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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1일 파르잠의 성 콘라도 수도자♬Fratello sole e sor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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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4-21 ㅣ No.1722

 

축일:4월21일         

파르잠의 성 콘라도 수도자, OFM Cap.
San Corrado (Giovanni Evangelista) Birndorfer da Parzham Cappuccino
Venushof, Parzham, 22 dicembre 1818 - Altötting (Bassa Baviera), 21 aprile 1894
Etimologia: Corrado = consigliere audace, dal tedesco
= audacious councilman, from the German
Saint Conrad of Parzham
Also known as : Conrad Birndorfer, Hansel Birndorfer, Johann Birndorfer, Johannes Birndorfer, John Birndorfer, Konrad av Parzham, Konrad from Parzham
Born : 22 December 1818 at Parzham, Bavaria, Germany as Johann Birndorfer
Died : 21 April 1894 in Altötting, Bavaria, Germany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15 August 1928 by Pope Pius XI (decree of heroic justice)
Beatified : 15 June 1930 by Pope Pius XI
Canonized : 20 May 1934 by Pope Pius XI

 

 

곤라도(1818 - 1894)는 바바리아 지방 빠르잠 근처의 농촌에서
가난하지만 독실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로사리오를 바쳤다.

 

젊은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후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를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까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서원 후에는 유명한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 성지인 알떼팅에 파견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지를 찾아 오는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봉사하는 짐꾼의 직책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40 여년 동안 자신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곤라도는 특히 성체성사에 집중하는 끊임없는 기도 생활로 이름 높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콘라드는 파르챰의 바바리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드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프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므로,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콘라도는 1818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바쏘 교구이 작은 촌 파르잠(Parzham)에서 소박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경건한 모친은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덕에 출중해 그 당시는 아주 드물게도 7세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어렸을 때부터 벌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일찍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세상 재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이 소년 시절을 깨끗한 백합화같이 보냈다.그것은 물론 그가 신심 생활에 열심했기 때문인데,세속을 떠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지키며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영적 교제를 해 온 덕분이다.참으로 그는 기도를 극히 즐겨 노동으로 피곤해졌음에도 여전히 무릎을 끓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번 있었다.

 

   이 열심한 청년은 1851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본받아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해 수도회의 가난한 수도복을 걸치게 되었다.그리고 1852년에 엄숙한 서원 의식을 마치고 나서는 장상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워 중책임인 알도에팅에 있는 성녀 안나 수도원의 문지기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충실히 근무한 40여 년 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단히 힘든 때도 있었던 문지기를 조금도 불쾌한 안색을 보임이 없이 성심 성의껏 완수하며, 그 유명한 영지를 찾는 모든 방문객에게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로서 접대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콘라도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고요한 수도 생활을 보내며 기도와 고행으로써 숭고한 완덕에 도달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줄때는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권면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자신의 양식을 절약해 궁핍한 자에게 베풀어 줄만큼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들 측에서도 그를 따르게 되어 그의 훈계를 잘 따랐고, 그도 그들을 만날때 마다 항상 마음을 터놓고 재미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빵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는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데, 콘라도는 사실 그들의 기도에는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몇년 후 그 아이들 중 몇명은 사제가 된 자도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콘라도의 착한 지도와 기도 덕분이라 하겠다.

 

 

  "우리는 기도해아 한다!" 이는 늘 콘라도가 했던 말씀이다. 그는 그 말과 같이 실지로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 3시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그가 기도에 몰두해 하느님과의 상통으로 말미암아 만사를 잊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며 그의 몸에서 후광(後光)이 비치는 것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콘라도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는 또한 수난하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시간이나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수사 콘라도의 생애는 고요히 지나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1894년 4월 21일 이 충실한 종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다. 때는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삼종소리가 읍내를 지나 은은히 먼 들로 사라지는 때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서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섭섭히 생각지 않은 이 없었다.

 

  살아 있었을 때 자선사업을 많이 행한 콘라도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국에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때로는 그의 묘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그의 전구를 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풍부한 효험이 있는 것을 보고 콘라도에 대한 신뢰의 정은 점점 높아졌다. 그의 전구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30년 6월 15일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34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장엄한 예식의 거행중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맥주 맛을 잘 아는 거룩한 문지기, 파르잠의 성 콘라도     

 

맥주와 성덕
"맥주 두 조끼 말이오? 독일 출신 처녀라면 맥주 두 조끼로 술이 취할 리가 없지 않소!" 당시 뮌헨 대주교는 시성조사 심문관에게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시성조사 심문관이 젊은 여인들을 포함한 모든 형제회 손님들에게 맥주 두 조끼씩 마실 것을 줌으로써 여성 혼취를 조장했던 것 같은 그 시성 후보자의 성덕에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 시성 후보자가 카푸친회의 거룩한 문지기였던 '파르잠의 성 콘라도'였음을 알고 있다.

그는 남독일의 농부 아들로서 자기 민족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어서 와, 한 잔 더 하십시오."라는 말로 콘라도 성인은 나름대로 물 한잔 주라는 복음의 권고를 형제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실천했다. 그러므로 순례자가 많이 올 날 아침이면 콘라도는 맥주 양조업자 형제에게 "오늘은 맥주 많이 만들어 두게나."하고 미리 대비하곤 했다.
 



신앙심이 깊은 젊은 농부
바르톨로메오 비른도르퍼(Birndorfer)와 게르트루다 니더마이어(Niedermayer)의 아들로 1818년에 태어난 콘라도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출생지는 '파르잠(Parzham)'이라는 바이에른의 농촌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성적이 좋았으나 어버이가 젊은 나이에 죽어서 요한은 농사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 시절의 요한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지, 얼마나 기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지 잘 알고 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성당에 다녔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도 오래 동안 혼자서 기도하곤 했다. 그는 특히 성모신심이 깊었고 바이에른의 성모성지들을 걸어서 순례하기도 했다.


카푸친 평형제 되다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꼈던 요한은 결국 1849년에 농장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고, 알퇴팅(Altötting) 성모성지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평형제로 입회하여 '콘라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는 이미 만 31살의 성인이었다. 몇 년간의 양성을 받은 후에 그는 알퇴팅 형제회의 문지기라는 사명을 받았다.


 

수줍음이 많은 문지기
그로부터 49년 후 그가 죽는 날까지, 콘라도 형제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 문지기 봉사에 최선을 다했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 탓에 기도 하는 것과 고독한 생활에 매력을 느꼈지만, 알퇴팅 형제회의 정문 앞은 공교롭게도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하지만 콘라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했으며, 특히 멀리서 온 순례자들을 반갑게 환대했다. 그 누구든지 콘라도에게서 건강에 좋은 음식과 시원한 맥주가 담긴 '슈타인'이라는 독일식 큰 잔을 늘 받을 수 있었다.


스스로도 맥주를 마시기를 좋아함
콘라도 스스로도 매일 시원한 맥주 한 잔 정도를 즐겼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로마 성성의 관리인들은 시성 후보자가 매일 맥주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에 놀라워 그 맥주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단다. 그래서 콘라도 형제가 마셨던 맥주 한 통을 독일에서 로마로 보내라고 명명하였는데, 20세기 초였던 그 당시 맥주를 로마까지 보낼 수 있는 효과적 교통수단은 기차뿐이었다. 그 시절에 기차에 냉장고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한 여름 뙤약볕에 도착한 그 맥주는 시원하기는커녕 맛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관리인들은 그 맥주를 한 입 맛보고는 '그 사람은 분명 이 맥주를 고행으로 마신 것이로구나!'하고 결론을 내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
콘라도 형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였다. 특히 가난한 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아이들을 위한 덕담dmf 즐겨 들려 주곤 했다. 때로는 찾아오는 거지들이 그가 내어주는 소박한 음식에 불만을 터트리며 메뉴를 바꾸라고 귀찮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비로운 콘라도 형제는 그들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응했다. 한번은 콘라도 형제가 그들에게 '오늘 우리는 빵과 국물 대신에 국물과 빵을 대접할 것입니다.' 라고 농담을 한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건네받은 뜨거운 국물을 나이 많은 콘라도 형제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너그럽고 인내심 많은 콘라도는 마냥 미소를 지으며 아무일 없는 듯이 얼굴을 닦고 계속 일을 했다.



욥과 같은 대단한 인내
인내심은 콘라도가 가진 탁월한 덕행이었다. 아이들은 그 인내심을 실험하려고 짓궂은 행동을 많이 했다. 초인종을 울리고 그가 나타나기 전에 도망간 적은 흔한 일이었고, 부재중인 사제들의 이름을 외우고 차례로 와서는 그 사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여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나이 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콘라도 형제는 아이들의 요구에 아무른 불평없이 끊임없이 계단에 오르내리며 확인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어린 손님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표하곤 했다. 그래도 그 철없는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콘라도에게 달려가서 예전에 그가 가르쳐줬던 짧은 기도를 함께 바친 다음 음식 몇 조각을 받아 먹곤 했다.



콘라도 형제의 매일 일정표 
콘라도의 일상적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수년 동안 앓고 있었던 제의실 담당 형제를 대신하여 새벽 3시반이나 4시쯤에 성당문을 열었고, 4시 반이면 은총들의 경당(Gnadenkapelle)에서 5시 새벽미사를 하기 위해 사제를 깨웠다. 그리고 미사에서 복사 역할을 했다. 콘라도는 성체 신심이 매우 깊었는데, 다행이 영적지도자의 도움으로 그 당시 매우 드문 '매일 영성체'를 할 수가 있었다. 이외에도 매일 아침에 한 번 더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에 대한 열성을 보이며 자주 묵상으로 빠져들었다.]

정식으로 문지기의 의무가 시작되는 아침 6시부터는 '미사예약일지'를 확인하여 신자들이 요구한 한 성물과 축복된 씨앗이나 약초로 만든 약을 정리했고, 신자들이 예물을 전할 땐 기도할 때에 기억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곤 했다. 미사를 위하여 재단을 준비하였고 늘 제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방문하는 사제들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고, 축복이나 고해 성사를 구하는 손님을 위하여 사제 형제들을 부르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다.

그 지역에는 손님이 왔을 때 맥주와 먹을 것을 내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한 형제회 수호자가 이 풍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것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자 순례자들의 불만이 드높아졌는데 이 모든 불만을 문지기인 콘라도 형제가 다 들어주어야만 했다.


 

오전 11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프를 받으러 오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콘라도는 부엌에 가서 국물과 고기 완자를 요리사 형제한테 달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콘라도가 나타나자 주방장 형제가 "모든 냄비들을 덮어라! 아니면, 그가 모든 것 다 빼앗아갈 거야!” 하고 농담을 했는데, 그러자 콘라도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갚게 될 것이오."하고 대답하곤 했다. 콘라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수프를 먹여줄 때였다.
 

보통 12시가 되면 공동체 기도에 참석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식사 때에 초인종이 울릴 때면 콘라도는 한사코 먼저 일어나 정문으로 갔다. 돌아오면 음식이 다 식은 상태일 때가 많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2시 반부터 오후 2시가지 쉬는 시간이었지만 콘라도는 쉬지 않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은총들의 경당 제단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계단 밑에 있는 작은 창고에 들어가 감실을 향해 조용히 묵상을 하곤 하였다.


 

오후가 되면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는 사제들을 맞아들였고, 틈틈히 신자들이 털어놓는 고민들을 들어주며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위로해주곤 했다. 오후 4시쯤에는 학교를 마치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빵 조각을 쥐어 주기도 하고, 그 사이에 시간이 있으면 성경 구절을 읽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과 같은 여러 종교서적을 읽곤 했다. 오후 7시, 저녁 식사후 손님이 없을 경우, 성체조배를 하거나 묵주를 만들곤 했고, 저녁 9시가 되면 성당문을 닫은 다음, 하느님과 시간을 홀로 가지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기도에 지쳐 깜빡 잠에 빠진 일도 있었다. 


 

콘라도의 침묵과 기도
침묵과 기도와 묵상은 그에게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분위를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말해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하느님이나 거룩한 일들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곤 했고, 항상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도록 노력했다. 시사나 뉴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873년, 아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콘라도 자신의 내면생활을 대해 묘사한 구절이 있다.


 

"나의 생활방식은, 사랑하고 고통받고, 경탄하고 흠숭하며 나같이 불쌍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하여 마지 않는 거야. 이토록 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다 보면 끝이 없게 된다. 여기에 나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럴때 난 좋으신 하느님과 아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단다.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일 중에서, 분주하면 분주할수록 나는 하느님과 더욱 일치되어 있음을 느껴. 이때 나는 마치 사이 좋은 부자지간처럼 그분과 아주 다정하게 사랑을 나눈다.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짓누르는 나의 온갖 사정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지. 그리고 마치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이러저러한 은총을 주시라고 부탁드린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다시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나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이지. 난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싶다....(중략)... 나는 하느님 안에서 항상 만족하고 행복하다. 나는 기쁨이건 고통이건 그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으로 발아들여. 그분은 내게 무엇이 제일 좋을지를 아시니까. 이렇게 나는 하느님안에서 항상 행복하다. 나는 그분을 올바로 사랑할려고 노력해. 내가 그분을 그토록 적게 사랑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이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그래, 나는 사랑에 불타는 세라핌 천사가 되고 싶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모든 피조물을 불러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 시간씩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같은 편지 안에서 이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십자가는 나의 책이지. 십자가는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문지기 콘라도는 천국의 문 앞에서 환영을 받다
1894년 4월 21일, 마지막 순간까지 의무를 다한 파르잠의 콘라도 형제는 "이제 영원을 위하여 준비해야지.." 하면서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알퇴팅에 사는 한 사진가는 죽음 자매가 안긴 콘라도 형제의 시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콘라도의 유일한 사진이다. 콘라도는 빠른 시일에 1930년에 복자가 되어 1934년에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시성을 받았다.

40년 동안이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따뜻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거룩한 카푸친의 문지기는 이제 어린양의 천상 잔칫상에서 영원한 대접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Fratello sole e sorella luna-Claudio Baglioni

 

 

 

 

 

 

 

 

 

 

 

 

 

 

 

 

 

 

 

 

 

 

 

 

 

 

 

 

 

 

 

 

 

 

 

 

 

 

 

 

 

 

 

 

 

 

 

 

 

 

San Corrado (Giovanni Evangelista) Birndorfer da Parzham Cappuccino
21 aprile 
Venushof, Parzham, 22 dicembre 1818 - Altötting (Bassa Baviera), 21 aprile 1894

Nacque a Venushof in Parzham il 22 dicembre 1818 da una famiglia di ricchi contadini dalla spiccata devozione. Penultimo di dodici fratelli, rimase orfano a 16 anni. Da subito si dedicò alla vita spirituale secondo la tradizione cattolica bavarese frequentando assiduamente la celebrazione eucaristica quotidiana. Ma coltivò nella sua vita anche tutte le forme della più autentica pietà popolare della sua regione, la Baviera. Conosciamo poco dell'infanzia ma sappiamo per certo che a 19 anni tentò, senza esito, di studiare nel ginnasio dei benedettini di Metten a Deggendorf. Era il 1841, invece, quando professò la regola del Terz'Ordine francescano e nel 1849 entrò tra i cappuccini di Altötting come terziario. Durante il noviziato a Laufen fu incaricato di aiutare l'ortolano e il giardiniere del convento. Il 4 ottobre 1852 emetteva la professione solenne e fu rimandato ad Altötting con l'ufficio di portinaio del convento di Sant'Anna, che ora è dedicato allo stesso san Corrado, dove rimase fino alla morte, avvenuta il 21 aprile 1894. (Avvenire)

Etimologia: Corrado = consigliere audace, dal tedesco


Martirologio Romano: Ad Altötting nella Baviera in Germania, san Corrado (Giovanni) Birndorfer da Parzham,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svolse per oltre quarant’anni l’umile servizio di portinaio e, sempre generoso verso i poveri, non congedò mai nessun bisognoso senza prima offrirgli benigne parole di cristiano conforto.

Nella numerosissima schiera di santi, beati e venerabili della grande Famiglia Francescana, spiccano singolari figure di frati, pieni di santa umiltà e semplicità, i quali raggiunsero questa meta, adempiendo con scrupolo e carisma personale, all’umile compito di portinaio del convento in cui vissero per lungo tempo o addirittura tutta la loro vita religiosa.
E come s. Serafino da Montegranaro (12 ottobre), s. Pasquale Baylon (17 maggio), il beato Mariano da Roccacasale (31 maggio), tutti francescani e il beato Andrea Bassette canadese della “Congregazione della Santa Croce” (6 gennaio), anche san Corrado da Parzham, trascorse tutta la sua vita di cappuccino, facendo il portinaio del suo convento di Altötting in Germania.
Era nato il 22 dicembre 1818 nella fattoria di Venushof in Parzham presso Passau (Baviera), penultimo dei 12 figli dei coniugi Birndorfer, al battesimo ebbe il nome di Giovanni Evangelista.
A 16 anni era già orfano di entrambi i genitori; dalle scarne testimonianze venne descritto come un ragazzo mite, allegro, dolcissimo, amante della natura, sano e forte per i lavori dei campi a cui si dedicò.
Amava il lavoro e mentre dissodava il terreno, recitava il rosario che teneva sempre legato al polso; pur essendo figlio del padrone, lavorava volentieri con e fra i dipendenti, diffondendo serenità, armonia e gioia.
Appena poteva, si raccoglieva in preghiera, devota, solitaria e prolungata, nelle varie chiese e santuari del circondario e spessissimo si accostava alla santa Eucaristia; a 19 anni tentò di frequentare il ginnasio dei Benedettini di Metten a Deggendorf, ma senza esito; nel 1841 a 23 anni, professò la Regola del Terz’Ordine Francescano.
Avrebbe dovuto amministrare l’azienda ereditata dai genitori, ma sentendosi chiamato alla vita religiosa, vi rinunziò; divise la sua parte ereditata tra i poveri e alcune Istituzioni ecclesiastiche e a 31 anni nel 1849, Giovanni Evangelista Birndorfer bussò alla porta del convento cappuccino di S. Anna ad Altötting.
Fece il noviziato a Laufen e qui ebbe l’incarico di aiutare l’ortolano e il giardiniere del convento; nei primi tre anni fu impegnato nella formazione alla vita cappuccina, perfezionando le virtù e lo spirito di preghiera.
Il 4 ottobre 1852, si consacrò per sempre al Signore, facendo la professione religiosa e prendendo il nome di Corrado; poi fu rimandato al convento-santuario di Altötting nella sua Baviera destinato all’ufficio di portinaio.
In quest’umile ma delicata funzione, visse per ben 41 anni fino alla morte, contento di vivere in quel luogo, sede dell’antico Santuario della Madonna, centro e riferimento della religiosità e pietà bavarese.
Fra Corrado da Parzham svolse il suo compito, in apparenza monotono e senza importanza, con tatto e zelo, con fedeltà e poche parole, sempre calmo e paziente, mai annoiato, nervoso o triste, sempre pronto all’obbedienza e disponibile; edificava i confratelli ed i pellegrini del Santuario mediante l’esercizio della carità e di una inalterabile pazienza.
Ben presto in tutta la Bassa Baviera, si diffuse la fama di quel “santo portinaio” e alla porta del convento di S. Anna, ora dedicato a San Corrado, cominciarono a suonare la tipica campanella, molte persone per chiedere proprio all’umile frate aiuto e conforto; ormai tutti sapevano che il suo cuore era sempre aperto ad accogliere i fedeli.
Devoto della Vergine e dell’Eucaristia, dotato di doni straordinari, come la profezia, operò un risveglio di fede nelle province circostanti, un padre Pio da Pietrelcina dell’epoca.
Al portinaio del convento cappuccino, era affidato anche il compito di distribuire il cibo ai poveri, e lui, sempre con la corona in mano, lo faceva con soddisfazione, illuminandosi nel volto, riflettendo l’esempio del Poverello d’Assisi.
Era la sua ‘felicità terrena’, distribuiva minestra, pane e carne ai poveri, agli accattoni, ai garzoni operai, ai ragazzi, andando in cucina a scegliere i pezzi migliori; sordo alle esortazioni a moderare la sua generosità.
“Tutto ciò che si dà ai poveri, ritorna nuovamente dentro con abbondanza”, era la sua risposta ai confratelli; cooperò anche all’opera benefica ‘Liebeswerk’, in favore dell’infanzia abbandonata e in pericolo; la sua generosità si allargava ai numerosi pellegrini del santuario, ai quali distribuiva birra e pane, raccomandando però al confratello fra Deodato, addetto alla birreria del convento, di farne “molta e leggera”.
Lavorò fedelmente fino alla fine; il 18 aprile 1894 al termine di una giornata stressante, si mise a letto “per prepararsi all’eternità”. Morì all’alba del 21 aprile 1894 a 76 anni.
Dopo l’approvazione dei miracoli attribuiti alla sua intercessione, papa Pio XI lo dichiarò Beato il 15 giugno 1930 e cosa insolita per i processi di canonizzazione, dopo solo quattro anni, il 20 maggio 1934 lo stesso pontefice lo proclamò Santo.
La festa liturgica è il 21 aprile, giorno del suo trapasso.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6-02-17

 

 

 

 

 

 

Saint Conrad of ParzhamApr 212012 
Also known as
Conrad Birndorfer
Hansel Birndorfer
Johann Birndorfer
Johannes Birndorfer
John Birndorfer
Konrad av Parzham
Konrad from Parzham


Memorial
21 April

Profile

Youngest of nine children born to a farming family in a region recovering from the Napoleonic wars. His mother died when he was 14. Devoted from an early age to solitary prayer and peacemaking, he was a familiar site at all the churches and shrines in his region, often waiting at the door at sunrise for first Mass.

Capuchin tertiary at age 31; Capuchin novice at age 33, taking the name Conrad. Assigned to the shrine of Our Lady of Altotting. For more than 40 years Conrad was a porter, admitting people to the friary, obtaining supplies, dispensing alms, encouraging all to open themselves to God, and generally assisting the thousands who came to the friary on pilgrimages. Worked with local children, teaching them the faith and practices, and supported charities for them. Noted for the gifts of prophesy and of reading people’s hearts.

Three days before his death he realized he could no longer perform his duties, and relinquished the position; he then celebrated Mass, and took to his sick bed for the last time. Local children whom he had taught the rosary recited it outside his window until the end.

Born
22 December 1818 at Parzham, Bavaria, Germany as Johann Birndorfer


Died
21 April 1894 in Altötting, Bavaria, Germany of natural causes


Venerated
15 August 1928 by Pope Pius XI (decree of heroic justice)


Beatified
15 June 1930 by Pope Pius XI


Canonized
20 May 1934 by Pope Pius XI


Patronage
Capuchin-Franciscan Province of Mid-America
Catholic Student Association
doorkeepers
Passau, Germany, diocese of (since 1984)


Images
Gallery of images of Saint Conrad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puchin Province of Mid America
Capuchins of Bayern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Hagiography Circle
Kirken i Norge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Readings

It was God’s will that I should leave everything that was near and dear to me. I thank him for having called me to religious life where I have found such peace and joy as I could never have found in the world. My plan of life is chiefly this: to love and suffer, always meditating upon, adoring and admiring God’s unspeakable love for his lowliest creatures. - letter of Saint Conrad

I resolve in the first place to remain continually in the presence of God and to ask myself frequently if I would do this or that if my confessor or superior were watching me and especially if God and my guardian angel were present.
I resolve to ask myself, whenever I have to encounter crosses of suffering, “Conrad, why have you come here?”
I resolve to avoid leaving the friary, as far as possible unless it be out of love for my neighbor, obedience, reasons of health, a pious pilgrimage or some other good cause.
I resolve to foster fraternal charity in myself and in others. Therefore I resolve to take care never to say an unkind word. I resolve to bear up patiently with the defects and weaknesses of others, and as far as possible to hide them with the mantle of charity unless I am in duty bound to manifest them to someone who is in a position to correct them.
I resolve to observe silence conscientiously. I resolve to speak briefly and so avoid many pitfalls and be better able to converse with God.
When at table I resolve to place myself in the presence of God as far as I can, to remain recollected and to pass up my favorite dishes so as to practice a hidden form of mortification. I resolve not to eat between meals unless ordered to do so under obedience.
I resolve to answer the first call of the bell unless legitimately hindered.
I resolve to avoid, as far as possible, conversing with the opposite sex unless obedience imposes duties on me which make it necessary to speak with women. In that case I resolve to be very reserved and maintain custody of the eyes.
I resolve to carry out orders punctually and to the letter. I resolve especially to make every effort to conquer my own will in all things.
I resolve to force myself to pay close attention to minor details and as far as possible avoid every imperfection. I resolve to observe the holy rule faithfully and not to depart from it a hairsbreadth, come what may.
I resolve to cultivate a deep devotion to the Blessed Virgin Mary and strive to imitate her virtues.
- resulutions of Saint Conrad at the time of his novitiate

I have come to spend a few moments with Thee, O Jesus, and in spirit I prostrate myself in the dust before Thy Holy Tabernacle to adore Thee, my Lord and God, in deepest humiliy. Once more a day has come to its close, dear Jesus, another day which brings me nearer to the grave and my beloved heavenly home. Once more, O Jesus, my heart longs for Thee, the true Bread of Life, which containes all sweetness and relish. O my Jesus, mercifully grant me pardon for the faults and ingratitutde of this day, and come to me to refresh my poor heart which longs for Thee. As the heart pants for the waters, as the parched earth longs for the dew of heaven, even so does my poor heart long for Thee, Thou Fount of Life. I love Thee, O Jesus, I hope in Thee, I love Thee, and out of love for Thee I regret sincerely all my sins. May Thy peace and Thy benediction be mine now and always and for all eternity. Amen. - a spiritual communion by Saint Conrad

MLA Citation

“Saint Conrad of Parzham”. Saints.SQPN.com. 21 April 2012.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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