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동성당 게시판

사랑은 어디서나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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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춘 [kmcanselmo] 쪽지 캡슐

2006-11-14 ㅣ No.2432


사랑은 어디서나 - 이해인


사랑은 어디서나 마음 안에 파문을 일으키네. 연못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동그란 기쁨과 고통이 늘 함께 왔다 사라지네.

사랑하면 언제나 새 얼굴이 된다.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모든 것을 신뢰하는 맑고 단순한 새 얼굴이 된다.

몹시 피로할 때, 밀어내려 안간힘 써도 마침내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마는 잠의 무개처럼 사랑의 무게 또한 어쩔 수 없다. 이 무게를 매일 즐겁게 받아들이며 살아 갈 힘을 얻는다.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그. 이미 그의 말로 나의 말을 하고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오래된 결합에서 오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늘 그가 시키는 대로 말할 뿐인데도...

풀빛의 봄, 바다빛의 여름, 단풍빛의 가을, 눈(雪)빛의 겨울... 사랑의 사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빛을 내지만 변함없이 다름답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인듯 새롭다.

준다고 준다고 말로는 그러면서도 실은 더 많이 받고 싶은 욕심에 때로는 눈이 멀고, 그래서 혼자서도 부끄러워지는 것이 사랑의 병인가. 그러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 쓸수록, 그 욕심은 조금씩 치유되는 게 아닐까.

쓰레기 통 옆에 핀 보랏빛 엉겅퀴의 강인한 모습과도같이, 진실한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당당하면서도 겸손하다.

사랑이란 말에는 태풍이 들어 있고, 화산이 들어 있다. 미풍이 들어 있고 호수가 들어 있다.

사랑은 씀바귀 맛. 누구도 처음엔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는 세월 아끼며, 조심스레 씹을수록 제 맛을 안다.

내가 그에게 보내는 사랑의 말은 오월의 유채꽃밭에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흰 나비와 같다. 수많은 나비들과 한데 어울려 춤을 추어도 그는 내 모습을 용케 알아차린다.

사랑은 이사를 가지 않는 나의 집. 이곳에 오래 머물러, 많은 이웃을 얻었네. 내가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나는 금방 초라해지고 말지.

사랑할 때 바다는 우리 대신 말해 주네. 밤낮 설레는 우리네 가슴처럼 숨찬 파도를 이끌며 달려 오네. 우리가 주고받은 숱한 이야기들처럼 아름다운 조가비들을 한꺼번에 쏟아 놓고, 저만치 물러서는 파도여, 사랑이여.

그에게서만은 같은 말을 수백 번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와 만나는 장소는 늘 같은 곳인데도 새롭기만 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식물 세포처럼 사랑의 말과 느낌은 섬세하고 다채롭다.

꽃에게, 나무에게, 돌에게조차 자꾸만 그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 누가 묻지도 않는데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 알리고 싶은 마음. 사랑할수록 바보가 되는 즐거움.

어디서나 그를 기억하는 내 가슴 속에는, 논바닥에 심겨진 어린 모처럼 새파란 희망의 언어들이 가지런히 싹을 틔우고 있다. 매일 물을 마시며, 나와 이웃의 밥이 될 기쁨을 준비하고 있다.

사랑이 나에게 바다가 되니 나는 그 바다에 떨어져 녹아내리는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사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태어남을 거듭하는 한 방울의 물 같은 사랑도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당신 안에 흐르고 또 흐르는 물이 되어 생각하네.

사랑은 파도 타기. 일어섰다 가라앉고 의심했다 확신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파도 파도 파도. 님이 오시는지/소프라노 신영옥
06/11/14 안셀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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