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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생명의 말씀 (요한 6,60ㄴ-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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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8-25 ㅣ No.123

 

 [연중 제21주일]생명의 말씀 (요한 6,60ㄴ-69)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라며, 그와 그의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한다. (여호 24,1-2ㄱ.15-17.18ㄴㄷ)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순종하라며,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큰 신비인데,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한다고 한다. (에페 5,21-32)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한다. (요한 6,60ㄴ-69)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여호수아24,1-2ㄱ.15-17.18ㄴㄷ)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섰다." (1)

 

'스켐으로'에 해당하는 '셰케마'(shekema ;shechem)는 지명인 '스켐'(shekem)과 '~을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진 목적격 접미어 '아'(a)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스켐을 향하여' 라는 뜻이다.

 

'스켐'은 예루살렘 북쪽 50km, 사마리아로부터는 남동쪽 9km지점의 에발산과 그리짐산 사이에 있는 성읍으로서, 므나쎄 지파와 에프라임 지파의 경계에 위치하였다.(17,7 ; 20,7)

 

여호수아가 이곳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부른 이유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님만 섬기겠다는(24,14.23.24) 계약의 갱신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25절)

 

요르단강을 건넌 후, 온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모세가 명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봉독한 적이 있었던 유서깊은 이곳에서(8장 33절, 34절)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계약 준수를 다짐하는 의식을 갖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스켐은 아브라함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해 온 뒤에 천막을 친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며(창세12,6), 야곱이 천막을 친 곳이기도 하다.(창세33,18 ;35,1-4)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섰다'로 번역된 '와이테얏체부 리프네 하엘로힘'(waitheyatsebu liphne haellohim)에서, '그들이 ~나와섰다' 라고 수동적으로 번역된 '와이테얏체부'(waitheyatsebu)는, 계속적 '와우'(wau)와 '서다', '출두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야차브'(yatsab)의 재귀형 '이테얏체부'(ytheyatsebu)가 결합된 형태이므로, 본문을 번역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하느님 앞에 나왔다' (They presented themselves before God)이다

 

특히 본문에서 '야차브'(yatsab)가 복수형태로, '~앞에' 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 '리프네'(liphne)와 연결되어 사용될 경우에는, 특별한 권위자 앞에 부름받아 나아온 상태를 가리킨다.(여호8,20 ;9,13)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여러 지도자들이 하느님 앞에 부름을 받은 대로 출두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맡겨질 사명에 대하여 언제든지 성실하게 감당할 자세, 신앙적인 각오나 결의가 갖추어졌다는 사실 암시해 준다.

 

한편, '하느님 앞'(리프네 하엘로힘 ; before God)이란 표현은,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인 계약궤나 성막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여호4,13 ; 6,8 ; 탈출16,33 ; 29,26) 따라서 본문에서도 당시 하느님의 계약궤가 스켐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대표를 이곳으로 불러모았다고 보기도 한다.

 

가나안 정복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여호18,1 ;1사무4,1-11) 필요에 따라 베텔같은 곳으로 옮겨진 적도 있었으므로(판관20,27) 당시에는 스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앞'이란 표현이 항상 계약궤와 성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신명4,10 ; 9,18)  이렇게 볼 때, 본문은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신앙을 가지고 나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5)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주님을 믿든, 다른 우상을 섬기든 상관않겠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 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선 절에서, 우상을 제하고 주님만을 섬기라고 강력하게 명령한 사실과 함께 생각할 때, 본문은 반어법적인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냥 주님만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상을 섬기려면 섬겨라.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와 내 집안은 하느님만 섬기겠다' 는 본문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곧바로 주님만을 섬기겠다는 긍정적 응답을 이끌어 내었다.(18절, 19절)


 

 연중 제21주일 복음(요한6,60~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63)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며, 육체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인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하느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육'언제든지 죄에 굴복하므로, 육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육'(사륵스)영적인 측면에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 '돕다', '소용이 되다'에 해당하는 '오펠레이'(ophelei; profits; counts for)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여기처럼 사물에 대해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it is of value; it is of avail)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오펠레이'(ophelei)를 부정하기 위해 '우크~우덴'(ouk~ouden)이라는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육'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성경은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며(로마8,6),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결과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경고한다(에페2,3).

 

'육'(사륵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무익함죄로 기울여지는 성향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게서는 인생을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말은'으로 번역된 '레마타'(remata; words)'레마'(rema)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 '예언들', '명령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rema)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의미한다.

 

'내가 한'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ego lelaleka; I have spoken)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ego)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lelaleka)'랄레오'(laleo)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그 말씀들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단언하신다.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능력이 존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본성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말씀과 성품이 죄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라는 성경의 증거는 그 말씀이 지닌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레미타'(remata)가 있는 곳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와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 복음 6장 68절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에서도 '말씀''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타'(remata)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오늘 복음과 비슷한 상황이나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기가 힘들 때, 미사에 참여하는 것에 싫증이 날 때,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충실함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악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할 때, 의혹과 불신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따르거나 어떤 신을 경배합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릅니까? 아니면 그분을 두고 떠납니까?
복음의 가르침이 딱딱하고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참아 낼 수 없을 듯할 때, “누가 이 모든 것을 생활 규범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단지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밖에 없고 나는 둘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우리는 갖가지 신들과 통치자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돈과 권력, 쾌락과 성, 교만과 이기주의, 허영과 아름다움, 번영과 소비주의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며 생명의 말씀을 주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들 삶 안에서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 주고, 만족시켜 주고, 실현해 주는 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것이 복잡한 가운데 개개인은 오늘날 자주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안팎으로 긴장에 눌려 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분, 그리스도만이 참으로 우리를 구해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끝없이 저물지 않는 충만한 삶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다른 신들을 선호하는 세상에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되새겨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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