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가해) 마태 17,1-9; ’23/08/06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7-27 ㅣ No.5471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가해) 마태 17,1-9; ’23/08/06

 

 

예전에는 천주교에서 자살을 금지하기 때문에, 자살자에 대해서는 연도도 안 해주고 장례미사도 드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은 하느님에게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자기 생명이라고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므로 스스로 생명을 끊을 수 없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지금은 자살자가 명시적으로 신앙을 거부하는 의미로 고의로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면, 천주교 장례절차를 다 따르게 해줍니다. 현대 의학윤리와 윤리신학에서도 자살 할 때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정상적으로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자살을 죄라고만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자살을 하게 되기까지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고,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그 사람이 자살하기까지 전혀 돌보지 않았던 우리 믿는 이들의 무관심과 소홀함을 자책합니다.

 

그런데 자살이란 단어조차 입에 담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에, 어느 신자 한 분이 자신의 아버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두고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야말로 억울하고 비참하게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린 안타까운 마음을 성당에 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성당에서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그 당시 성당에서는 자살을 죄로만 단죄하고 멀리할 뿐, 결과적으로 자살함으로써 죄인이 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위로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고 느꼈답니다. 그 성당의 냉담한 반응에 낙담한 그 신자는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아버지의 넋을 위로해 드릴 방안을 고심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오랜 냉담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신부님께서 그 신자분에게 주 예수님께서는 자살하신 너의 아버지를 위해서도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다.”라고 말씀해 주셨답니다. 그 한 마디가 한 평생 짐처럼 그 신자의 가슴 깊이 멍울로 맺혀 있던, 아버지의 자살로 인한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셨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주셨고,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확 다가왔고, 오랜 냉담을 푸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죄와 상처로 인하여 갇혀있던 자신을 해방시켜 주어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를 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제사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이 빛처럼 하얗게 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라고 고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에 대한 반전이라도 펼치듯 곧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5) 라고 전합니다. 아울러 제자들이 이 소리를 듣고 반가움에 환호하기 보다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6) 라고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주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을 전혀 반기지 않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왜 주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충심 어린 봉헌과 접대를 거부하셨을까?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에 숨겨진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베드로는 특별히 다른 이유 없이 단지 어른들이 오셨으니 대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주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와 엘리야와 논의하는 가운데 그 거룩한 소명으로 인하여 영광된 환한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세상 사람들을 위한 희생이라는 주 예수님의 본질적인 소명을 포기하고, 여기 이 땅에서 자신들과 영화와 평안을 누리자고 하며 유혹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청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주 예수님의 사명을 재확인하며, 제자들을 저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가 부활에 이르는 희생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그 때서야 영광스러운 오늘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

 

문득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6-8)

 

이 현성용 기사를 바라보면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오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하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봅시다.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 자체로는 부담스러운 명제이지만,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동생들을 위해 맏이가 희생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발로가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