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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주님의 기도 묵상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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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신부 [jpatrick] 쪽지 캡슐

2004-03-02 ㅣ No.2762

벌써 3월이 되었습니다. 모두 잘 지내고 계시지요.

굿뉴스 오늘의 묵상을 보다가 주님의 기도에 대한 훌륭한 강론(묵상)이 있어서 옮겨왔습니다.

저녁 미사 강론 때 일부분을 읽어 드렸더니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알려는 드렸지만 보기 쉽게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라서...

편안한 밤이 되시길....

 

 

 

◎ 2004년 3월 2일 (화) -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6,7-15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8)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복음산책]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주님의 기도

 

사순시기에 수행해야할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에 담겨 있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기도(祈禱)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은총과 축복을 비는 일이다. 기도는 소리를 내는 대화형의 염경기도와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형의 침묵기도로 대별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기도는 어떤 모양으로든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도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혼이) 숨쉬기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에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기도가 왠지 어렵게 느껴지며, 기도에 대단한 문장(文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로지 기도로서만 학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감사, 찬미, 참회, 청원을 그 내용으로 함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기도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도,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장황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을 청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내는 힘이 아니다. 만약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다짐하면 그 기도는 주술(呪術)이나 주문(呪文)이 돼 버린다. 기도는 ’힘’이 아니라 ’자세’이다. 기도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를 말한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하는 ’조건’이며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청원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8절) 그렇다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기도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지(全知)하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필요함을 다 알고 계심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과 우리가 청하는 기도는 엄연히 구별된다. 알고 계신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그것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기도’(9-13절)이다. 루가도 비교적 짧은 형태의 이 기도(11,2-5)를 전해준다.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은 구약성서적이며, 동시에 유대교적 전통기도의 내용과 흡사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일회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움이 가미되어 있다. 이는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심화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다.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다.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의 유혹’, ’우리의 악’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기도이며, 이 땅위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종말론적 구원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물려주신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께 청함에 있어서 어떻게 청해야 하는 기술과 질서뿐 아니라 무엇을 청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나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삶이 하느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 지를 보여준다. 처음 3가지 청원(이름, 나라, 뜻)은 이 땅위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말한다.(묵시 11,17) 이어지는 두 번째 청원(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오늘뿐 아니라 내일과 미래를 지향한다. 양식은 육체와 영혼의 합일체인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며, 이 인간은 타인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자로서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목말라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빌어야하는 악의 유혹으로부터의 보호를 비는 청원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도 악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다리는 그분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동반할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인간의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바쳐야 한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만일 나의 관심과 취미가 세상 것들에만 있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삶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영광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마음 안에,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우리 성당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마지못해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을 마지못해 따르거나 화를 내며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내어놓을 진정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정직한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가족과 친구, 이웃의 분명한 요구를 무시한 채, 나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해서 원한을 품거나 비방한다면, 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유혹 받을 상황에 고의적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영적 세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나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보다 매일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정직하게 ’어떠한 값도 치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 한, 나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박상대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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