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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성령 받아라 (요한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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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20 ㅣ No.103

 

[성령강림 대축일]성령 받아라 (요한20,19-23)

 

 

오순절에 사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사도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1코린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제1독서 (사도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2,1~4)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진행된 복음 전파 활동이 기록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사건들을 기록한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전환적 과정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이 될까봐 도망가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하나 둘 다시 모이게 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쫓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가운데 사도들이 중심이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결정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태동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다.  그 가운데서 사도행전 2장 1~4절까지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자체를 다루고 있다. 

실로 오순절에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성령행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도행전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원문은 '엔 토 쉼플레루스타이 텐 헤메란 테스 펜테코스테스'(en to ymplerusthai

ten hemeran tes pentekostes;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로 시작되는데, 직역하면 '그 오십일째 되는 날'이다.  

 

 

오순절의 유래는 농업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농업적 배경에서 살펴보면, 오순절유월절(과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로부터 7주 후의 그 다음 날을 계산하여 지키는 날이다. 이 날은 보리 추수를 기념하여 지켰으므로, 추수절(개신교에서는 맥추절, 초실절, 칠칠절; 탈출 23,16; 34, 22)이라고 부른다.

오순절이라는 우리말 이름은 다섯을 가리키는 '오'(五)열을 가리키는 '순'(旬)결합시켜 '50일째 되는 절기'란 뜻이다. '다섯'을 뜻하는 '펜테'(pente)의 배수를 서수로 바꾸어 '오십번째'란 의미를 지니는 '펜테코스테'(pentecoste)라고 기록한 것을 우리말로 바로 번역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러한 오순절은 구약 시대부터 유월절과 장막절(초막절) 사이에 지켜지던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농업적 성격을 지니는 축제였다(탈출 34,22.23; 레위 23,15.16).

유다인들은 이 날에 누룩 없는 빵을 먹은 유월절과 무교절과 달리(레위23,6) 누룩을 넣어 구운 보리 빵 두 개를 만들어 주님께 맏물로 흔들어 바쳤다(레위23,17).

 

40년 광야 생활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연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첫 곡식을 수확함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낼 능력으로서의 성령께서 영혼의 양식으로 부어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날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월절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라면, 오순절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의 이런 구약적 의의는 신약 시대의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초대 교회의 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16절에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고려한다면, 오순절이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는 물론 초대 교회 때까지도 성대하게 지켜질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2장 5절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만큼 오순절이 매우 중요한 절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날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위의 농업적, 역사적 배경에서도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초대 교회의 급속한 확장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격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 2장 후반부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감명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각기 고향에 돌아가서도 성령의 역사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마음 속에 간직했을 것이고, 후에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성령 강림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처럼 여러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2~3)

 

1) 상징에 대한 분석을 통한 해석 

2절에서 4절까지 살펴볼 때, 성령이 임함으로써 나타난 결과가 마치 바람과 불과 방언 세 가지처럼 보인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초자연적인 어떤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일 뿐이다.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는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지 못했다. '~듯한(같은)"에 해당하는 '호스페르'(hosper)가 '바람'에 해당하는 '프노에스'(pnoes)가 아니고, '몰아치는'(rushing) 혹은 '으르렁거리는'(roaring)에 해당하는 '페로메네스'(pheromenes)를 수식하고 있다.

'페로메네스'는 속도를 강조하는 '급하고'(부는)가 아니고,  상태나 정도를 강조하는 '몰아치는' 이나 '으르렁거리는'이 더 적확한 뜻이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거센(강한)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라고 해야 한다. 새 성경이 '부는 듯한'이라고 번역했는데, '으르렁거리는 듯한' 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즉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고, 바람이 내는 것 같은 '소리'(에코스: echos; sound)이다.  3절에서 역시 강조하는 것은 '불'이 아니고, 혀가 '갈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4절의 방언의 경우도 '방언'이 아니라 '다른 언어'라고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바람, 불, 방언이란 세 가지 상징의 매체는 성령 강림 때 일어난 특별한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 뿐이다.

저자는 성령 강림으로 인한 초자연적 현상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각 기관들인 (바람~소리), (불~혀가 갈라지는 것), (방언~다른 언어)과 관련된 세 가지 자연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성령 강림에 수반되는 이 세가지 현상을 복음 전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거센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는 복음 전파를 위한 힘(능력)이고(사도 1,8; 루카24,49),  불처럼 갈라지는 것은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하기 전, 예언자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제단에서 타는 숯을 입술에 댄 것처럼 (이사6, 6-8) 복음 전파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정결을 상징하며, 다른 언어는 여러 나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언어 도구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결국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가장 큰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2) 이미지를 통한 해석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에제키엘 37장에 기록된 마른 뼈 환시에 등장하는 생기의 이미지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에제키엘 37장 9절에서는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에제키엘의 명령에 따라 숨(생기: breath)는 바람(wind)처럼 불어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또한 요한 복음 3장 8절을 보면, 예수께서 니코데모에게 영으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는,임의로 부는 속성을 예로 드셨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를 이와 같은 이미지와 연관지어 보면, 결국 성령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범죄로 하느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남으로써, 모든 인간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창세 2,17; 3,19; 6,3; 에페2,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면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을 보내 주셨다.

 

3)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석 

이것은 본 단락의 내용을 탈출기 19장 16-18절에 기록된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의 현현(Theophany)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탈출기 19장 16절의 '우레소리와 나팔소리'와 탈출기 19장 18절의 '산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표현은 본절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대구를 이루고, 탈출기 19장 16절의 '번개'와 탈출기 19장 18절의 '(주님께서)불속에서 그 위로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표현은 3절의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와 대구를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오순절이,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열매를 얻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라는 의미를 가졌지만, A.D.1세기경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이해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모세 시대의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율법을 세움으로써 계약 백성과 그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관계로 맺어지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사실과 관련지울 수 있는 것이다.(탈출19장)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시작이 되는 본장의 오순절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예수님의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백성과 왕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한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로 맺어지는 구원사의 큰 획을 긋는 날이다.  

즉 구약의 오순절의 특징은 돌판에 율법을 기록한 외적이고 법적인 절기인 반면에, 신약의 오순절은 마음에 기록한 내적이고 영적인 절기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은 이러한 신비한 현상들을 접하면서 '아~바로 이때구나' 하면서 성령 하느님의 임재를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2)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어서서 기도했다. 따라서 본절에서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말이나 설교를 듣고 있을때,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위에 내려앉았다.'(3) 

'같이'(모양의)에로 번역된 '호세이'(hosei)가 '혀'(글롯사이: glossai)를 수식하지 않고, '불'(퓌로스: pyros)을 수식한다.

저자가 직유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이 아니라 '혀'이다. 말하자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라는 뜻이다. 

'갈라지면서'로 번역된 '디아메리조메나이'(diamerizomenai)는 '조각조각으로 쪼개다'  혹은'분배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디아메리죠'(diamerizo)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distributing themselves)이란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 불과 같은 혀들이'(tongues as of fire distributing themselves)이다.

 

혀는 언어와 복음 전파를 상징하므로, 본절은 성령께서 방언을 통한 복음 전파를 위해 각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본절의 '혀'에 해당하는 원어(글롯사이:giossai)와 4절의 '방언'(글롯사이스: glossais)에 해당하는 단어가 같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은 마치 솟아 오르는 불길과 같이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언어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설되어지는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때가 3시(사도2,15)이전, 즉 오전 9시가 되기 이전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방식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에 아침 햇살이 강하게 그들 위에 내리비치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한편, '불'(퓌로스: pyros)은 성경에서 종종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탈출기 3장 2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난 하느님의 임재는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복음 3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례는 세례자 요한의 물 세례와 달리 불 세례라고도 하는 성령 세례였다. 이 구절에서도 불은 성령을 표현하는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요한20,19~23)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성령을 받아라."  (22)


'숨을 불어넣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퓌세센'(enephysesen; he breathed on them)'엠퓌사오'(emphysao)부정(不定) 과거 능동형 3인칭 단수이며,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온다.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창세기 2장 7절 창조사업을 위한 문맥에서,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9절민족의 회복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단어가 요한 복음 20장 22절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에 있다면, 구약 성경의 두 구절은 생명이 없었던 자나 생명을 잃은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2절에서는 육적인 생명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오로지 영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성령을 부여하는 문맥에서 사용된 점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 apostolos)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영적인 능력으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는 복음 전파 사명을 수행해야 할 사도들에게 '죄사함의 권한' 위임을 위한 성령 수용의 명령이 내려진다.

여기서 '성령을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Labete pneuma hagion; Receive the Holy Spirit)에서 명령형이 사용된 것은 성령을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성령'에 해당하는 '프뉴마 하기온'(pneuma hagion; the Holy Spirit)원문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은 사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격적인 측면보다는 성령의 은사, 즉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을 받는 부분을 강조한 것으로서, 바로 위의 요한 복음 20장 23절의 '죄사함의 권한'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labate; receive)'람바노'(lambano)명령형 과거 2인칭 능동 복수이다.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인 성령을 '받아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라' 또는 '머물게 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과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의 죽음이 성령을 오시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셨고 (요한14,16~19), 요한 복음 20장 22절을 보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사죄권 위임을 통해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키셨으며,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때에 성령을 실제로 본격적으로 보내셨다(사도1,9).

 

 

 

하느님의 숨 안에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 숨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아니 역사하심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환히 웃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불꽃 모양의 혀들이 사도들에게 내려앉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다른 언어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몰려든 이들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까? 성령께서는 이처럼 첫 번째 선물로 다른 언어를 알아듣게 하는 은총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같은 말을 하는데도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지혜와 지식의 말씀, 믿음, 병을 고치는 은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그리고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등이지요(1코린 12,8-11 참조).
이어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공동선’을 위함이라고 제2독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공동 이익을 위해 어떤 일에 헌신해야 합니까?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게 해 주신 것이 성령께서 주신 첫 번째 선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올바로 표현하는지, 이 점을 돌아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늘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나의 몸이 진정한 성령의 궁전이 되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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