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0주일(가해) 마태 15,21-28; ’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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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8-03 ㅣ No.5485

연중 제20주일(가해) 마태 15,21-28; ’23/08/20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대하신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다소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유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그리고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라고 잘라 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이 진정 있을까? 당시의 풍습대로 이방인이 유다교인으로 개종할 경우 어느 정도 그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2등 국민으로서의 대기자였습니다. 유다교는 유다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이방인이 유다교로 개종하면 구원의 여지는 남겨주겠다는, 일종의 종교적 개방성을 보여 주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유다교로 개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아예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가톨릭 교회의 초기 교부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가톨릭 교회 교리서 846, 이하 교리서)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세 말기에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가 창궐하여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할 때, 이를 막기 위한 한 방편으로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까지 선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는 비그리스도교 선언을 통해,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2) 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형태, 보편적 형제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요한 4,8)”(5)

 

현대의 대표적인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 신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더라도,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와 비슷하게 사는 이는 비록 세례는 안 받았더라도 이미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구원대열에 들어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847)라고 선언합니다.

 

교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유효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라고 말하고,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교리서 2283)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며, 성찬전례 감사기도 제4양식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주님만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들도 모두 생각하소서.”라고 기원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움직임은 세상의 종말을 미루시는 하느님에 대한 성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충분히 연상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다시 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가나안 여인은 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 딸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자신이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 유다인만을 그 재생의 대상으로 삼겠다는데, 자신이나 자신의 딸이 유다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그 절망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왜 유다인들만 구원해 주어야 하느냐?’고 주님의 구원 대상 선택에 대한 부당성을 따지거나, 주님의 차별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자존심을 굽혀가며, 비굴하리만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

 

그러자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그 부탁을 들어주십니다. “,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서 바라보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 믿음은 나도 주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당당한 하느님 백성입니다라는 정당한 탄원이 아니라, 비록 제가 지금 주님의 규정과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저와 제 딸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백성이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십시오라며, 자신의 정당성 주장보다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대상인 하느님 백성이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청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구원의 좌석을 확약받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기자라는 것을!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이 우리의 공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신앙 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이렇게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실행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아왔어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또 죄까지 지었사오니,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주소서. 아멘.”

 

,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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