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2004 대림피정] 요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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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luke93] 쪽지 캡슐

2004-12-21 ㅣ No.3202

 

요나 묵상

야훼의 말씀이 아미때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어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나는 요나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다. 나는 하느님을 공경한다. 내가 어찌 다른 것을 공경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 앞에서 나의 민족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나에게 올바른 인식을 주셨다. 그분은 나를 평온하고 안전하게 하셨다. 나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다.

니느웨는 신앙이 없다. 니느웨는 악하다. 니느웨는 하느님을 비웃는다. 니느웨는 하느님의 사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니느웨는 강대하고 무섭다. 왜 니느웨로 가야 한단 말인가? 왜 이스라엘한테로 가라고 하시지 않는가?

나는 그분의 뜻을 모른다. 나는 그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주변의 모든 것, 조상들의 전통, 나의 체험, 나의 친구들, 어느 것에 비추어 보아도 내가 옳다. 나는 차라리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으련다. 이해하지 않으련다.


“이 말씀을 받고도 요나는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다르싯으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요빠로 내려갔다.”


요나는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도망하려고 떠났다. 자기 고향 땅에서 사라지려고 말이다. 하느님이 자기를 부르시지 않는 먼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저 갈 뿐이다. 이교도인 뱃사람들과 한 배를 타고서라도 말이다. 그저 갈 뿐이다. 갈 뿐이다......


도피행은 배 위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요빠로 내려가서 다시 항구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배의 제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내려간 것이다. 머리 속에서는 계속 의문이 감돌고, 어둠 속에서도 마음은 깨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려고 하는데도, 혼수상태로, 망각 속으로 내려간 것이다.


요나는 달아났다. 그러나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아무도 숨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온갖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그분은 폭풍을 통해서도 부르시고 배와 선원들을 구하려는 이교도 선장을 통해서도 부르신다.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너도 일어나 너의 신을 부르짖어 보아라.”


그러나 요나는 바로 이 때문에 피하고 있다. 그는 니느웨가 하느님을 업신여기므로 마땅히 멸망해야 한다. 이 이교도들의 배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파멸이다. 그런데 이제 기도를 하라고! 하느님을 피할 수 있다면 기도할까? 그런데 이교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니, 요나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다.

하느님이 이미 니느웨를 구하고자 작정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당신이 이 배를 구하고자 작정했다면, 그것도 홀로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요나에게는 중립적인 무관심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깨닫지 못한다. 부르심을 받은 자인 그가 자신의 입장을 모르고 있다. 그가 피하면,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다. 그가 피하면, 뱃사람들이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피하면, 이 세상은 파국에 빠지는 것이다. 요나는 부르심을 받았다. 저주를 가져오느냐? 이 세상에 축복을 가져오느냐? 양자 택일을 해야지, 결코 다른 길은 없다.

선장이 그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뱃사람들이 그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하느님이 그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에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가 이런 변을 당하느냐? 너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 어디에서 왔으며 고향과 국적은 어디냐?”

요나는 대답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하늘을 내시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느님 야훼를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도망치는 몸입니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려면 너를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하고 그들이 다시 물었다.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집어넣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바다가 잔잔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태풍을 만난 것은 내 탓인 줄 압니다.”

바다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결을 헤치고 육지로 되돌아 가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그들은 야훼께 부르짖었다. “야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우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야훼께서 다 뜻이 있으시어 하시는 일이 아니십니까?”

그들은 결국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다.


성난 바다는 잔잔해졌다.  

이것을 보고 그들은 야훼께 감사의 제물을 바친다. 이 이교도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부르심을 받은 자인 요나는 오히려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바닷속에....물고기 안에....심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종말이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다. 그는 갇혀있다.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다. 바로 자기 자신 안에 갇혀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심연도 얼싸안으신다. 그분은 종말을 시작이 되게 하신다. 물고기의 배를 자궁이 되게 하신다. 절망은 희망에 걷어 채이고 만다.

하느님, 나를 구하소서!


요나는 사흘 밤낮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하느님 야훼께 기도를 올리니, 야훼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아 내게 하셨다.

달라붙어 휘감았던 것이 풀렸다. 빗장이 부서졌다. 심연에서 나오너라! 가사 상태에서 벗어나라! 자유의 세계로! 밝은 데로! 요나야, 밝은 데로 나오너라!

사흘 동안 그는 태내에 들어 있었다. 이제 태내에서 나왔다. 요나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요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는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귀를 기울인다. 그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내가 일러준 말을 그대로 전하여라.”


그래서 그는 길을 떠난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인간인가? 하느님은 그에게 너무 지나치지 않으셨는가? 어쩌면 그는 정말 화염과 무너진 성벽과 사람들이 맞아 죽는 것을 볼 것인가? 그는 정말 통곡 소리를 들을 것인가? 그는 정말 독기를 냄새맡을 것인가? 그는 정말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볼 것인가? 그는 정말 땅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니느웨가 먼지로 변하는 것을 볼 것인가?


물론 그 자신은 니느웨가 심판을 받고 멸망하기를 원한다. 그 성읍은 그의 말로 인하여 파멸해야 한다.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하느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이것이 요나가 바라고 있던 것이다.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로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 가 하룻동안 돌아다니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요나는 결코 성읍의 한복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만 다녀도 충분하다는 생각에서다. 거기서 그는 겨우 임무를 다한 것이다. 그의 설교는 짧았다. 짧고 명백했다. 이 소식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탈출구도 없다. 재판관은 이미 선언했고, 이제 사형 집행관이 일할 차례이다. 다만 한 가지 남은 문제라면 40일이라는 기간뿐이다.

그것은 결코 사람을 위해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 아주 불길한 소식이다. 그것은 결코 변명을 허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요나는 시내를 빠져 나가 동쪽으로 가서 앉았다. 거기에 초막을 치고 그 그늘에 앉아, 이 도시가 장차 어찌 되는 가 볼 심산이었다.

요나는 여전히 자기의 입장을 고집한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의 생각이 곧 하느님이다. 그것은 명백한 원칙을 세우신 하느님, 시비를 분명히 하시고, 어디에 구원이 있고 어디에 파멸이 있는지를 똑똑히 알려 주시는 하느님이다. 이쪽에는 부르심 받은 자들이 있고, 저쪽에는 불신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저기는 반신적 무신앙의 세계다. 여기에는 구원이 있고, 저기는 파멸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요나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요나, 그대는 이미 낡았다. 소견이 좁고 낡아빠진 것이다.


요나는 하느님을 마음속에 멋대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었는가? 그는 그분이 야훼시라는 것을 잊어버렸는가? 야훼란 곧 “나는 여기 있는 자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어느 편에 그분이 계시는가? 요나는 바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실상 자기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 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다. 임금도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이제 요나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니, 하느님하고나 이야기 하지 않겠는가? 아마 하느님은 당신이 보내신 사자보다 더 인간적일 것이다.

그리하여 요나가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났다. 곧 악의 대성읍 니느웨가 하느님께로 돌아선 것이다. 니느웨는 요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요나의 기대를 무시하고, 그러면서도 바로 이 요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니느웨는 올바로 하느님을 인식하였다. 비록 요나같은 사람이 하느님에 관해 설교 하기는 했지만 니느웨는 변하였다. 스스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변할 수 없었다.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서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면하게 해 주셨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하느님이 자라게 하신 아주까리 아래서 요나는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하느님의 그늘에서 태평을 누리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니느웨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 거기서는, 하느님이 과연 생각을 돌리시어 재앙을 안 내리실 것인가? 하고 불안에 떨며 울부짖고 있다.

그렇지만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엿보이기도 한다.

요나에게는 아주까리가 있다. 그것이 그늘을 마련해 주고 요나는 그 아래서 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니느웨는 어떤가? 니느웨는 불안 속에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하느님일까? 


이튿날 새벽에 하느님께서는 그 아주까리를 벌레가 쏠아 먹어 말라 죽게 하셨다. 그리고 해가 뜨자마자 뜨거운 열풍이 불어오게 하셨다. 더욱이 해마저 내리쬐자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요나는 죽고만 싶어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투덜거렸다.

야훼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하느님은 지나칠 정도로 니느웨를 동정하신다. 수많은 사람을, 아니 온 세상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런데 요나, 그대는 벌써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는 작은 아주까리를 잃었다. 그 아주까리 아래서의 휴식과, 그대의 신학과, 그대의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온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이다. 요나 그대는 이해하겠는가? 하느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대도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대를 필요로 하신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요나 그대를 필요로 하신다.


요나, 니느웨로 가라! 어서 가라!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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