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기도 - 이해인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그 이름 사랑이신 주님
사랑하는 이에게도
더러는 잊혀지는 시간을
서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소서
길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가 손님일 뿐
아무도 내 최후의 행방을 묻는
주인 될 수 없음을 알아듣게 하소서
그 이름 빛이신 주님
한 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누워 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 - -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 풀꽃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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