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3주일]회개 복음(마르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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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1-21 ㅣ No.79

 

 

[연중 제3주일]회개 복음(마르 1,14-20)


요나가 니네베 성읍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요나 3,1-5.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1코린 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며,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다. (마르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연중 제3주일 제1독서(요나3,1~5.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5) 


요나서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에 해당하는 '촘'(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존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

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다는 표시이다.

 

요나서 3장 10절의 '돌아서는'에 해당하는 '슈브'(shubu; they turned back)

원형 '슈브'(shub)는 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등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서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대신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해야만 한다.

옷이 아니라 심장을 찢으며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인 것이다.

 

 

 연중 제3주일 복음(마르1,14~2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5)

 

이것은 마르코 복음 1장 14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에 첫번째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하늘 옥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명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선언에는 '때가 차서 ~ 가까이 왔다'라는 시간적 이미지

'하느님의 나라'라는 공간적 이미지가 함께 사용되어, 복음 선포의 당위성이

설득력있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때가 차서'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매우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스'(kairos; time)는 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kronos)가 아닌, 하느님의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해 오시는 종말론적 구원의 시간, 구속사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차서'에 해당하는 '페플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수동태

완료 동사로서 하느님께서 이미 구약 시대에 계획하신 그 기간이 다 찼다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다니7,22; 에페7,22).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 역시,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히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he basileia tou theu;

the Kingdom of God)에서 '바실레이아'(basileia) '통치', '다스림', '지배',

'왕다운 지배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유대 묵시 문학, 랍비 문학 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로서, 우선은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고 통치, 다스림, 지배

의미한다 하더라도, 통치의 범위를 나타내는 영역의 개념이라는 점에서

공간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는 그 복음을 듣는 이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사는 생활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역사(役事)를

행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이 늘어나고,

이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은 축소될 수 밖에 없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이테'(metanoeite; repent) 원형

'메타노에오'(metanoeo)'어떤 일에 대해서 후회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나함'(naham)동의어이다(욥기42,6; 에제18,30).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윤리적이거나 종교적 행위에

변화를 일으키다라는 적극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이것은 '돌이키다'는 히브리어 '슈브'(shub)와 뜻이 상통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의 의미는 죄로부터 하느님께로 돌이키며,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사도8,22; 20,21; 1코린12,21; 묵시16,9).

 

이제 예수님의 요구는 '회개'에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믿어라'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믿어라'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테'(pisteuete; believe)원형 '피스튜오'

(pisteuo)는 어떤 사실에 대해 단순하게 수용하고 인정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으로 완전하게 신뢰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뜻이다.

 

위의 두 단어는 모두 현재 명령법으로 되어 있는데,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 계속성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회개와 믿음이란

삶의 한 시점이나 과거에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으로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삶의 자리에서도 반복되어야 하는 명령인 것이다.



말씀 묵상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여기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기쁜 소식)이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때가 차서”는 “이제 때가 찼다.”, 즉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입니다.

(“곧 온다.”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시작되었다.”입니다.

(근처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바리사이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종말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선 먼저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히브 3,12-13).”

‘오늘’은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내일’은 하느님의 권한에 속한 날입니다.

인간은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야고 4,14).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다른 일을 먼저 해야 하니까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때도 항상 ‘지금’이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하는 때도 항상 ‘지금’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른 적당한 때는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때’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자마자

그들이 ‘곧바로’ 따라나섰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부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라는 말은,

제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만일에 그들이 “하던 일을 마무리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라고 청했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부르시니, 따라나서는 일도 ‘지금’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주인의 도착 시간이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인이 늦게 올 수도 있는데, 그것은 주인 쪽의 일이고,

종의 입장에서는 항상 ‘지금’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람을 살리는 사도로 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꺼내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뜻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도 역시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따로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기회가 좋거나 나쁜 것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살면서 ‘때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코헬렛은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니네베의 악행을 심판하시려고 요나를 보내셨을 때, 요나는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도망을 칩니다. 요나가 생각하기에 니네베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의 달갑지 않았던 회개 선포에 곧바로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의 표지로 자루옷을 입은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은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이 잡힌 뒤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때가 되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그들이 찾던 인생의 해답을 그 부르심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세속의 행복만을 찾는 사람에게 결코 다가오지 않는 때입니다. 
냉담 중인 부모나 자녀들,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대자 대녀들,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지만 눈에 거슬리는 동료 신자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준 본당의 사제나 수도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내 맘에 들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를 인정해 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조급하고 이기적인 때와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흘러 지나가는 시간의 때가 아니라, 당신의 충만함을 보여 주시는 때를 선물하십니다. 물론 그때와 그 시간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믿고 맡기고 사랑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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