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9주일(가해) 마태 14,22-33; ’2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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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7-27 ㅣ No.5478

연중 제19주일(가해) 마태 14,22-33; ’23/08/13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동안 냉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저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이 성당을 나가지 않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냉담하게 된 분들의 사정은 각기 다르겠지요. 그런데 냉담했던 그 시절, 그 순간에,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표징이라고 내려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도록 내가 어떤 청이라도 했든가?’ 하는 반성도 해 봅니다결국 친구들과의 화해로 냉담을 풀고 다시 성당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호수에서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어 구해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복음의 바로 이전에는 여자와 어린이를 빼고 남자만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제자들은 백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나눠주기에 급급하여 경황도 없었고, 예수님의 기적을 다시 재해석할 여유도 없었고,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따르기 시작한 주님은 병자도 고치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마저 살리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000명을 먹였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을 모았더니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한 부족 한 부족에게 다 나누어 줄만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마치신 후 군중들을 돌려보내시고 기도하시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기적을 연출하신 주님이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또 한편 그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자신들이 마치 직접 기적을 베풀기라도 한 양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돌아가는 배 안에서 술이라도 한잔 받아놓고 흥겨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풍랑이 일었습니다.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풍랑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인 자랑스런 주님의 사도들이, 자연의 풍랑 앞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유령 같은 물체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고 느꼈고, 마침내는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남편이 문을 두드리자, "누구세요?"하고 묻는 집안의 목소리에 "나야!"라고 답하는 남편처럼 주님은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탈출기 3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주님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심해라. 겁내지 마라.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만들고 주관하는 내가 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즐기는 것도 한순간이지, 어떤 때는 머리만 더 아픕니다. 그런데 어머니 품같이 아무런 부담 없는 주님! 그냥 그대로 안겨 있어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편안함, 바로 그걸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감격해서 묻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주님께서는 기꺼이 베드로의 원의를 받아 주십니다. “오너라.”(29) 그러나 주님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센 바람이 마치 자기를 덮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 저자는 형상이나 물체가 아닌 바람을 '느낀다' 거나 '맞는다' 라고 하지 않고 '본다' 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베드로가 겁에 질린 거센 바람은 베드로를 실제로 물 속에 빠뜨릴 만한 실체가 아님을 넌지시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에 빠진 것은 베드로가 한 눈을 팔다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에 빠진 것이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빠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베드로는 곧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30) 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베드로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한편 우리는 그가 주님께 청했다는 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오라고 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가다가 물에 빠졌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길을 포기하고 다시 배로 돌아오려고 했거나, 뒤돌아서서 자기 동료들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길이 예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본능적으로 주님을 택했습니다.

 

한 번 봉사하다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채 끝마쳤다거나, 잠깐 실습하고는 다 아는 듯이 멈춰 서버림으로써, 주님을 맛들이지 못하고 그냥 떠나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떠나는 순간에도 주님께로 숨는다고나 할까,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주님께 신뢰하며 주님께 청한 공로로 주님은 그를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순간적으로나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거센 바람에 자신을 빼앗겼던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2)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상의 기사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혼란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제자들을 구해주시러 오십니다. 혼란은 제자들을 죽일 수 없지만, 제자들이 그 혼란에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선택하고, 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베드로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가령 그가 주님을 따르다가 좌절하거나 쓰러져도 그를 다시 바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다시 한번 함께하려고 할 때, 비로소 주님은 그와 함께 세상을 당신 품 안으로 거두어들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내가 주님과 떨어져 있어서 혼란과 곤경을 겪은 일이 있는지? 또는 그 때 나나 우리 구역, 반 공동체나 단체가 주님을 모심으로써 안정을 찾은 적이 있었는지? 그때 고통 속에 있는 당신 백성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가? 눈을 감고 묵상 중에 물(곤경, 혼란)에 빠진 나를 건져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껴 봅시다.

 

나는 나와 함께 살도록 내게 보내주신 가족과 이웃을 진정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한창 혼란 속에서 헤매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하러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으로 받아들여 놀라서 경계하고 피했던 것처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거센 바람은 베드로에게 무섭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그래서 그는 무서운 생각과 거센 바람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갔던 그 은총의 생활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들게 됩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유혹이라고 할까? 시련이라고 할까? 세례를 이제 받으려 하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을 실제로 따라 걷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베드로는 자신을 억누르고 괴롭히고 있던 현실의 아픔 속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나는 주님을 온전히 선택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데서 오는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뇌물의 구조악 안에서 홀로 떨어져, 마치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는지?

 

베드로는 물에 빠지자마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30) 하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베드로처럼 이렇게 주님께 애원하는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혹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유혹에서 헤어나려는 생각과 주님께 되돌아가고자 하지만, 오히려 어떤 때는 정반대로 그 유혹이 더 좋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마치 이가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지금 달고 맛있는 사탕을 입에 물고 계속 빨아대는 어린아이처럼. 그 유혹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고, 심지어는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성당에서 하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나니까,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그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께 가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교회 안에서도 창피함,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망설이고 가까이 다가서거나 직접적으로 주님께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번 미사를 빠지게 되면, 계속 빠지게 되니까 못 가게 됐다고 하는 아주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 앞에서, 스캔들이 될 만한 부끄러운 일들을 했을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또는 자기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곧바로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에이!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누가 나를 반기지도 않고, 내가 어려울 때 위로해 주지도 않았기에 반발심으로, 사람들이 나를 아는데 나를 반겨줄까 하는 이유로, 자기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충분히 도와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한테 먼저 와서 가자고 청하지 않은 이웃을 애써 핑계대면서, 스스로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많은 냉담의 시간과 주님과의 결별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경우도 본의 아니게 있는 반면에, 베드로는 이렇게 용기를 내서 물에 빠지자마자, 유혹에 빠지자마자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즉시 주님께 청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어두움 속에, 고통 속에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주시고,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더욱더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해주시고, 이 어려움 속에서 저를 제자로 다시 받아 주시고 저를 불러 주십시오. 저에게 이 길을 헤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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