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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요한 1,6-8.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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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7-12-16 ㅣ No.71

 

 

[대림 제3주일]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요한 1,6-8.19-28)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한다. (이사야 61,1-2ㄱ.10-1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한다. (1테살 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냐고 유다인들이 묻자,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한다. (요한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이사61,1~2ㄱ.10~1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2) 

 

제 3 이사야로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의 내용이다.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을 겨냥한다. 

특히 이사야서 58장 6~7절과 오늘 독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은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청사진을 그려내는데 결정적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대개 임금들과 대사제들, 예언자들만이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여기에 쓰인 단어들은 특별한 임무의 위임 관련되며, 동시에 성령의 은사 더 많은 관계가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에서 '가난한 이들'이란 '아나뷤'(anawim)이라는 히브리 단어이다. 시편에서 종종 인간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신실한 사람들을 나타내는데 사용한다.

 

이 단어는 '겸비한' 혹은 '고톧받는'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마음이 상한 자)이란 시편에서 종종 '가난한 자'와 병행으로 사용된다.

이사야서 57장 15절에서 처럼 바빌론에서 귀환하기 전, 예루살렘 폐허 주위에 있던 낙심한 유대 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ㄷ~2) 

'포로''피지배자들'이라는 유대적 의미를 나타내는 은유들인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택하신 도구를 통해서 베푸시는 자유가 선포된다.

'해방(석방)을 선포하다'에 해당하는 '리크로 데로르'(lichro deror)라는 말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희년'에 대해 사용되는데(레위25장 참조), 매 50년마다 있는 종들의 해방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은 포로로부터의 해방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

 

바빌론 유배생활로부터의 귀환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의 권리 회복과 건물의 재건은, 긴 감금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힘의 남용과 부정한 사용이 절대적이었던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희생자들의 자유와 범죄자들의 처벌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이사 61,1~2).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의 재건과 회복석재와 회반죽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이 새로운 도시가 완전히 아름다워지기 위해 새로운 영과 새로운 마음의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0) 

이사야서  61장 10절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통치자의 고백이다.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도시로서의 예루살렘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 체제를 안정시키고 팔레스티나를 완전히 지배한 그의 성공에 대해 하느님께서 '구원'과, '의로움'에 해당하는 '체데카'(chedeka)을  선물로 주시고, 구원을 보장하고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이다.

 

성전을 재건한 자신에게 구원과 합법성을 부여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새순'과 '싹'으로 상징되는 '새 일'들을 주시며, 팔레스티나의 여러 민족을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통치를 계속 지지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기대한다(11).

 

우리도 이 대림절에 회개와 자선을 통해 무너진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복구하면, 구원과 의로움을 보증받고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즐거움을 영혼의 선물로 받을 것이다.

또한 미래에도 여러 사람들과 공동체 앞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칭송받고, 새 일을 끊임없이 하며 공동체안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대림 제3주일 복음(요한1,6~8.19~28)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27)

 

요한 복음 1장 26-27절병행 구절 마르코 복음 1장 7절에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라고 되어 있다.

'~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번역된 '이스퀴로테로스'(ischyroteros; one mighter than I; one more powerful than I)원형 '이스퀴로스' (ischyros)마르코 복음 3장 27절루카 복음 11장 22절에서는 '힘센'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물리적 힘이나 세상의 권세가 아닌, 특히 '영적인 면에서의 권세의 우월'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뿐만 아니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지배자 ('사탄'; 에페2,2) 보다 더 힘센, 온 우주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사도17,24; 히브2,8). 

그리고 '오시는'에 해당하는 '에르케타이'(erchetai; is coming)는  직설법 현재 동사이다. '앞으로 오실 것이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계신다'는 뜻이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즉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누구신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해서 유대인들을 향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다는 임박한 종말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그분이 그때 자기 뒤에 오고 계시다는 긴박한 상황을 생동감있게 전해주고 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신발 끈을 풀다'(to untie whose sandal strap)는 표현은 당시 근동 지방의 사회적 풍습과 관련이 있다.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발에서 신발 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그 발을 씻겨야 했다. 당시 발을 씻는 일 가장 비천한 종들이 하는 불결한 일 중의 하나였다.

 

당시 랍비의 교훈 중에 '학생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그 스승에게 해야 한다. 그러나 종이 주인의 신발 끈(신들메) 푸는 일만 제외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신발 끈 푸는 일종이 하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천박한 일에 속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에 대해서는 그런 일조차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극도의 겸손을 갖추어 말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고 칭찬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느님 대전에 높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준다'고 말한다.

세례자 요한이 주는 세례'물 세례'로 번역되는 '에밥티사 휘다티' (ebaptisa hidati)인데 반해서, 오실 메시아가 주시는 세례'성령 세례'로 번역되는 '밥티세이 엔 프뉴마티 하기오' (baptisei en pneumati hagio)라고 마르코 복음('성령')과, 마태오, 루카 복음('성령과 불')에 나온다.

 

세례자 요한의 '물 세례'는 세례받는 이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세례였지만,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람으로 삼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세례'성령을 부어 주시는 세례'이므로, 세례받는 이로 하여금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특히 성령의 역사와 관련한 이미지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불'해당하는 '퓌리'(pyri; fire)성령의 활동과 관련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정화', '심판', '조명'의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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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세례자 요한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일 뿐이며 빛이 아니라고

요한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참 빛’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신 분입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리가 예수님만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등대, 또는 신호등 같은 분입니다.

등대나 신호등 덕분에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끝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신앙인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곳을 향해서 가는 사람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19-21).”

여기서 사람들이 언급한 ‘엘리야’는 ‘메시아(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당시에 엘리야를 메시아보다 먼저 오는 예언자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엘리야가 곧 메시아’ 라고 생각하고서 기다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 예언되어 있는 예언자인데,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질문들은,

표현만 바뀌었을 뿐 전부 다 “당신이 메시아(그리스도)요?” 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계속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여기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라는 표현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외치는 이’와 ‘소리’가 따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다.” 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아마도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요한 1,14).” 라는

신앙고백과 관련되어 있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말씀’의 활동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소리’일 뿐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에는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세례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표시하는 세례일 뿐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겸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의 말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이 아니라,

메시아의 구원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또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은 보려고 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만 보고 있습니다.

(뜻을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의 말은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라.”입니다.)

오늘날에도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세례자 요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와 구유의 장식에만 정신을 빼앗겨서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는 성탄절 행사만 신경 쓰고 성탄절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왜 오셨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성탄절을 그냥 즐기면서 노는 날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빛’이신 분입니다.

그 빛을 제대로 받으려면 자신 안의 어둠을 먼저 제대로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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