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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3일[이콘]성 제오르지오♬Gloria quoniam tu solus san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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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4-22 ㅣ No.1725

 

[이콘]성 제오르지오(George).노프고로드(Novgorod)화파.16세기.80x58cm.

 

용을 죽인 성 게오르그는 서양과 모든 정통파 지역(희랍교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성인들 중의 하나로 가난한 사람들, 군인들, 무기제조자들, 양치는 목자들과

일반 대중의 수호자로서 일반 가정에서나 궁정에서 존경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성 게오르그는 카파도키엔 (Kappadokien)에서 태어나

로마 군대의 장교로 지낼때 디오클레티안(Diokletian)휘하에서 용맹을 떨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가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명령에 불복종하고 자기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밝혔을 때에(303년)

그는 고문을 당하였고 드디어는 목베임을 당함으로써 순교했다.

 

이 성화는 백마를 타고 있는 성 게오르그가 어떻게 창으로 날개달린 용을 내려 찍는가를 묘사하고 있는데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성문 앞에는 게오르그 성인이 소아시아에 사는 도시인들을 괴롭히던

용으로부터 구출한 공주가 서있다.

성탑(城塔)과 창문에서는 왕과 왕비 그리고 다른 궁인(官人)들이

성 게오르그가 용과 싸우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게오르그 성인의 머리위에는 비천(飛天)하는 한 천사가 그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있다.

화면의 왼쪽 윗 모서리에는 그를 축복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성화의 회화적인 수법에서 노프고로드 지방 화가들의 영향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다.

 

장식적인 색의 처리와 훤히 트인 배경과 화면의 가장자리를 여유있게 비워놓은 공간의 처리 등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The George R. Hann Collection, April 1980,   

*유럽 聖畵(ICON)集 에서

 

포로의 해방이시며,가난한 자의 보호자시고

병자의 의사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무적자로서 승리의 방법을 제공하는 이여.

그리스도께 간구하시어 우리영혼을 구원하소서.

(성 제오르기오 대순교자 아뽀리띠끼온 중)

 

 

 

 

 

[ICON de Tver] Saint Georges terrassant le dragon. 16c

 

제오르지오   

라틴어 Georgius

성인. 순교자. 축일 4월 23일.

 

교황 젤라시오(재위:492∼496)의 미사전문에 나오는 "이름은 공경해 마땅하지만

그 행동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 사람들"의 한 목록에서 성 제오르지오가 언급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기록에 그의 순교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가 군인으로서의 고위 지휘관으로 특진했다는 사실,

우르미아(Urmiah,현 이란령)에 그가 그리스도교 단체를 조직했다는 사실,

한 로마황제의 원정 때 그가 그레이트 브리튼섬에 갔었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데가 있다.

 

그와 용(龍)에 관한 전설은 그 기원을 6세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6세기의 지방전설에 의하면 성 제오르지오의 고향이

팔레스티나의 리다(Lydda, 예루살렘 부근의 도시)이며,

그의 유해는 니코메디아(Nicomedia, 현 터기의 도시 Izmit)에서 리다로 운반되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263 ?∼339)는,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 305)의 박해 때

니코메디아에서 황제 앞에 그리스도 교도임을 고백한 어떤 점잖은 병사(兵士)의 순교에 관해

언급된 바 있으나, 그 성인의 이름, 고국, 묘소는 밝히지 않고 있다.

 

부제(副祭) 테오도시오(Theodosius)가 530년경에

처음으로 리다에 있는 성 제오르지오의 무덤에 관해 언급하였다.

동방에서는 성 제오르지오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십자군 병사들이 그 순교담을 유럽에 부활시켰다.

1222년의 영국 옥스퍼드 교회회의는 그의 축일을 국경일로 할 것을 결정하였고,

에드워드 3세(재위:1327∼1377)때 그는 영국의 보호성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포르투갈, 아라곤, 카탈로니아, 구르지아, 리투아니아 등의 수호성인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축일:4월23일

성 제오르지오 순교자

ST. GEORGE

St. Georgius,Martyr

San Giorgio Martire di Lydda

Died:tortured and beheaded c.304 at Lydda, Palestine

Giorgio = che lavora la terra, dal greco = that the earth works, from the Greek

 

 

성 제오르지오는 4세기부터 팔레스티나의 디오스폴리스에서

공경을 받아 왔고 그 곳에 기념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의 축일을 초세기부터 동방과 서방에서 두루 지내게 되었다.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또는 제오르지오)는 영국,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히 베네치아(Venezia)와 페라라(Ferrara)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군인과 보이 스카우트의 수호자이고  동방 교회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도 불리던
리다(Lydda)에서 순교하였다는 것과 황제 근위대의 군인이었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6세기경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신화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성인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이 “황금 성인전”(Legenda Aurea)에 언급된 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인이 어느 나라를 지나다가 어떤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용의 제물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나라는 계속 어린 양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양들이 다 바닥나자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돌아가면서 딸들을 바치다가 공주의 순서가 되자 그 하녀가 대신 제물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인은 하녀와 함께 기다리다가 용이 나타나자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용을 붙잡았다.
이때 성인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죽이겠다고 하자

왕과 백성들이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고 왕을 비롯한 15,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성인은 왕국의 반을 주겠다는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교회들을 잘 돌보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7-8세기에 영국에 알려진 성인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중세 이후에는 기사도와 군인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성인의 문장은 흰 바탕의 붉은 십자가인데, 현재 영국 해군에서 사용하는 기장이 바로 하얀 바탕에 붉은 색으로
커다란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가 그려진 모양이며, 이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 도안의 일부이기도 하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3, De Sancto Georgio: PL 567-571)

 

그는 십자가의 깃발로 완전히 방비되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오늘 이 축일은 파스카 영광의 기쁨을 반영해 주고

금에 박혀 있는 귀한 보석이 그 아름다운 광채로 금을 빛나게 하듯 해줍니다.

성 제오르지오는 확실히 한 군직에서 다른 군직으로 옮겨 가서,

세속의 군직을 내던지고 그리스도 군대의 반열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군직에서 영민한 군사처럼 살았습니다.

우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버림으로써 세속 재물의 부담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아무런 장애도 받음이 없이 믿음의 갑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로서

치열한 투쟁 속으로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명백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누구든지 세속 재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신앙을 위해서

용감하게 또 합당히 싸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 제오르지오는 성령의 불로 타오르고 십자가의 깃발로 완전히 방비되어 사악한 왕과 싸웠고,

마귀의 사자인 이 왕을 패배시킴으로써 바로 죄의 원흉을 패배시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용감히 싸우도록 고취시켰습니다.

 

확실히 그 전투 가운데 지극히 높으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심판관께서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유의지로써 악인의 손이 그 포악성을 성 제오르지오에게마저 뻗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순교자의 육신을 살인자들에게 넘겨주셨지만 패배될 수 없는 신앙의 보루로 방어된

그 영혼을 당신의 중단 없는 보호로써 지켜 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천상 군대에 속한 이 군사를 보고 경탄하는 데 그치면 안됩니다.

그를 또한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정신을 천상 영광의 상급에까지 들어 높이고 우리 마음을 거기에다 고정시킨다면

세속이 우리에게 유혹의 미소를 던지든 불행으로 우리를 위협하든 간에

세속은 거기에서 우리를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때가 될 때 우리의 정신이 향해 있는 축복의 그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성 바울로의 권고에 따라 육신과 영혼의 온갖 불결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합시다.

그리스도의 성전인 교회에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샘에서 씻음 받은 후

"너의 사제들은 정의를 입어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여러 가지 덕을 입어야 합니다.

 

즉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부패의 낡은 옷을 입어서는 안되며,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순수하고 거룩한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써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옛 죄악의 오점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삶이 지니는 광채로 빛나게 되며

파스카 신비를 합당히 경축하고 복된 순교자들의 모범을 실제로 본받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축일:2월21일.게시판1628번.

 

 

마리아 막달레나가 오해의 희생자라고 한다면 제오르지오는 엄청난 양의 상상력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그가 아마도 콘스탄틴 황제 시대 전에 팔레스티나의 리다에서 죽은 실제 순교자라는 것은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교회는 그의 전기를 전해 주고 있지만 그의 생애를 둘러싼 전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최고의 가치를 치르고자 했다는 것은 교회가 믿는 바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제오르지오가 용과 싸워서 왕의 딸을 구하고 리비아를 회개시켰다는 것은 12세기 이탈리아의 우화이다.

제오르지오는 일찍이 동방의 군인들만큼이나 십자군들이 존경하던 수호 성인이다.

그는 영국, 포루투칼, 독일, 아라곤, 제노바, 베니스의 수호 성인이다.

 

 

인간 본성은 단순하고 냉정한 역사의 자료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에게는 위싱턴과 링컨이 있지만 여하튼 폴 번양

(Paul Bunyan: 미국 서북부의 산림 벌채 지방에 전해 오는 전설 속의 목재 벌채인도 필요로 한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의 생애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인들은 ’피오레티’에서도 그의 정신을 찾았다.

산타클로스는 성니콜라오의 정신이 대중화된 것이다.

사실과 전설이 모두 거룩하신 분에 대한 신비스런 진리를 밝혀 주는 인간적인 방법들이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른 분들의 생활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국가를 찾으려는 충격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50항)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인창동성당게시판1284번.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12월6일.게시판1508번.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게시판157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초대 교회에는 로마의 군인 중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생겨 순교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군인이 입교하기 쉬웠던 것은

아마 엄격한 군기에 익숙된 몸으로서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또한 언제 어느 때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칠지 모르는 처지로서는

천국에 대한 관념이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성 제오르지오도 역시 그러한 로마 제국의 용감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옛적부터 교회의 영광스러운 순교자 중에 끼어 있어

동방 정교회에 있어서는 더욱 더 존경을 받으며 대 순교자라고까지 부름을 받고 있다.

 

그에게 봉헌된 성당은 이미 5,6세기경부터 건립되어 십자군 시대에는

영국의 사자왕(獅子王) 리챠드 1세가

그를 휘하 군대의 보호자로 삼은 이해 일반 군인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성인은 280년경에 소아시아의 가파도니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군대에 들어가서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총애를 얻어 장교에까지 승진했으나,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황제 앞에 대령해 주저함이 없이 신앙의 귀중함을 논하고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참된 하느님을 신봉하며 자신의 영혼 구원을 도모할 것을 권유했으므로

대노를 사게 되었고 배교의 엄명을 받고도 용감히 이를 거절했다.

 

황제는 이 청년 장교의 무용(武勇)과 씩씩함을 아껴 여러 방법으로 설득했으므로

 “이제는 그만이다”하고 참수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이처럼 제오르지오가 용감한 순교의 화관을 얻은 것은 303년의 일이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를 순교자의 화관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제오르지오의 상본은 보통 몸에 갑주를 두르고 말을 타고 있는 맵시 있는 한 기사(騎士)가

한 마리의 용(龍)을 창으로 찔러 눕히고 있고, 곁에 한 소녀가 서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용에게 막 희생되려는 소녀를 제오르지오가 구출했다는 전설에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인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용과 같은 마귀의 독아(毒牙)에서 소녀로 상징된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Haydn-Gloria quoniam tu solus sanctus

 

update.2005.4.23.

 

 

 

 

 

 

 

 

 

 

 

 

 

 

 

 

 

 

 

 

 

 

 

 

 

GEORGE

 

Also known as

Victory Bringer

Memorial

23 April (Roman Catholic); 3 November (Russian Orthodox); fourth Sunday in June (Malta); third Sunday in July (Gozo)

Profile

Soldier. Martyr. That’s all we know for sure.

 

Several stories have been attached to Saint George, the best known of which is the Golden Legend. In it, a dragon lived in a lake near Silena, Libya. Whole armies had gone up against this fearce creature, and had gone down in painful defeat. The monster ate two sheep each day; when mutton was scarce, lots were drawn in local villages, and maidens were substituted for sheep. Into this country came Saint George. Hearing the story on a day when a princess was to be eaten, he crossed himself, rode to battle against the serpent, and killed it with a single blow with his lance. George then held forth with a magnificent sermon, and converted the locals. Given a large reward by the king, George distributed it to the poor, then rode away.

 

Due to his chivalrous behavior (protecting women, fighting evil, dependence on faith and might of arms, largesse to the poor), devotion to Saint George became popular in the Europe after the 10th century. In the 15th century his feast day was as popular and important as Christmas. Many of his areas of patronage have to do with life as a knight on horseback. The celebrated Knights of the Garter are actually Knights of the Order of Saint George. The shrine built for his relics at Lydda, Palestine was a popular point of pilgrimage for centuries. One of the Fourteen Holy Helpers.

Died

tortured and beheaded c.304 at Lydda, Palestine

 

Readings

Saint George was a man who abandoned one army for another: he gave up the rank of tribune to enlist as a soldier for Christ. Eager to encounter the enemy, he first stripped away his worldly wealth by giving all he had to he poor. Then, free and unencumbered, bearing the shield of faith, he plunged into the think of the battle, an ardent soldier for Christ.

 

Clearly what he did serves to teach us a valuable lesson: if we are afraid to strip ourselves of out worldly possessions, then we are unfit to make a strong defense of the faith.

 

Dear brothers, let us not only admire the courage of this fighter in heaven’s army, but follow his example. Let us be inspired to strive for the reward of heavenly glory.

 

We must now cleanse ourselves, as Saint Paul tells us, from all defilement of body and spirit, so that one day we too may deserve to enter that temple of blessedness to which we now aspire.

from a sermon by Saint Peter Damian, priest

 

 

 

 

San Giorgio Martire di Lydda

 

23 aprile - Memoria Facoltativa  

Visualizza la Scheda Completa

Cappadocia sec. III - † Lydda (Palestina), 303 ca.

 

Giorgio, il cui sepolcro e a Lidda (Lod) presso Tel Aviv in Israele, venne onorato, almeno dal IV secolo, come martire di Cristo in ogni parte della Chiesa. La tradizione popolare lo raffigura come il cavaliere che affronta il drago, simbolo della fede intrepida che trionfa sulla forza del maligno. La sua memoria e celebrata in questo giorno anche nei riti siro e bizantino. (Mess. Rom.)

 

Patronato:Arcieri, Cavalieri, Soldati, Scout, Esploratori/Guide AGESCI

Etimologia: Giorgio = che lavora la terra, dal greco

Emblema: Drago, Palma, Stendardo

 

Per avere un’idea del diffusissimo culto che il santo cavaliere e martire Giorgio, gode in tutta la cristianita, si danno alcuni dati. Nella sola Italia vi sono ben 21 Comuni che portano il suo nome; Georgia e il nome di uno Stato americano degli U.S.A. e di una Repubblica caucasica; sei re di Gran Bretagna e Irlanda, due re di Grecia e altri dell’Est europeo, portarono il suo nome.

E patrono dell’Inghilterra, di intere Regioni spagnole, del Portogallo, della Lituania; di citta come Genova, Campobasso, Ferrara, Reggio Calabria e di centinaia di altre citta e paesi. Forse nessun santo sin dall’antichita ha riscosso tanta venerazione popolare, sia in Occidente che in Oriente; chiese dedicate a s. Giorgio esistevano a Gerusalemme, Gerico, Zorava, Beiruth, Egitto, Etiopia, Georgia da dove si riteneva fosse oriundo; a Magonza e Bamberga vi erano delle basiliche; a Roma vi e la chiesa di S. Giorgio al Velabro che custodisce la reliquia del cranio del martire palestinese; a Napoli vi e la basilica di S. Giorgio Maggiore; a Venezia c’e l’isola di S. Giorgio.

Vari Ordini cavallereschi portano il suo nome e i suoi simboli, fra i piu conosciuti: l’Ordine di S. Giorgio, detto “della Giarrettiera”; l’Ordine Teutonico, l’Ordine militare di Calatrava d’Aragona; il Sacro Ordine Costantiniano di S. Giorgio, ecc.

E considerato il patrono dei cavalieri, degli armaioli, dei soldati, degli scouts, degli schermitori, della Cavalleria, degli arcieri, dei sellai; inoltre e invocato contro la peste, la lebbra e la sifilide, i serpenti velenosi, le malattie della testa, e particolarmente nei paesi alle pendici del Vesuvio, contro le eruzioni del vulcano.

Il suo nome deriva dal greco ‘ghergos’ cioe ‘agricoltore’ e lo troviamo gia nelle ‘Georgiche’ di Virgilio e fu portato nei secoli da persone celebri in tutti i campi, oltre a re e principi, come Washington, Orwell, Sand, Hegel, Gagarin, De Chirico, Morandi, il Giorgione, Danton, Vasari, Byron, Simenon, Bernanos, Bizet, Haendel, ecc.

In Italia e diffuso anche il femminile Giorgia, Giorgina; in Francia e Georges; in Inghilterra e Stati Uniti, George; Jorg e Jurgens in Germania; Jorge in Spagna e Portogallo; Gheorghe in Romania; Yorick in Danimarca; Yuri in Russia. La Chiesa Orientale lo chiama il “Megalomartire” (il grande martire).

Detto tutto questo, si puo capire come il suo culto cosi diffuso in tutti i secoli, abbia di fatto superato le perplessita sorte in seno alla Chiesa, che in mancanza di notizie certe e comprovate sulla sua vita, nel 1969 lo declasso nella liturgia ad una memoria facoltativa; i fedeli di ogni luogo dove e venerato, hanno continuato comunque a tributargli la loro devozione millenaria.

La sua figura e avvolta nel mistero, da secoli infatti gli studiosi cercano di stabilire chi veramente egli fosse, quando e dove sia vissuto; le poche notizie pervenute sono nella “Passio Georgii” che il ‘Decretum Gelasianum’ del 496, classifica tra le opere apocrife (supposte, non autentiche, contraffatte); inoltre in opere letterarie successive, come “De situ terrae sanctae” di Teodoro Perigeta del 530 ca., il quale attesta che a Lydda (Diospoli) in Palestina, oggi Lod presso Tel Aviv in Israele, vi era una basilica costantiniana, sorta sulla tomba di san Giorgio e compagni, martirizzati verosimilmente nel 303, durante la persecuzione di Diocleziano (detta basilica era gia meta di pellegrini prima delle Crociate, fino a quando il sultano Saladino (1138-1193) la fece abbattere).

La notizia viene confermata anche da Antonino da Piacenza (570 ca.) e da Adamnano (670 ca) e da un’epigrafe greca, rinvenuta ad Eraclea di Betania datata al 368, che parla della “casa o chiesa dei santi e trionfanti martiri Giorgio e compagni”.

I documenti successivi, che sono nuove elaborazioni della ‘passio’ leggendaria sopra citata, offrono notizie sul culto, ma sotto l’aspetto agiografico non fanno altro che complicare maggiormente la leggenda, che solo tardivamente si integra dell’episodio del drago e della fanciulla salvata da s. Giorgio.

La ‘passio’ dal greco, venne tradotta in latino, copto, armeno, etiopico, arabo, ad uso delle liturgie riservate ai santi; da essa apprendiamo come gia detto senza certezze, che Giorgio era nato in Cappadocia ed era figlio di Geronzio persiano e Policronia cappadoce, che lo educarono cristianamente; da adulto divenne tribuno dell’armata dell’imperatore di Persia Daciano, ma per alcune recensioni si tratta dell’armata di Diocleziano (243-313) imperatore dei romani, il quale con l’editto del 303, prese a perseguitare i cristiani in tutto l’impero.

Il tribuno Giorgio di Cappadocia allora distribui i suoi beni ai poveri e dopo essere stato arrestato per aver strappato l’editto, confesso davanti al tribunale dei persecutori, la sua fede in Cristo; fu invitato ad abiurare e al suo rifiuto, come da prassi in quei tempi, fu sottoposto a spettacolari supplizi e poi buttato in carcere. Qui ha la visione del Signore che gli predice sette anni di tormenti, tre volte la morte e tre volte la resurrezione.

E qui la fantasia dei suoi agiografi, spazia in episodi strabilianti, difficilmente credibili: vince il mago Atanasio che si converte e martirizzato; viene tagliato in due con una ruota piena di chiodi e spade; risuscita operando la conversione del ‘magister militum’ Anatolio con tutti i suoi soldati che vengono uccisi a fil di spada; entra in un tempio pagano e con un soffio abbatte gli idoli di pietra; converte l’imperatrice Alessandra che viene martirizzata; l’imperatore lo condanna alla decapitazione, ma Giorgio prima ottiene che l’imperatore ed i suoi settantadue dignitari vengono inceneriti; promette protezione a chi onorera le sue reliquie ed infine si lascia decapitare.

Il culto per il martire inizio quasi subito, come dimostrano i resti archeologici della basilica eretta qualche anno dopo la morte (303?) sulla sua tomba nel luogo del martirio (Lydda); la leggenda del drago comparve molti secoli dopo nel Medioevo, quando il trovatore Wace (1170 ca.) e soprattutto Jacopo da Varagine († 1293) nella sua “Leggenda Aurea”, fissano la sua figura come cavaliere eroico, che tanto influenzera l’ispirazione figurativa degli artisti successivi e la fantasia popolare.

Essa narra che nella citta di Silene in Libia, vi era un grande stagno, tale da nascondere un drago, il quale si avvicinava alla citta, e uccideva con il fiato quante persone incontrava. I poveri abitanti gli offrivano per placarlo, due pecore al giorno e quando queste cominciarono a scarseggiare, offrirono una pecora e un giovane tirato a sorte.

Un giorno fu estratta la giovane figlia del re, il quale terrorizzato offri il suo patrimonio e meta del regno, ma il popolo si ribello, avendo visto morire tanti suoi figli, dopo otto giorni di tentativi, il re alla fine dovette cedere e la giovane fanciulla piangente si avvio verso il grande stagno.

Passo proprio in quel frangente il giovane cavaliere Giorgio, il quale saputo dell’imminente sacrificio, tranquillizzo la principessina, promettendole il suo intervento per salvarla e quando il drago usci dalle acque, sprizzando fuoco e fumo pestifero dalle narici, Giorgio non si spavento, sali a cavallo e affrontandolo lo trafisse con la sua lancia, ferendolo e facendolo cadere a terra.

Poi disse alla fanciulla di non avere paura e di avvolgere la sua cintura al collo del drago; una volta fatto cio, il drago prese a seguirla docilmente come un cagnolino, verso la citta. Gli abitanti erano atterriti nel vedere il drago avvicinarsi, ma Giorgio li rassicuro dicendo: ”Non abbiate timore, Iddio mi ha mandato a voi per liberarvi dal drago: Abbracciate la fede in Cristo, ricevete il battesimo e uccidero il mostro”.

Allora il re e la popolazione si convertirono e il prode cavaliere uccise il drago facendolo portare fuori dalla citta, trascinato da quattro paia di buoi. La leggenda era sorta al tempo delle Crociate, influenzata da una falsa interpretazione di un’immagine dell’imperatore cristiano Costantino, trovata a Costantinopoli, dove il sovrano schiacciava col piede un drago, simbolo del “nemico del genere umano”.

La fantasia popolare e i miti greci di Perseo che uccide il mostro liberando la bella Andromeda, elevarono l’eroico martire della Cappadocia a simbolo di Cristo, che sconfigge il male (demonio) rappresentato dal drago. I crociati accelerarono questa trasformazione del martire in un santo guerriero, volendo simboleggiare l’uccisione del drago come la sconfitta dell’Islam; e con Riccardo Cuor di Leone (1157-1199) san Giorgio venne invocato come protettore da tutti i combattenti.

Con i Normanni il culto del santo orientale si radico in modo straordinario in Inghilterra e qualche secolo dopo nel 1348, re Edoardo III istitui il celebre grido di battaglia “Saint George for England”, istituendo l’Ordine dei Cavalieri di San Giorgio o della Giarrettiera.

In tutto il Medioevo la figura di s. Giorgio, il cui nome aveva tutt’altro significato, cioe ‘agricoltore’, divenne oggetto di una letteratura epica che gareggiava con i cicli bretone e carolingio. Nei Paesi slavi assunse la funzione addirittura ‘pagana’ di sconfiggere le tenebre dell’inverno, simboleggiate dal drago e quindi di favorire la crescita della vegetazione in primavera; una delle tante metamorfosi leggendarie di quest’umile martire, che volle testimoniare in piena liberta, la sua fede in Cristo, soffrendo e donando infine la sua giovane vita, come fecero in quei tempi di sofferenza e sangue, tanti altri martiri di ogni eta, condizione sociale e in ogni angolo del vasto impero romano.

San Giorgio e onorato anche dai musulmani, che gli diedero l’appellativo di ‘profeta’. Enrico Pepe sacerdote, nel suo volume ‘Martiri e Santi del Calendario Romano’, conclude al 23 aprile giorno della celebrazione liturgica di s. Giorgio, con questa riflessione: “Forse la funzione storica di questi santi avvolti nella leggenda e di ricordare al mondo una sola idea, molto semplice ma fondamentale, il bene a lungo andare vince sempre il male e la persona saggia, nelle scelte fondamentali della vita, non si lascia mai ingannare dalle apparenze”.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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