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동네 의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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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kimpaul25] 쪽지 캡슐

2005-01-18 ㅣ No.3216

동네 의원에서

어머니께서 설사가 심하셔서 동네 내과에 갔다. 아침 9시인데도 대기자가 많다. “중병 노인이고, 급하니….” 특별 부탁해 놓고 안절부절 이다.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는 여전히 뒤로 밀려 있다.
떡대 떡 벌어진 남자가 “예."하고 진료실로 들어가고, 가냘프며 아리따운 그의 아내가 바싹 뒤를 따른다. 아내의 표정이 말이 아니다. 여인이 애처롭다. 어쩌나, 저 힘으로는 세파에 어려울 텐데! 걱정이다.
축 늘어진 빨랫줄에 그 많은 식구 물빨래 널고, 밭으로 부엌으로 바쁘시던 어머니의 젊은 날이 선연하다. 버드나무와 옴팡집 처마를 연결한 빨랫줄에는 아가의 옷부터 아버지의 옷까지 주렁주렁 연분홍 바람에 복사꽃처럼 향내며 휘날렸지. 그 무거운 빨래의 무게에 축 늘어져 끊어질 듯 견디던 빨랫줄, 엄마의 목줄처럼 질긴 삶의 줄이었지. 바람은 점점이 불어주고 해님이 살포시 말려주고……. 가끔 빨랫줄 여백에는 흥부네 제비가 지저귀는 마당 한편에서 아장아장 놀던 나를 포근히 쳐다보면서 어려움을 잊으셨던 엄마, 우리 엄마, 아, 나의 어머니!

길고 긴 여로를 헤매는 데, 진료를 다 받고 여인이 밝은 얼굴로 나온다. 건장한 남편의 어깨에 걸친 빨래처럼 바람에 힘차게 머리카락 나부끼면서.
다행이다. 빨랫줄이 너무 약했어. 이제부터 빨랫줄에 세상사 널어보는 연습을 해야 하겠구먼! 그래 남녀평등이 모성애에서 온 여인의 자승자박이야! 절구통 같이 힘찬 허리에 만경(萬頃)의 밭이 문제인가. “내 새끼, 내 냄편내, 내 부모 멕여 살리리는디 말이여!” 우리 한국의 여인의 위대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병원 문을 나서는 가냘픈, 예쁜 사랑을 담뿍 얹은 여인을 위하여 빌어본다. 한국의 어머니로, 빨랫줄을 굳건히 매는 굵고 깊은 마음을 심어 달라고, 남녀가 함께 짊어지는 멍에를 얹을 등을 단련해 달라고!

지금 책상 옆 병상에서 “영배야, 영배야!”하염없이 되뇌어 부르신다. 아마도, 뉘엿뉘엿 땅거미 으슥하다고, 빨랫줄에 널어놓은 아가, 아빠 저고리 두루마기 옷가지 잘 챙기라고 그러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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