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33주일]종말 (마르13,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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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1-18 ㅣ No.135

 

[연중 제33주일]종말 (마르13,24-32)

 

다니엘 예언자는, 재앙의 때가 올 것인데,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다. (다니엘 12,1-3)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 (히브 10,11-14.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연중 제33주일 제1독서 (다니12,1-3)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1)

 

다니엘서히브리서로 쓰여진 부분이 12장으로 끝난다. 다니엘서 12장은 그 중에서 후반부인 7-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니엘이 직접 경험한 네 가지 환시 가운데 마지막 네번째 환시인 10-12장의 마무리 부분이다.

 

본장은 다니엘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삼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일련의 환시의 연속 부분이다. 그런데 앞선 10-11장에서는 페르시아 초기 네 임금과 그리스 왕국의 성립과 분열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 관련된 예언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12장에서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대환난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 및 구원에 대한 신비를 직접적으로 계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잇다.

 

'그때에'로 번역된 '우바에트 하히'(ubaeth hahi ; at that time)는 본장이 직접적으로 11장 36-45절의 내용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B.C. 2 C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의 박해 말기에 국한된 예언이라고 해석하지만, 1-3절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2장의 주제 역시 다니엘서의 큰 주제와 병행한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이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강력하게 제시되는데, 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세상은 악한 통치자가 다스리고 있고, 그 통치하에서 하느님의 의로운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지만, 이들 통치자들에 대한 절대적 주권은 궁극적으로 주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다.

 

따라서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한 통치자를 심판하시고, 신실함을 지킨 의로운 백성에게 큰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제가 다니엘서 전체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본장에서는 종말의 때에도 이러한 일이 있을 것임을 예언한다.

 

즉 전례를 찾아볼 수 없던 큰 재앙이 있을 것이지만(1절),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며(1절), 악한 자들은 영원한 치욕을 당할 것이다.(2절)

 

이러한 메시지는 고난과 핍박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던 다니엘 당시의 하느님의 백성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큰 희망을 줄 것이며, 그들 모두로 하여금 인내하며 최후 승리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한편 본문에서는 종말의 때에 대제후(the great prince) 미카엘이 나설 것이 예언된다. 미카엘이 특히 선민을 위해 싸우는 천사로 소개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네 백성의 보호자'에 해당하는 '하오메드 알 빼네 암메카'(haomed al bene ammeka ; who protects your people)는 문자적으로 '네 백성의 자손들 편에 서는 자'(who is standing up for the sons of my people)라는 의미이다.

 

다니엘서 10장 13절과 21절에도 나오지만, 세상 나라 페르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탄, 가브리엘 천사를 21일 동안 막았던 악한 영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는 천사가 바로 미카엘 천사이다.

본문에서 미카엘의 역할 역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그때에 미카엘은 주권자 주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일어날 것이다.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나라가 생긴 이래'로 번역된 '미헤요트 꼬이'(miheyoth goy)에서 '꼬이'(goy)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창세10,5; 26,4).

본문에서는 정관사없이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은 어떤 한 민족(a nation)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어느 민족이든지 관계없이 보편적인 민족(any nation; nations)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일 경우는 선민일 것이지만, 후자일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일 것이다. 보통 학자들 가운데는 후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재앙과 유사한 재난에 대해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올리브 산 설교 가운데 있는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고 결코 없을 것이다'는 표현(마태24,21)과 더불어

그 환난이 세상 모든 곳에 걸쳐 나타날 것임을 증언한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 '꼬이'(goy)는 단순히 선민만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보편적으로 포괄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환난은 선민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대 환난(the great tribulation)이 될 것이다. 그 환난의 고통은 너무나 커서, 하느님께서 그 환난의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마태24,22).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에서 '그때에' 문맥상 종말의 대환난이 끝나는 때를 지칭한다. 그때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 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간접적으로 드러나지만, 2절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네 백성(중) 책에 쓰인 이들'이란 표현은 간접적으로 '책에 기록되지 않은 백성'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구원은 오직 '그 책에 쓰인 백성' 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에서 '그 책'(빳 쎄페르; basepher ; in the book)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생명책이다(묵시록20,15; 21,27).

 

그런데 '그 책에 쓰인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지금까지 다니엘은 시종일관 선민과 관련된 예언을 했기 때문에, 본문의 '네 백성'(암메카;ammeka;your people) 역시 선민을 우선적으로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원사적 측면에서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묵시21,27)  여기의 '네 백성'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신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까지 다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희망 속에 하느님을 찾아가는 모험  
 

기원 전 2세기부터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들, 박해 등의 묵시문학의 표현을 애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대 유대 묵시문학의 언어를 빌어 세상 종말에 대해 전해줍니다(13,24-27참조). 나약한 인간에게 불확실한 미래와 종말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3장 서두에서 로마 정치권력과 유다 종교권력이 결탁하여 드러났던 타락과 불의를 거침없이 비판하시며 종교권력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3,31)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 권력과 부, 세속적인 유혹들에 맞서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결코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기존 질서의 붕괴, 인간 욕망이 만들어낸 불안한 미래는 하느님 안에서 희망의 표지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수난을 받고 죽으시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선포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욕구충족과 소유에 매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거나, 자기 힘으로 미래를 보장하려 하고 자신이 정한 기대치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칠수록 실망이 커가고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오로처럼 박해를 받으면서도 모든 일을 하느님 손 안에 미래를 맡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인생을 허비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의 97%는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실행하기에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데 근심 걱정과 탐욕 때문에 불안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까봐 각종 보험에 가입하고, 많은 돈을 저축해놓고도 좋은 일에 쓰는 것에 인색하며, 건강 걱정 때문에 건강보조식품을 챙겨 먹느라 신경을 쏟는 것은 자기만의 헛된 성전을 짓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능력을 키우고,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고 자신을 알리는데 많은 시간을 쓰며, 자기 힘으로 안전한 미래를 확보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신앙인은 인간의 시선이나 기대, 세속의 가치나 재물에 집착해 헛된 성전을 세우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 희망이며,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안에 우리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이미 우리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있는 참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영원히 존속하기에, 우리는 늘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눈으로 모든 피조물과 다른 이들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며, 주님께서 부르시고 주시는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순례는 사랑과 정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한 모험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의 변화를 보며 여름이 옴을 알아보듯 (13,28) 영의 눈으로 시대 징표를 읽어, 나 자신과 교회공동체, 그리고 이 사회 안에 자리 잡은 헛된 성전을 과감히 허물 때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두려운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의 선물로 다가올 것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누리는 형제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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