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성모신심미사 15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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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8-10-19 ㅣ No.3682

성모신심미사 15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18/10/20

 

 

말씀 부활하신 예수님과 어머니(루카 23,55-56; 24,1-10)

23 55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24 1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3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4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6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7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8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9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10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내 어머니

얼마 전 본당에서 살다가 요양원이나 실버타운 등지로 이사 가신 어르신들을 찾아뵈었습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문제에요……

나이 90이 넘으면 문명의 이기 등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힘으로 움직이고 살아야 해요…….”

저는 그분들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나이가 들어 사는 것 자체가 한쪽으로는 짐처럼 다가오는 생애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특별히,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시점에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가셨는데, 우리에게 그 생명이 진정 신비이며 선물이고 행복일까?’

 

어릴 때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어 마음껏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어른이 되어서 내가 어릴 때 하고 싶었던 좋은 일들을 다 하고 살고 있는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내 생애를 행복이며 선물로 여기고 살고 있는지?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또 어떤 것도 내가 해야만 할 의무가 없을 때, 그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병들어 신음하고 있을 때, 의식조차 없이 누워서 시간만 보내며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을 때, 우리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에 대해 진정 감사를 드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반드시 삶의 마지막이 아닌 일상에, 사람도 일도, 열정과 의지와 힘도 사라지고, 말 그대로 나 혼자 뿐일 그 순간이, 어쩌면 그렇게 그리워하던 주님과 하나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아니, 홀로 주님 앞에 마주 앉아 주님과 함께 진정 하나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외적인 영향이나 장애 없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도 주님과 함께할 좋은 순간이라 기대해 봅니다.

 

 

우리 어머니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돌아가셨기에, 아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생명을 되돌려 주셔서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5-7)

 

빈 무덤 안에 있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에게서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얼마나 기뻤을까! 마리아와 여인들은 설레고 화급한 마음으로 사도들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루카 24,8-10)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은 여인들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누가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제자들은 유다인에게서 투옥과 살해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들려준 소식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으리라고 상상이 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기엔, 한 번도 인간 세계에서 경험한 적이 없어,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다른 한 쪽으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실낱 같은 희망이 샘솟기라도 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제자들 중 모두가 토마처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마태 20,25)

 

탐욕과 실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함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기와 증오 속에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예수님께서는 왜 죽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주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지,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모두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죽음의 의미와 죽음에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그저 제자들의 마음속엔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오르실 때에 그 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언제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 하는 일념만이 새겨져 있었나 봅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할 사명은 망각한 채, 계속 예수님 부활의 확신과 부활 이후에 이어지는 영광 속에 참여할 공과논쟁과 자리다툼 그리고 이익추구에만 골몰하는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소연하십니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7-8)

 

부활의 확신

어쩌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니까 믿는 것이지, 이성으로나 실제로 이해가 잘 안 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도 안 되고, 실제로 느껴지지도 않는데 믿는 이라고 신앙의 신비를 살려니 힘이 듭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과 신앙의 신비에 대해 명쾌하게 이해는 안 가도 주님을 따르는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론상으로는 압니다. 그 이론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하고 녹여서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나 체험에서 나오는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만일 확실한 깨달음이나 체험이 없다면, 기쁘고 행복해야 할 신앙의 신비는 자칫 오류나 혼돈, 부담과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자 목표일뿐만 아니라 신앙의 관건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9-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구원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부활을 향한 새로운 삶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접하도록 허락하고 맡기신 내 생애의 순간순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나간다면, 내 생애가 내겐 더 할 수 없는 선물이 될 것이며, 깊이 감사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거꾸로 내 생애의 순간들을 거부하고 부정적이고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살아나간다면, 내 생애는 내게 커다란 짐으로 다가 온다는 것을, 지금까지 생애의 경험과 믿음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애도 그러하리라.’고 여깁니다.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투신하며,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에서 샘솟는 성령의 힘에 목말라 하는 우리에게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7-12)

 

 

기도

하느님께서 육신 생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나를 내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음으로 내 죗값을 치러주기까지 하시면서,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어주신 우리 인생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우리 믿음 안에서 참 기쁨이며 선물이게 하소서.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주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며 활력이게 하소서.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저희를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전해주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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