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동성당 게시판

박은종 신부님의 죽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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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bejoyful] 쪽지 캡슐

2000-02-14 ㅣ No.1216

그는 제도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교회 장상에 대한 원망은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성과 현명치 못한 처세에 대해서 자학적인 정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상동공소 생활에서 그는 노동의 시간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는 참다운 이웃이었고 벗이었다. 그의 찬 온돌방은 동네 꼬마들의 놀이방이었다. 첫영성체 준비 아동들을 위해서는 본당 교리반에 교통편을 제공하는 고마운 운전수이자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기도 했다. 상동 공소 생활은 그에게 참 평화와 안정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립해야할 방법으로 대형 자동차 면허증을 얻는다고 자동차 학원에도 다녔다. 가끔 다른 본당의 초청이 있으면 성심성의껏 성사를 집행했다. 그는 두달간 모 본당 사제관에서 식복사 노릇까지 기쁘게 하면서 지냈고 나와의 대화 중에는 음식 만드는 솜씨까지 자랑도 했다. 그는 가난한 삶을 즐기는듯 했다. 그러면서도 물질의 풍요를 지닌 이들의 삶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런 성품의 젊은 사제에게 왜 죽음이 왔는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면 그 강한 의지로 사제직의 올바른 정체성을 보일 수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면 그는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이고 생명의 고귀성을 파괴한 이로 사제직에 부당했던가? 그렇다면 회교도의 종교강압 정책에 항의하면서 권총 자살한 파키스탄 한 주교님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1970-80년대 민주화와 인권회복과 노동자의 권익을 부르짖으면서 목숨을 끊은 33명의 젊은 이들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 통일을 부르짖으며 투신한 고 조성만 군은 "지금 이 순 간에도 떠오르는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길을 떠날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천박한 팔레스티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하고 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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