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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적인 여성해방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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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1-27 ㅣ No.475

4.남은 질문들

 

그래도 질문은 남을 것입니다. "남성에겐 사제직이라는 소명을 주셨는데 왜 여성에겐 그것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남성과 여성에 차별을 두셨다는 것인가? 여성은 아무 것도 아닌가?"하는 물음말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관한 답변을 가톨릭 교회의 은사에서 출발하고 싶습니다.

 

 

*교회론적 여성해방론

 

1.공동의 이익

 

사도 바오로께서는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1고린12,1-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하고자 하나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선택해서 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각자에게 내려주시는 은총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것을 하고 싶은데 왜 주님은 저 사람에게만 능력을 주시고 내겐 그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인가!"하며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모두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은 또 무상으로 하느님나라 건설에 이바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은총을 주신 것은 서로 연대하라는 뜻입니다. 각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는 반면에 부족함을 주심으로써 이웃을 필요로 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서로를 돕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차별이란 없습니다. 발가락이라는 소명이 맡겨졌다 해서 얼굴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으며 얼굴이 맡겨졌다 해서 발가락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신분은 다를 것이나 교회에 이바지하는 기능과 임무에 대한 가치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신비체인 교회에서의 기능과 임무의 차이를 세상것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류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엄연히 같은 사람이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입니다. 여성과 남성을 이렇게 같으나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둘이 서로 필요로 하게 하며 돕게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결코 불평등함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비록 "다름"으로 인해 서로에게 주어지는 "일"은 같을 순 없을 것이나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차별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로써 예를 들어봅시다. 한 생명을 창조하는 데 있어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다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생명의 창조를 위해 여성과 남성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한 생명을 가지고 어느 여성이나 남성이 자기 혼자 아이를 낳았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여성과 남성이 "생명"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 필요로 하며 서로 돕게 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의 이익(생명)앞에서 자신이 한 일이 상대방보다 월등하거나 열등하다는 불평등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맡았던 생명에 관한 역할이 부러워 그것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한 역할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혼자 하겠다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내려주신 각자의 은총에 대해 누가 가타부타 토를 달수 있겠습니까.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사람은 감사하게 받아드릴 뿐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진 상대방을 축복하고 존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격적인 관계는 생명의 창조라는 주님의 역사를 가능하게 해 주고 여성과 남성은 가정이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상으로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사 안에서의 남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있는 자 없는 자의 차이는 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누구는 주교가 되고, 누구는 사제가 되고, 누구는 수도자가 되고, 누구는 평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누구는 사제가 되는 은총을 주셨는데 나는 평신도로 남게 하셨습니까."하며 항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교회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신 것이며 사람은 각자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아름다운 공동체를 무상으로 봉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성과 남성에게 각기 서로 다른 은총을 주심으로써 서로 돕게 하셨습니다. 남성에게는 사제직을, 여성에게는 그에 못지 않은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은총을 주심으로써 서로 필요로 하며 돕게 하여 공동의 이익을 구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럼, 이 즈음에서 여성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회에서의 여성의 소명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많은 교부들께서 말씀하셨듯이 신부이며 어머니이고 여성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의 여성성의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사제직이 대두되는 이유나, 자신의 소임이나 자리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2.잊혀져 가는 여성의 소명

 

교회에서의 여성해방을 말하는 분들께서는 "교회에서 여성의 숫자가 월등히 많고 하는 일도 많은데 사제를 비롯하여 사목회의 중요직책들은 남성들이 차지한다. 그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교회의 허드렛일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들만이 주어지는 것은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파생된 억압과 불평등이다."라고 항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하고 있는 일은 남성들이 하는 일과 비교해 볼 때 전혀 가치 없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때는 남성의 직무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1고린12,22)

 

성당을 청소하며, 행사 때마다 음식을 만들고 설걷이를 하는 어머니들의 모습, 그리고 성당에 찾아와 기도하시는 등 굽은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저는 풋풋한 감동을 받곤 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이 사제직이나 평신도협의회에서의 아버지들께서 하시는 일과 비교해 볼 때 그 이상의 것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일에 대해 가치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저마다의 일을 해 나가는 모습에서 어떻게 우열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 보면 우열을 따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비교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불만을 터뜨리고, 또 남성은 사제와 비교하여 불만을 터뜨립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상실해 가면서 상대방의 은사를 넘보게 된 것입니다. 좀더 폼 나고, 좀더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좀더 자신이 똑똑함을 내세울 수 있는 일을 찾게 되면서 교회에서 잔일을 할 사람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명제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잔일을 할 사람을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교회에 생명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잔일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좀더 나은 일들과 비교해서 결코 뒤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작은 길을 묵상해 봅시다. 그녀는 "수도원에 떨어진 작은 옷 핀을 하나 줍는 것은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교회에서 해왔던 일들, 교회의 평신도들이 해왔던 일들은 단순히 빨래, 청소, 설걷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구하는 행위였습니다. 사제가 성사로 한 영혼을 구원하듯이 여성들은 그들의 볼품없는 일을 통해 영혼들을 구해 왔던 것입니다. 비록 표면상의 주어진 일들이 사제와 여성이 각기 다르긴 했지만 궁극적으론 모두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묵묵히 실천했던 많은 여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동정녀들과 성녀들. 그녀들이 없었다면 가톨릭 교회는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고아원, 빈민구호, 의료사업에 바쳐진 그녀들의 동정과 젊음으로 인해 예수님의 복음이 인류에게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또 어떻습니까. 비록 사제는 아니었어도 동정을 지키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훌륭히 실천한 무명성인들. 사제가 먹고 살 기도를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신 분들. 바로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모두가 사제가 되길 원했다면, 사제로서 일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교회엔 기쁨은 사라지고 질투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비록, 사회적, 종교적인 힘은 없었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영성.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나아가 사제에게까지도 해당되는 이 영성이 바로 잊혀져 가는 여성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명과 타인의 소명과 비교하여 불평등하다는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불만의 대상은 결국 사제에게 초점이 맞혀집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남성은 사제에게, 사제는 주교에게. 오늘날 유행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현대적인 사상인 여성사제직, 평신도성직자, 민주주의에 입각한 주교투표제 등은 이러한 불만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너무 좋아하진 마십시오. 역사상 교회를 박해하던 이들의 내세웠던 것이 바로 자유와 평등입니다. 프랑스대혁명을 기억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구호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그리고 교회는 또 얼마나 심한 박해를 받았는지를....

 

 

3.성서에서의 여성의 소명

 

그러므로 교회는 잊혀져 가는 여성의 소명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소명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서로 가봅시다. 우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영성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비천한 창녀의 신분으로 베드로 사도도 씻겨드리지 못했던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도로 뽑으셨으며 마리아에겐 발 씻김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엔 차별이 없습니다. 비록 다른 행동을 허락하셨지만 예수님께 같은 기쁨을 줄 수 있는 소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가 사도베드로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가치의 경중을 따지려 할 것입니까. 누가 마리아의 행동이 굴종적이며 보잘 것 없고 여성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로니카 성녀를 생각합니다. 누가 그분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있었습니까. 어느 남성에게 그런 은총이 주어졌습니까. 비록 그녀는 사도라는 부름에 제외되었던 여성이었지만 침과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릴 은총을 허락 받습니다. 사도직과 비교하여 전혀 뒤쳐지지 않은 소명이 한 여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로마병정의 무력과 유다인들의 조소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소명을 다하신 베로니카 성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용기있는 여성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위해 울어준 많은 여성들을 생각합니다. 어느 남성도 그런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여성들에게 사제직을 주시지 않으셨지만 그에 못지 않은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여성만의 아름다운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성모마리아의 영성을 생각합니다. 가난한 시골 소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겸손되이 순명하십니다. 오늘날 여성을 비롯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겸손과 순명이라고 믿습니다. 성모님은 순명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사회의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으신 채 자신의 "태" 안에 예수님을 기꺼이 모십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와 평등을 하느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버리겠다는 뜻이며 문화, 사회적인 억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한 순명은 해방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낙태를 합법화한 여성해방론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여성의 모습이셨던 것입니다.(페미니즘의 가장 큰 모순은 낙태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성모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천사의 방문에 "저도 역시 이스라엘의 해방을 바라지만 저는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것보다는 이걸 하면 안될까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겸손 되이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년시절이 성서에 기록되지 않음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철저히 숨게 되십니다. 예수님을 낳은 후 잊혀졌던 성모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 분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눈엔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의 빨래와 음식장만과 기도로 예수님을 키우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바라는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때 성모님도 역시 그 일의 몫을 차지하고 계셨습니다. 빨래로, 설걷이로, 기도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함께 하신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가치 없는 것이다, 무능력한 것이다. 억압이다, 불평등이다."라고 평가하겠습니까.

 

겸손과 순명의 성모님으로 인해 인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는 진정한 해방이 성모님이라는 여성을 통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세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때문에 어느 신학이든지 구세사의 신비에 참여하시는 성모님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교회는 여성의 위치를 성모님이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여성해방론적 교회론도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성해방론적 교회론에선 성모님의 역사적 체험은 제기하지만 "겸손과 순명" 부분에서는 그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순명과 겸손이 빠진 마리아론은 단순한 여성해방론이지 마리아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모님을 여성해방론의 시녀로 만드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직이라는 직분을 여성에게 허락하시진 않으셨지만 그분을 낳고, 기르고, 씻기고, 닦아 드리고, 울어주는 직분을 여성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사제직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나 주님의 눈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는 너무나 가치 있는 직분입니다. 사도들도 이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성에게만 허락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여성들의 하던 일은 이제 노예적인 노동이 아닌 예수님을 통하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여성은 억압과 불평등에서 기쁨이 넘치는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여성해방론적인 시각에서 교회를 바라보았다면 이 해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부터 시작한 여성해방은 이를 이해할 수 있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가톨릭적인 페미니즘은 존재할 수 있어도 페미니즘적인 가톨릭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4.서로에게 축복을...

 

교회의 남성들은 예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에 부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솔직히 사제직보다는 여성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더 부럽습니다. 그러나 질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축복과 존중을 드리고 남성으로서 여성의 좋은 영성을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성도 예수님께서 남성에게 주신 사도직에 대하여 부러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질투할 필요는 없습니다. 축복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존중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성이라는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에 감사하시고 사제직에 관한 영성을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각기 다른 은사에 대해 서로 축복해주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라는 공동의 이익을 이루는 데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잔일에서 여성의 소명을 찾아야 한다는 이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어리석은 복음이므로.

 

그러므로 교회는 전혀 불평등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평등한 소명이 주어졌으며 사람이 이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사라는 것으로 여겨 감사하고 서로를 축복할 때 "불평등하다"라는 시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성분들에게 잔일에서만 기쁨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목회장도 하시고 단체장도 하십시오. 그리고 여성을 위한 사업도 펼치시고 다른 교회 사업들에도 뛰어드십시오. 그 일에서 기쁨을 찾으십시오. 교회는 그 기쁨을 막지 않습니다. 저는 여성해방을 부정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소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나의 여성의 영성으로 제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영성을 통해 여성해방을 생각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성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갓 태어난 여성해방신학이 올곧게 자라 교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잊혀져가고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해 가는 여성의 영성을 발굴해 내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영적인 자양분을 제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성사제직은 불가합니다." 제가 페미니즘이 교회를 공격한다고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매님께서 "여성사제직"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닌 남의 은사입니다. 이웃의 은사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먼저 밝혀 내는 것이 저는 여성해방신학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셨으면 하며 자매님께서 바라시는 여성해방을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성신학의 앞날을 기대해 봅니다. worker

 

 

추신

전에 질문 드린 "사도바오로와 그의 후학들이 노예제도를 인정했다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이 없군요. 또 하나의 질문을 드립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남존여비사상을 가지고 계셨다는 설도 의외네요. 이것도 함께 질문 드립니다.

 

이 대화를 "다툼"으로 보신 이웃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우선 이 대화로 인해 마음의 평화를 빼앗은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대화를 했었나봅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화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학교에서도, 사제들간에도 이런 대화는 존재합니다. 그것은 다툼이나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위한 행동입니다. 중재안을 내놓는 다거나 진정을 요구하는 것은 모를까 갑자기 나타나 대화가 무의미 한 것처럼 역설하시는 분들을 보면 힘이 쭉 빠집니다. 조용한 것을 원하신다면 산으로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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