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사순 제1주일] 광야 유혹 (루카 4,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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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 광야 유혹 (루카 4,1-13)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주신 수확의 맏물을 바치며, 주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신명 26,4-10)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로마 10,8-13)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다. (루카 4,1-13)
만나의 기적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신명26,4-10)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8-10)
신명기 26장 8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들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신 초자연적 역사로 가능했음을 다섯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강한 손', '뻗은 팔', '큰 공포', '표징', '기적' 과 같은 생생한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큰 감동을 받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신명기 26장 8절에서 '공포'로 번역된 '베모라'(bemora)는 '~로써'라는 의미를 가진 수단의 전치사 '뻬'(be)와 '두려워하다'란 의미의 '야라'(yara)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모라'(mora)가 합하여진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큰 두려움으로써' 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하느님의 표징과 기적과 대등한 표현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또한 이 단어가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표징에 대해서도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두려움을 일으킬 만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행사나 표징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신명34,12).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로 번역된 '와요치에누'(wayotsienu)는 '와우'(wau) 접속사와 '밖으로 나가다' 란 의미를 가진 '야차'(yatsa)동사의 사역형 미완료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합하여진 말이다.
따라서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가 저희를(우리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로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당신 백성을 세상의 노예된 상태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당신에게로 향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은 과거에 머물던 세상과 현재의 세상을 뚜렷이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지녔던 옛 모습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신 새로운 세상에서 새 모습을 입고 구원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낳게 한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을 데리고 오시어'
여기서 '그리고 저희를 ~ 데리고 오시어'로 번역된 '와예비에누'(wayebienu)는 '와우'(wau) 접속사와 '오다'는 의미인 '뽀'(bo)의 사역형 미완료에 3인칭 단수 주격 접미어 및 1인칭 복수 목적격 접미어가 합하여진 말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리고 그가 저희를(우리를) 오게 하였다' 이다.
여기서 '와우' 계속법이 의미하는 것은 신명기 26장 8절에서 하느님께서 표징과 기적과 큰 공포와 강한 구원의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밖으로 끌어낸 목적이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새 성경은 신명기 26장 8절과 9절에 사용된 주동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와 '데리고 오시어'로 번역했는데, 원문도 '밖으로 나오게 하다'와 '오게하다' 란 구별된 단어를 사용하여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다. 즉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목적을 확연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로 번역된 '앗타'(atha)란 말 뒤에는 '보라'는 의미를 가지는 '힌네'(hinne)가 따라나왔다. 따라서 '앗타 힌네'(atha hinne)는 '이제 보십시오'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 경배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저희가 ~ 가져왔습니다'로 번역된 '헤베티'(hebethi)는 '오다'라는 뜻의 '뽀'(bo)동사의 사역형 완료 1인칭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내가 인도하였나이다' 이다. 이 동사 '헤베티'의 어근은 신명기 26장 9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오게 할 때 사용된 단어 '와예비에누'(wayebienu)의 어근과 동일하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수확의 맏물)을 하느님 대전에 가져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신 것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신 은혜를 철저하게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가운데 보답하는 성실한 반응이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너희는 ~경배드려야 한다'로 번역된 '웨히솃타하위타'(wehishethahawitha)에서 원형은 '구푸리다'는 의미의 '샤하'(shaha)이지만, 본문에서는 '샤하'(shaha)의 재귀형 완료 2인칭으로 쓰였으므로, '너는 스스로 몸을 엎드려야 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동사의 실례를 살펴보면, 약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 스스로 엎드리는 문맥에서 사용되거나 (창세37,9; 1사무24,8; 2사무9,8), 사람이 하느님 혹은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여호23,16; 1열왕9,6; 2열왕5,18; 19,37).
경배는 상대의 주권적 명령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하며, 그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대전에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적으로 하느님을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경배가 수확의 맏물(첫 열매)을 드리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경배는 특별히 그 열매를 하느님께 드린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사순 제1주일 제2독서 (로마10,8-13)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는 '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와 '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과 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 '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를 '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퀴리오스'(kyrios)는 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②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④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는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를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히브리어 '레브'(leb)와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곧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나 '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 허물어져 폐허가 된 성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그곳은 한때 그 권세와 덕망이 사방천리를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청소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이 이렇게 된 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이란다.” 젊은이가 놀라서 “네? 그건 잘한 일인데 어째서?”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좋아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네!” 그렇습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 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을 보면 “악마는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4,13)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이겨낼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힘과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유혹을 통해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증명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유혹을 통해서 이뤄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부와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 못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더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 비춰야 합니다. 유혹과 시련에서 지면 보통인물이 되고 유혹을 이기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넘어가면 달콤한 죽음이요, 넘기면 쓴 보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하고 말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기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27,42)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 강도까지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23,39)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결국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예수님의 처신이 바보같이 보였지만 결국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저러한 소리가 나면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확인해서 콧대를 꺾어주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유혹의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유혹도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혹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유혹을 통해 내 자신을 볼 수 있고 더 큰 성숙의 기회로 만드는 은총의 날들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의 배고픔부터 해결하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십이라는 수는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뒤 하늘이 열려 밤낮으로 비가 내리며 땅을 씻어 냈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창세 7,12.17 참조), 산봉우리들이 드러난 뒤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려고 기다린 기간도 사십 일이었습니다(창세 8,6 참조).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려고 산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탈출 24,18 참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한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탈출 16,35; 민수 14,34 참조). 이렇게 보면 사십이라는 수는 정화의 시기, 기다림과 준비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정찰대를 보내어 사십 일 동안 정찰합니다(민수 13,25 참조).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칼렙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구원을 봅니다. 또한 요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에 심판을 선포하신 뒤 사십 일 뒤에도 그들이 변화가 없다면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요나 3,4 참조). 이렇게 보니 사십 일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심판을 준비하는 시기가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저버리게 하는 유혹의 홍수 속에 자주 빠지며 살아갑니다.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번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모든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