?version=GAE&readInfo
=%uD589%205%3A31&cVersion=SAE^SAENEW^&fontString=12px&fontSize=1#focus
 

(발췌 시작)

(1961년에 초판 발행된 개역한글판 사도행전 5,31)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1998년에 초판 발행된 개역개정판 사도행전 5,31)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1993년에 초판 발행된 표준새번역 사도행전 5,31)
31 이분을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쪽에 높이 올리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2001년에 초판 발행된 새번역 사도행전 6,31)
31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1-4. 다른 한편으로, 여러 영어본 성경들의 사도행전 5,31은 다음에 있는데, 그러나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공동번역성서의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문과 자구적 등가(literal equivalence)의 문장이 결코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http://biblehub.com/acts/5-31.htm

 

게시자 주 1-4: 그리고 그리스어 사도행전 5,31은 다음에 있는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공동번역성서사도행전 5,31번역 오류임을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biblehub.com/lexicon/acts/5-31.htm

http://biblehub.com/interlinear/acts/5-31.htm

http://biblehub.com/text/acts/5-31.htm 

 

1-5. 특히, 다음의 GNB(Good News Bible)사도행전 5,31을 보면,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공동번역성서사도행전 5,31번역 오류임을 또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Acts+5%3A31&version=GNT

(발췌 시작)

31 God raised him to his right side as Leader and Savior, to give the people of Israel the opportunity to repent and have their sins forgiven.

 

31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세주로서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그리고 그들의 죄들이 용서받을 기회를 제시(提示)하기 위하여서 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19일] 

게시자 주 1-5: 혹시라도, 바로 위의 제1-5항에 발췌된 GNB 사도행전 5,31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분들은 다음의 제1-6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1-6. 다음은 2002년 2월 12일자 교황청 성경위원회 문헌 [제목: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 있는 유다 백성과 그들의 성경 본문들(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BLE), 제32항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췌한 것인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공동번역성서사도행전 5,31번역 오류임을 또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uments/
rc_con_cfaith_doc_20020212_popolo-ebraico_en.html

(발췌 시작)

The title Saviour is above all attributed to the risen Jesus, for, by his resurrection, “God exalted him at his right hand as Leader and Saviour that he might give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하느님께서는, 그분께서 회개와 죄들의 용서를 제시(提示) 수도 있도록, 그분을 영도자와 구세주로서 당신의 오른손 쪽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Ac 5:31). “There is salvation in no other” (4:12). The perspective is eschatological. “Save yourselves” Peter said, “from this corrupt generation” (Ac 2:40) and Paul presents the risen Jesus to Gentile converts as the one “who rescues us from the wrath that is coming” (1 Th 1:10). “Now that we have been justified by his blood, much more surely will we be saved through him from the wrath” (Rm 5:9).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5년 6월 19일자 내용 추가 끝]

 

2. 

2-1. 다음은, 2010년 4월 15일자 교황청 성경위원회 위원들과의 미사 중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 말씀 중에서, 사도행전 5,31에 대한 해설/가르침을 발췌한 것입니다.

 

게시자 주 2-1: 이 해설이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사도행전 5,31의 해설로서 국내의 교우님들게 결코 제공될 수 없음은, 우리말본 성경인 "새 번역 성경" 공동번역성서 사도행전 5,31이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또한 입증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영어본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homilies/2010/documents/
hf_ben-xvi_hom_20100415_pcb.html

프랑스어본 촐처: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fr/homilies/2010/documents/
hf_ben-xvi_hom_20100415_pcb.html

(발췌 시작)

Arrêtons-nous encore sur un verset:  le Christ, le Sauveur, a donné à Israël la conversion et le pardon des péchés (v. 31) - dans le texte grec le terme est metanoia - il a donné la pénitence et le pardon des péchés. Cela est pour moi une observation très importante:  la pénitence est une grâce. Il existe une tendance dans l'exégèse qui dit:  Jésus en Galilée aurait annoncé une grâce sans condition, absolument sans condition, donc également sans pénitence, une grâce comme telle, sans conditions humaines préalables.

 

Next let us reflect further on this verse: Christ, the Saviour, gave to Israel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v. 31) - in the Greek text the term is metanoia - he gave repentance and pardon for sins. This to me is a very important observation: repentance is a grace. There is an exegetical trend that states that in Galilee Jesus would have proclaimed a grace without conditions, absolutely unconditional, therefore also without penitence, grace as such, without human preconditions.

 

그 다음으로 바로 이 절[즉, 사도행전 5,31]에 대하여 한층 더 숙고(熟考)하도록/곰곰이 생각하도록(reflect on) 합시다: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와 죄들에 대한 용서를 제시(提示)하셨습니다(사도행전 5,31) -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용어는 metanoia (*1) 입니다 - 그분께서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와 죄들에 대한 사면(pardon)을 제시(提示)하셨습니다. 저에게 바로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한 개의, 대단히 중요한, 관찰에 근거한 서술(observation)입니다: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는 어떤 은총(a grace)입니다.(*2)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어떤 [성경] 해석적 경향(an exegetical trend)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은총을 조건들 없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그리하여 또한 참회(penitence) 없이, 그러한 것으로서 은총을, 인간의  전제 조건(human preconditions)들 없이, 이미 선포하셨을 것이다(would have proclaimed).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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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그리스어 용어 metanoia 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의 제3-5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4_metanoia_MCD.htm

 

(*2) 번역자 주:

(1)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전후 문맥 안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27항2010항에서 말하는 "최초 은총(the initial grace)"가톨릭 교회 교리서 1989항에서 말하는 은총의 첫 번째 노동(the first work)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생각이다. 최초 은총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11.htm [최초 은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25_initial_grace_CCC2027.htm [하느님의 은총, 최초 은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htm [최초 은총, 트리엔트 공의회]

 

(2) 그리고

(i) 회개가 은총임을 말하는 "회개라는 은총(the grace of repentance)" 이라는 표현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32항의 발췌 인용문에서 언급되고 있고,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2s2c2a4.htm#1432

 

(ii) 회심이 은총임을 말하는 "회심이라는 은총(the grace of conversion)" 이라는 표현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37항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2s2c3a7.htm#1637

 

(iii) 그리고 용서 및 의화가 초기 은총임을 말하는 "용서 및 의화라는 초기 은총(the initial grace of forgiveness and justification)" 이라는 표현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에서 언급되고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3s1c3a2.htm#2010

 

(3) 다른 한편으로, 미사 중의 영성체가 우리에게 수여하는 은총의 종류들에 대한 나열은 다음에 있으니 또한 참고하라:

http://www.therealpresence.org/archives/Mass/Mass_008.htm

http://www.therealpresence.org/archives/Sacraments/Sacraments_0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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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6월 19일자 내용 추가 끝]

 

Mais il s'agit là d'une fausse interprétation de la grâce. La pénitence est grâce; c'est une grâce que nous reconnaissions notre péché, c'est une grâce que nous reconnaissions avoir besoin de renouvellement, de changement, d'une transformation de notre être. Pénitence, pouvoir faire pénitence, est le don de la grâce. Et je dois dire que nous chrétiens, également ces derniers temps, nous avons souvent évité le mot pénitence, il nous paraissait trop dur. A présent, face aux attaques du monde qui nous parle de nos péchés, nous voyons que pouvoir faire pénitence est une grâce. Et nous voyons qu'il est nécessaire de faire pénitence, c'est-à-dire de reconnaître ce qui ne va pas dans notre vie, s'ouvrir au pardon, se préparer au pardon, se laisser transformer.


But this is a false interpretation of grace. Repentance is grace; it is a grace that we recognize our sin; it is a grace that we realize the need for renewal, for change, for the transformation of our being. Repentance, the capacity to be penitent, is a gift of grace. And I must say that we Christians, even in recent times, have often avoided the word penitence, it seemed to us too difficult. Now, under the attacks of the world that speak of our sins, we see that the capacity to repent is a grace. And we see that it is necessary to do penance, that is, to recogn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open ourselves to forgiveness, prepare ourselves for pardon by allowing ourselves to be transformed.

 

그러나 이것은 은총에 대한 한 개의 거짓 해석입니다.(*3)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은총이며,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어떤 은총(a grace)이고, 그리고 우리가 갱신(renewal)에 대한, 변화(change)에 대한, 우리의 있음(being)의 변모(transformation)에 대한 필요(need)를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어떤 은총입니다.(*4)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 참회할 수 있는 역량/수용력(capacity to be penitent, pouvoir faire pénitence)은 은총(grace)(*5)이라는 한 개의 선물(a gift of grace)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 최근의 시기들에 있어서도, 참회(penitence)라는 단어를 자주 피해 왔는데(have avoided),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too) 힘들기 때문인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말하는 이 세상의 공격들 아래에서, 우리는 참회할 수 있는 역량/수용력(pouvoir faire pénitence)어떤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참회하는 것(faire pénitence, do penance), 즉, 우리의 삶들에 있어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아차리고, [하느님의] 용서 쪽으로 우리 자신들을 개방하여, 우리 자신들이 변모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사면(pardon)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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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역자 주: 바로 이 잘못된 해석 때문에, 위의 제1항에서 지적한 번역 오류가 1970년대에 국내에서 공동번역성서가 마련되는 과정에서 처음 발생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4) 번역자 주:

(1)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여기서, 소위 말하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capax Dei(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수용력)" 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55.htm  <----- 필독 권고

 

(2) 사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부(Part One) 신앙 고백, 제1세션(Session One) 저는 믿나이다 - 우리는 믿나이다에서, 제1장(Chapter One)의 제목은 Man's Capacity for God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역량/수용력, HOMO EST DEI "CAPAX") 인데바로 이 "capax Dei(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수용력)" 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6항의 마지막 문장에서 함축적으로(implicitly) 언급되고 있는 "Credere Deum(信天主)"(제1장), "Credere Deo(信賴天主)"(제2장), et "Crede in Deum(信仰天主)"(제3장)에서, "Credere Deum(信天主)" 의 신학적 기초/근거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3) 그리고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에 의하여 구분된, 이들 "Credere Deum", "Credere Deo", et "Crede in Deum"의 커다란 차이점들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제목: 믿다believe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제목: IIa IIae q2 믿음(faith, 신덕, 신앙)의 내면적 행위] <----- 필독 권고

 

(*5) 번역자 주: 하느님의 "은총" 은 하느님의 "선물(gift)" 이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은총(grace)"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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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6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La douleur de la pénitence, c'est-à-dire de la purification, de la transformation, cette douleur est une grâce, car elle est renouvellement, elle est l'œuvre de la miséricorde divine. Et ainsi, les deux choses que dit saint Pierre - pénitence et pardon - correspondent au début de la prédication de Jésus:  metanoeite, c'est-à-dire convertissez-vous (cf. Mc 1, 15). Cela est donc le point fondamental:  la metanoia n'est pas une chose privée, qui semblerait remplacée par la grâce, mais la metanoia est l'arrivée de la grâce qui nous transforme. Et, enfin, une parole de l'Evangile nous dit que celui qui croit aura la vie éternelle (cf. Jn 3, 36). Dans la foi, dans cette "transformation" que la pénitence apporte, dans cette conversion, sur cette route de l'existence, nous arrivons à la vie, à la vraie vie.

 

The pain of repentance, of purification and of transformation this pain is a grace, because it is renewal, it is a work of divine mercy. And thus these two things of which St Peter speaks repentance and forgiveness correspond to Jesus' initial preaching: metanoeite, in other words, "repent" (cf. Mk 1: 15). Therefore this is the fundamental point: metanoia is not a private affair, which appears to be substituted by grace, but rather metanoia is the advent of grace that transforms us. And in conclusion, one word of the Gospel, in which we are told that whoever believes [in the Son] will have eternal life (cf. Jn 3: 36). In faith, in this "transformation" that repentance brings, in this conversion, in this new way of living, we arrive at life, at real life.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의, 즉, 정화(purification)의 그리고 변모(transformation)의 고통(pain), 바로 이 고통은 어떤 은총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갱신(renewal)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의 어떤 노동/일(a work)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에 대하여 성 베드로(St. Peter)가 말하는, 이들 두 사물들인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와 용서(forgiveness)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초기 설교에 대응합니다: metanoeite, 달리 말하여, "회개하라(repent)" (마르코 복음서 1,15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요지입니다: metanoia 는, 은총에 의하여 대체되는 듯한, 어떤 사적인 막연한 일(affair)이 아니고, 오히려 metanoia 우리를 변모시키는 은총의 도래(advent)이며, 그리고, 끝으로, 이 복음[즉, 그리스도의 복음](*6)이라는 하나의 말씀(one word of the Gospel)인데, 그 안에서 [아드님 쪽으로] 믿는 자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장차 가질 것(요한 복음서 3,36 참조)임을 우리가 듣게 됩니다. 신앙(faith) 안에서, 참회(pénitence)/회개(repentance)가 가져다주는 바로 이 "변모(transformation)" 안에서, 바로 이 회심(conversion) 안에서, 삶에 있어서의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방식 안에서, 우리는 생명(life)에, 실제 생명(real life)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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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번역자 주: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즉, the Good News of Christ)"은,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하느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를 말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LG), 제5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63항].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8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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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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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10시간 [우리말 번역 및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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