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가시나무새의 울음-침묵을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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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daram77] 쪽지 캡슐

2000-03-11 ㅣ No.587

제목을 통해 짐작하셨겠지만, 이 글은 최근에 게재된 일련의 논의에 대한 저의 '마지막' 발언이 될 것입니다.(빈한한 지식과 신앙의 한계상, 더 할 말이 없습니다.)가시나무 새는 일생에 단 한번,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고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요. 제 글이 그렇게 아름다운 글이라는 뜻은 아니고...(혹 조성모씨의 최근 소식을 기대하셨던 분이라면 이쯤에서 <닫기>를 눌러주시고요, 아니라면 끝까지 차근차근 보아주셨으면 해요. 꼭요. 3분도 안 걸릴걸요.)

 

제가 여태까지 말씀드렸던 것은 반페미니즘적인 여성사제불가론이라기보다는 여성사제 무의미론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첫번째, 두번째의 글에서는 물론 여성사제에 대한 논의를 막아버리고자 하는 듯 보이기도 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신앙자세를 되돌아보자는 의미였고, 세번째의 글에서 말씀드린 것은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여성사제를 굳이 내세우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를 system으로 봅니다. 그것도 여러개의, 여러층의, 여러 성질의 system들이 서로를 포함하고, 배척하고,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겹쳐지고 하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총체적인 system('계'라고 해도 무방하지요)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세계를 단순한 하나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내에서 이루어지는 feminism논의는 사회적인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근본 잣대로 하여 세간에서 이루어지는 feminism논의와 차별을 두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과연 민주주의가 만능의 잣대입니까?

 

평등을 기본가치로 하는 민주주의는 사회의 필요에 따라 발전되어 온 이념일 것입니다. 애초에 종족보호와 편의 추구의 목적으로 사회를 조직한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분화되는 계층이 계급화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또 이에 형성된 노멘끌라뚜라들의 '권력-욕망-쾌락'(푸코가 말하는)원칙에 의거한 육체와 정신의 조작에 의해 생겨난 남-녀의 차별화 현상에 대항하여 본래의 사회조직의 취지인 '구성원들이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사회를 만들고자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이지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성공하고 있습니까? 역사상 단 한 시점이라도 인류 전체에 대한 박애의 이념은 실현된 것이 없고,  시민권의 보장을 위해서 대다수인 '비시민'들을 배제하는 과정에 민주주의는 서 있지 않았습니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웃지는 마시지요.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항상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자신의 실체로 꼬리처럼 끌고 다녔습니다...) 이런 것도 문제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그 근본적인 이념에서 충분히 구현한다 하여도, 교회의 질서에 그대로 (이 말은 빼도 무방합니다.)대입하는 게 옳은가.

 

교회는 서로 다른 두 개의 system을 공유합니다. 하나는 세계--존재('인간')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system이고, 또 하나는 인간과 신 사이에 만들어지는 system입니다. 교회에 애초 성적인 불평등이 있었습니까? 교회구조를 만들면서 세계--존재들의 서로간의 끊임없는 관계맺음은 교회에 사회적인 '구조'를 만들었고, 이는 여성차별, 빈자에 대한 외면, 정치에의 편승, 독점체제의 유지 등 많은 사회적인 '구조악'들을 받아들였지요.  여기에 사회적인 메스가 가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제의 문제는 다르다고 봅니다.

'사제'를 누가 뽑아 세웁니까?

전세계에 산재한 신학대학교의 교수진입니까? 우리 주교님입니까?  (인간적인)교회입니까? 사제는, 성모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의 역설을 닮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제는, 하지만 하느님이 뽑아 세우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고해소에서 누구에게 고백을 합니까. 어제 저녁에 같이 술마시며 농담을 주고받던 '우리 신부님'에게 합니까? 아닙니다. 고해소에 앉아 계신 분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여러분의 고백을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저 이는 누구입니까? 노래방에서 호탕하게 '아빠의 청춘'을 부르던 그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요컨대, 평신도 회장이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문제가 사제가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느냐 하면, 그 두 물음은 서로 다른,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 문제들이라는 답변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께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예수를 믿는 열성적인 베드로입니다.'라고.

 

예수님은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에게, 순수하게 교회적인 문제에도 한사코 들이밀어지는 '사회정의'의 눈먼잣대는 '죽은 사람의 장례'와 같지 않을까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종교적인 이유로 세속의 질서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질서와 교회적인 질서가 분명히 서로 다른 질의 길을 걷고 있는 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교회적인 질서에 마저 사회적인 기준을 들이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를 말살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양극이 존재할 때만 중용은 존재하는 거지요. 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해선 오스트리아의 하이더도 필요하고 그에게 노골적으로 등을 돌린 벨기에의 총리도 필요합니다. 중용만이 남을 때, 그것은 절충주의와 근본주의라는 또다른 극을 형성하게 마련입니다. 제가 헤겔의 변증법적인 사관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서두....그리고 밑에 있는 '김신'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교회의 페미니즘 문제를 '여성사제'에 국한시켜 서로 감정을 '상해가며' 피튀기는 설전을 벌일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교회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그 긍정적인 노력과 결과를 사회로 번져나가게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밥그릇 싸움'으로 비유하시는 분께는 제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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