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5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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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4-19 ㅣ No.53

 

1.우리의 희망이신 성모님, 마리아!

얼마 전 KBS 방송에서 방영한 ꡐ수요기획, 사막을 가꾸는 사람들ꡑ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황량한 사막, 풀 한 포기 없고 모래바람만 사나워 인간이 살기에는 부적당한 땅에 한 젊은 부부가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서 나무가 자라고 풀이 뿌리를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바꾸어가고 있었습니다. 10년, 그리고 20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그들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과 또 그 후손들이 이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사막은 반드시 옥토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무모하다 할 정도의 도전인데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신념과 열정과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월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오월을 보면서 저는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걸맞게 오월에는 많은 꽃이 피고 신록이 번지는가 하면 날씨마저 포근하여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꽃과 신록도 그들을 가꾸는 이들의 정성과 긴 겨울의 추위를 견디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내일을 생각하는 이들의 열정과 정성이, 그리고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지한 삶이 화려하고 멋진 오월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화려한 오월의 꽃들을 노래하기 전에 이들을 만들어 우리가 향유하게 하는 숨은 이들의 정성을 치하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함 뒤에 묻혀있는 수많은 이들의 정성과 고통과 아픔을 먼저 생각할 때 오월은 우리의 좋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때에 성모님의 달은 오월의 화사함 뒤에 숨어있는 정성처럼 그분의 삶을 묵상하게 합니다.

성모님, 마리아! 그 이름만 들어도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밝아지는 것은 화가들의 잘 그린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는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고통과 인고와 좌절로 이루어진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모든 고통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고통에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은 마니피캇에 잘 드러납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엘리사벳을  찾았는데, 엘리사벳의 잉태는 모든 사람에게서 축복을 받았으나 마리아의 임신은 고통과 눈물의 보따리였습니다. 하느님 외에 모든 인간에게서 손가락질받을 일이요 심지어는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에게서도 버림을 받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ꡒ지금 당장 죽음이 닥친다 해도 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ꡓ라는 지극한 순명과 자기 포기로 구세사의 문을 여는 데 초석을 놓으셨습니다. 많은 이들은 아들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일부는 미쳤다 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아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과 함께 미친 아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고,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통곡의 마음으로 보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지지리 복도 없고 그 삶이 고통으로만 이루어진 여인, 전 세기가 기리는 여인이지만 인간적 기쁨이 얼마나 있었을까? 불행하고 가엾은 여인이면서 고통과 좌절로인생을 마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흘러가는 모든 세기를 통해 그분을 기리며 칭송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받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수식으로 칭송을 받아도 넘치지 않는 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아담이 범한 죄도 ꡒ오 펠릭스 꿀빠!ꡓ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담이 지은 죄마저도 복된 죄라 할 만큼 그리스도의 강생이 위대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비해 성모님의 공로야말로 더 무엇으로 비교를 하겠습니까?

성모님의 고통은 그리스도께 바쳐졌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분의 고통은 기쁨으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행복으로 남겨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오월에 성모님의 은덕을 기리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며 그분을 칭송하는 것은 그분을 알아보는 모든 이의 기쁨입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성모님의 업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그분께 가까이 있습니다. 이 오월, 그분을 칭송하며 희망을 키우고 또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_허철수 미카엘 신부


2.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성모성월에 가지는 소망)

다시 계절의 여왕이요 ꡐ제일 좋은 시절ꡑ인 5월 성모성월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3월 4일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예식 바로 다음 첫 토요일 ꡐ성모님을 특별히 기리는 날ꡑ, 여든다섯 나이로 이승을 떠나신 저의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재속3회원으로, 47년 동안 레지오 활동단원으로 사시며 대구 가톨릭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이 임박한  순간에도 - 아들신부에게 옆에서 죽어가는 중환자에게 ꡐ대세를 주라ꡑ고 명하시며 - 성무일도와 묵주기도와 더불어 까떼나를 바치시며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성심으로 묵주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왼팔에 칭칭 감으신 채 눈을 감으신 구남매의 어머님 김말련(金末連) 마리아 막달레나 님의 천상영복(天上永福)을 빌었습니다.

세상 수없이 많은 말들 가운데 ꡐ어머니ꡑ라는 낱말보다 더 진한 정겨움과 그리움, 감격과 감동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말이 또 있을까요? ꡐ사랑ꡑ이라는 말이 요즈음처럼 흔해지고 천박해진 시대에도 ꡐ어머니의 사랑ꡑ만은 여전히 그 가치와 품위를 간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누구든지 한 어머니에게서 생명이 비롯되어 하나의 인간으로 커나가며 인생의 도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갓난아기로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포근한 엄마 품에서 사랑을 먹고 자라며 사랑의 형성과 성장을 배워가지 않습니까.

중세의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 가운데 「성체찬가(聖體讚歌)」가 있는데 여기에 ꡐ펠리칸ꡑ이라는 새가 나옵니다. 펠리칸은 이탈리아의 전설 속 새로 어미새가 둥지의 아기새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놓는다고 합니다. 아기새는 어미새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자라며 어미새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홍수 시대인 오늘날이지만 이토록 모질고 지독한 사랑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가 소년이었을 때, 첫 교사는 그에게 크나큰 절망감을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ꡒ너는 노래를 부르려 하지 마라. 너의 음성은 성악가가 되기에는 틀렸어.ꡓ 카루소가 낙담하여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ꡒ너는 훌륭한 성악가가 될 소질을 갖고 있다. 작은 일에 낙심하지 말고 힘껏 노력해보자.ꡓ 그 어머니는 아들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에 힘입어 세계적 대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카루소의 이야기에서처럼 크게 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근래에 자녀의 교육문제, 청소년들의 탈선문제 등이 여러 매체에서 자주 거론됩니다. 어머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ꡐ건강한 어머니에게서 건강한 자녀가 태어난다ꡑ고 합니다. 모든 이의 행복과 불행이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달려있고, 이 사회와 국가를 중흥해야 할 책임도 우리 어머니들이 감당해야 몫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탈선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자꾸만 펠리칸과 카루소의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웬일일까요.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을 제쳐두고 다른 일로 소일하거나 돈벌이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문제 청소년들은 어머니가 없거나, 어머니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참으로 가정적 위기가 우리 앞에 있고, 어머니다운 어머니를 잃어가는 한과 슬픔이 많은 시절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ꡐ어머니를 찾자ꡑ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겠습니다.

ꡒ여성이 있는 곳에 새로움(淸新함)이 있고 모성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따른다ꡓ는 귀한 말씀을 새삼 묵상하게 됩니다. 실로 어머니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력자로서 이 세상에 소중한 생명을 살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을 ꡐ흔들리는 대지ꡑ가 되지 않게 하고 ꡐ아름다운 삶의 터전ꡑ으로 풍요롭게 가꾸며 건설할 과제와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난히 여성단원들이 많은 우리 레지오 마리애가 여성의, 어머니의 온전한 표상이신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한 여성단원들에 의해 더욱 아름답고 활기차며 넉넉한 새로움으로 변혁되길 소망해 봅니다.

_최홍길 레오 신부


3.하느님의 위로를 찾아

절벽에 둥지를 틀고 사는 대머리독수리는 알이 부화하면 어린 독수리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고, 절벽을 기어올라오는 새끼만을 키운다고 합니다. 여러 새끼 중에서 강한 것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또한 봄이 되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번식을 하는 습성이 있는 연어는, 거센 물결을 이겨낸 암컷에게서 난 치어만이 다시 바다로 나아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고 합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을 편하게 해주면 오히려 부화한 치어들이 바다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다른 물고기나 새의 먹이가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는 자연 속에 사는 생물에게 있어서도 시련이란 것이 오히려 그들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신앙인이 작은 시련이나 걱정거리에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장 현실의 삶이 힘들기에 신앙의 힘은 사라지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극복해보려고 애쓰지만 실패하고 나서는 또다시 좌절하고 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물조차도 생존을 위해서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련에 맞서는데,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보면 너무도 세상을 편하게만 살아가려 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아도 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을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복권에 당첨되기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고, 성실하게 땀을 흘려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의 부모가 오랜 시간 희생하고 노력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자신도 그런 풍요를 누리려고 합니다.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영신생활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고통은 회피하려 하고 겉으로 드러난 일에만 치중합니다. 그동안 레지오 단원으로서 열심히 살아온 선배들의 노력에는 관심이 없고 조금이라도 힘든 것이라면 피하려 하고, 일을 쉽게 쉽게 하려는 경향이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도 만연해 있지는 않은지요? 냉담자 방문이나 독거노인의 뒷바라지와 같은 힘든 일은 다른 사람이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본당신부님의 눈에 띄는 일, 남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일만을 하려 합니다. 이런 모습의 결과는 현재 우리 교회에 냉담자 수가 늘어나고 새 입교자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이웃 사랑의 모습이 레지오 단원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파해야 할 우리 사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악표양으로 비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모습은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징표일진대, 그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준주성범(1권 12장)의 말씀은 귀감이 되며, 우리가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ꡐ주님을 따르는 길ꡑ을 되새겨 줍니다.

주님을 따르려 한다면, 세상의 칭찬을 경계하십시오. 세상의 편안함을 멀리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점점 더 편하게 살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에 우리의 마음을 쏠리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 계시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가치로는 철저하게 치욕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유다인들과 로마제국이라는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바로 이점을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은 당연이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길에서 겸손되이 그리고 조용히 함께하시고 따르셨던 성모님의 모습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어떤 영광도 성모님께는 아무 가치가 없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성모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셨던 하느님의 위로를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_윤병길 세례자요한 신부


4.교본의 ꡐ금욕ꡑ 과 ꡐ극기ꡑ

금욕과 극기는 우리들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혹은 보다 가치 있는 그 무엇을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삶)의 어느 일면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친교관계에 해가 되거나 그 친교관계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본은 금욕과 극기를 자기수련, 혹은 자기훈련이라고 합니다. 이 자기수련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는 ꡐ특별한 행위ꡑ입니다. 금욕과 극기의 행위는 우리들의 원죄 때문에 필요합니다. 이 원죄는 우리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우리들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우리들이 죄에 쉽게 빠지게 합니다. 레지오 단원의 일상생활에서 이 금욕은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까?

순수한 개인적 기도의 습관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 중에  누가 하느님과 개인적이며 친밀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즉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특전이 또 있겠습니까.

금욕 행위는 예수님과 혹은 어머니 마리아와의 친교 및 사랑의 기도, 그리고 천사와 성인들에게 하는 기도에 혼자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절 동안 매일 미사와 봉성체 참례 시에 모든 종류의 크고 작은 극기행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삼위께서는 은총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되려면 역시 자기 절제와 금욕이 필요합니다.

금욕의 정신이 있어야 영혼 구원사업과 사도직 활동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귀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한없는 인내와 끈기, 친절과 상냥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레지오 단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우리들은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끝없는 근심 걱정과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쁘레시디움 회합과 상급평의회의 회합에서 상당한 정도의 극기행위나 금욕행위, 또 소박한 희생 등의 문제를 다루어볼 수 있습니다. 권태가 생길 수도 있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행동이 점차 약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게으름, 짜증, 이기심의 유혹을 극복하는 데에는 금욕이 필요합니다. 충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려고 하거나 인내와 끈기를 가지려면 역시 많은 금욕행위로써 절제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욕과 극기를 하는 주된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충실하고 보람있는 크린스천의 삶과 레지오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우리가 금욕과 극기를 실천하면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본은 교회의 정신적 유산이 주는 귀중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몇 줄의 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ꡒ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분과 협력해야 한다. 죄 없으신 분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다면 죄인인 우리들은 당연히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범하는 죄의 증거와 흔적은 명백하며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협력하는 보속적 행위를 적극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ꡓ

레지오 단원들은 총체적 레지오 시스템을 통하여  금욕과 보속 활동의 값진 훈련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고 이 고통은 모든 사람들 삶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길은 없으며, 십자가에는 은총과 생명이 있습니다. 일상의 생활이 주는 삶의 십자가, 속박과 실망스러운 일들 모두가 자신의 성화와 영혼들의 구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고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위대한 증표이며 그것을 보면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들 각자에게 배당된 고통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성화되고 사도직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경자 에델 퀸은 레지오 단원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ꡒ성화, 즉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그리고 자진하여 받아들이는 은총을 구합시다.ꡓ

_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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