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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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9-06-25 ㅣ No.9681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1. 용산과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에 여러 번 올라왔다. 그런데 서울 구경을 하러 오거나 누구를 만나러 온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물론 혼자서 서울에 온 적도 없다. 대부분 신부님들과 함께 올라왔다. 신부님들과 함께 올라왔다면 당연히(?) 시국미사나 시국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올라와 며칠을 머물다 갔다. 따라서 서울 지리는 당연히 모르고 서울에 오면 봐야하는 것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광화문 앞에서 단식을 할 때 걸어서 목욕을 가면서도 목욕탕 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광화문은 보지도 못했다. 지금은 용산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을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모아놓은 박물관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보다 더 소중한 곳은 이곳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곧 민중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박물관에 가서 우리는 그곳에 있는 국보나 보물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있는 것이 어느 시대에 어떤 용도로 쓰였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 눈은 역사의 시대를 선사시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으로 크게 나누거나 또는 좀 더 세분해서 어느 왕조시대인지 구분해서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왕을 중심으로 쓰인 역사라는 것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소위 당시의 기득권자들 중심의 역사이다.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쓰인 역사에 민중은 없다. 아니 쓰일 가치가 없다. 왜냐면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왕 옆에 있는 기득권층이고, 그들이 듣고 보고 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소위 대하드라마는 거의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시대의 왕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왕을 중심으로 한 역사 안에서 진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역사에 전혀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수도 없는 이름 없고 얼굴없는 민중들이다.

 

 

2. 박물관에 민중이 있다면?

 

민중의 삶은 역사책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배운 역사는 왕들의 역사이지 민중의 역사는 아니다. 조선 백자를 말하면서 양반

 

집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고, 고려청자를 이야기 하면서 역시 귀족 집에서 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일반 민중들이 사용한 국그릇, 밥그릇은 그것이 조선 백자이건 고려청자이건 그건 민중들이, 일반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왕조를 나누기 위해서 또는 시대적 배경을 따져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뿐이다. 그 밥그릇과 국그릇에 담겨있는 민중의 애환이나 삶은 드러나지 않고 언제나 가려져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역사는 민중의 역사와 다른 역사이다. 민중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다. 왕의 역사는 먹고 살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나 투쟁이 없다. 대신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옷에 아름다운 장식과 술을 달면 된다. 통치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자나 자리를 금으로 꾸미고 단어도 용안이네 용포네 민중이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사용한다. 이런 왕들을 중심으로 한 박물관에 민중의 역사는 들어갈 수 없다. 아니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민중은 왕의 지배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민중의 역사는 박물관에 왕들의 것을 전시한 것처럼 마치 동물을 박재한 것처럼 전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민중의 역사는 어떤 물건이나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삶은 초원의 풀처럼 통치자들이 억압을 하면 드러누워서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다가 통치자의 억압이 계속되면 참다 참다 못해서 풀들이 일어서는 역사이다. 로마시대에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뭉쳐서 로마를 향해서 진격한 것처럼, 부자 지주와 결탁한 탐관오리의 수탈을 참다 참다 못해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뭉쳐서 일어선 동학농민군처럼, 마치 땅 속에 마그마가 흐르고 있다가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분노가 모이고 쌓여서 터지는 역사이다. 살기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이고, 몸부림의 역사이다. 이런 역사를 왕의 눈으로 보면 반란이고 폭동이다. 민중의 눈으로 보면 혁명이고 반정부운동이다.

 

 

3. 민중의 삶 = 예수의 삶 

 

민중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신앙인의 눈도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또는 하느님의 중재자 또는 구원자라는 신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예수의 삶을 통해서 세상과 떠난 신앙이 아니라 예수와 민중이 만들어간 역사, 곧 우리의 신앙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역사 안에서 살았던 존재이다. 나자렛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으로 살았고 민중으로 죽어간 민중 예수 이다.

 

민중이 있는 곳에는 항상 예수가 있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기도를 하신 후에 자신의 삶을 살러 간 곳은 민중들이 살고 있던 갈릴래아였다. 또 갈릴래아에 살고 있던 민중들은 예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모여들었다. 심지어 밤이 되어도 따라 다녔다.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할 때 모였던 민중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 다녔는지 알 수 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민중들은 가난한 사람, 과부, 창녀, 병자들, 마귀 들린 사람들, 나병환자, 어린이, 세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에 기득권층으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삶의 중심인 하느님도 민중의 하느님이 아니라 율법과 제도 안에 갇힌 성전 안에 갇힌 제사와 기도의 하느님 곧 기득권자의 하느님이었다.

 

예수는 민중들에게 하느님은 하늘에서 멀리 떨어져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부자들의 기득권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들의 하느님, 가난한 땅의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고, 민중이 아프면 고쳐주고, 나쁜 마귀에 들렸으면 쫓아내고, 과부의 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살려주시고, 민중 한 가운데서 민중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런 삶은 당연히 기득권에게는 눈에 가시로 보였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고 그들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의 결정은 예수도 민중처럼 죽이는 것이었다. 하느님을 반항하는 사람으로 몰아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를 제거함으로 예수를 따라다니던 민중 역시 흩어버리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을 모욕한 죄로 십자가를 지게 되고 십자가에서 반역자로 죽게 된다.

 

 

4. 예수의 죽음 = 민중의 죽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민중의 죽음이다. 예수는 기득권을 향해서 원래 하느님을 곧 법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제사나 의식의 하느님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먼저 요구하는 하느님을,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의 하느님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예수를 죽게 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바로 민중의 하느님이다.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토대가 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은 기득권자들에 의해서 하느님이 아니라고 부정되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한다.

 

예수는 이런 상황, 민중의 하느님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왜곡하고 부정하는 상황에선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듣지 않는 상황에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빌라도의 질문 “진리가 무엇인가?”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의 억울함, 호소를 들을 수 있다. 오직 하소연하고 울부짖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느님, 자신이 그토록 선포했던 하느님이었다. 십자가에 억울하게 달려서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소리친다. 진리를 보여 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 역시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다. 믿을 곳이라곤 오직 한 분 하느님인데 하느님마저 응답이 없다. 왜?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하느님도 외면을 해서? 민중의 하느님이 아니어서? 아니다.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소통부재의 상황에서, 진리가 왜곡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민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이다. 예수의 외침은 하느님의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 민중의 하느님이라면 민중과 함께 무엇인가를 꼭 하신다는 강한 믿음이다. 즉 하느님도 이 상황에서 끝까지 예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처절한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십자가에 민중 예수만 달린 게 아니라 민중 하느님도 함께 달렸다.

 

민중들의 삶은 예수의 삶이다. 진리가 통하지 않고 소통이 되지 않아서,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잔디밭의 잡초를 뽑아 죽이는 것처럼 죽어야만 하는 민중의 모습이다. 권력의 구조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빼앗길 수밖에 없고, 자신들이 정당한 몫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스트로 반동분자로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민중의 삶이다.

 

용산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발버둥치고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재개발의 기득권은 그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고 무시했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테러리스트로 만들었다. 더욱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소리와 그들의 유족들의 목소리는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고 테러리스트니 공무집행방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뒤집어씌운다. 진리를 말하려고 해도 철저하게 입을 막아서 진리는 밝혀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민중은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런 죽음을 통한 진리의 증거가 여기서 끝나면 얼마나 억울할까!

 

 

5. 예수의 부활=민중의 부활

예수가 죽고, 하느님이 죽고, 민중이 억울하게 죽어서 역사의 저편으로 하나의 가십거리로 끝나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고 역사 안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감추어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밝혀지는 진리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바로 예수의 부활에 있다. 곧 민중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다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진리를 외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은 없다. 단지 전해들은 것뿐이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 6-7)

 

부활한 예수를 만난 곳은 갈릴래아이다. 곧 예수가 민중과 함께, 민중으로 살았던 곳이다. 민중이 살고 있는 곳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다. 예수와 민중이 하나 되었던 곳에 민중 예수가 민중으로 부활한 것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민중이 부활하는 곳은 바로 민중이 살아가는 곳이다. 또 다른 민중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용산 열사들이 억울하게 살아가는 민중이 사는 곳 어디에든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 안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힘이고 민중의 믿음이고 민중의 희망이다.

 

 

6.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

억울하게 죽어간 민중의 부활은 바로 민중이 살아가는 곳이다. 예수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불쌍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한낱 꿈이라고 패배에 젖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 예수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이고 그 죽음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통해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처럼 살아가는 민중을 보면서 바로 억울하게 죽어간 예수가 부활해서 우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그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고백한다.

 

이 예수의 이야기는 민중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서 계속 전해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뿐만 아니라 억울한 민중들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민중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민중 자신들의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들은 바로 자신들의 역사, 곧 민중의 역사가 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중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언제나 처절하게 깨지고 터지고 죽임을 당하는 패배의 역사이다. 하지만 이 패배는 승리의 역사이다. 그 당시에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민중에 의해서 승리한 사건이 되고 이 승리는 민중을 통해서 계속 역사 안에서 전해진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많은 민중 밀알들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 깨지고 터지고 얻어맞고 죽임을 당해도 역사를 만들어 간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후대에 전한다. 민중의 패배의 삶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후대에 전한다. 또 다른 민중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그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그 역사를 우리 민중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믿음과 희망 안에서 계속 입에서 입으로 전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 용산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은 이미 우리 안에서 또 다른 민중 안에서 부활했다고 선포한다. 이 억울한 죽음을 우리의 입을 통해서 후대에 계속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자신들이 삶을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로 후대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출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원문보기 글쓴이 : 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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