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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던 것입니까 아니면 않았던 것입니까? -사도행전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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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9 ㅣ No.163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사도행전 9,9에서,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던 것입니까 아니면 않았던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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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9,1-20) 전문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6503&gomonth=2015-04-24

(발췌 시작)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2024-30-27)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 NAB: "Who are you, sir?"; 주성 성경 주석을 필히 참조하라.]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이상, 발췌 끝)

 

1-2. 우리말 표현에는, "못하다""않다" 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다행이지만, 그러나, 예를 들어, 영어 표현에서는 이들 둘 다를 각각 나타내는 표현은 없고, 파생되는 강조의 표현들 (그러나, 예를 들어, 동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를 하는 강조는, 결코 서쪽으로 나가가는 것을 도외주지 못함을 염두에 두라)을 제외하고는, 이들 둘 다를 나타내는 표현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문장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1.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사도행전 9,9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Y3.HTM

(발췌 시작)
9 For three days he was unable to see, and he neither ate nor drank.

 

9 사흘 날들 동안에 그는 볼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는 먹지도 않았고 그리고 마시지도 않았다.

(이상, 발췌 및 졸번역 끝)

 

1-1-2. 그리고 다음은 RSV(Revised Standard Version) 사도행전 9,9 전문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3_fri.htm

(발췌 시작)

[9] And for three days he was without sight, and neither ate nor drank.

 

[9] 그리고 사흩 날들 동안 그는 시력 없이 지냈으며, 그리고 먹지도 않았고 그리고 마시지도 않았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3. 다른 한편으로, "못하다""않다" 의 주된 차이점은, 본인 탓이 아닌 타인의 의지(will)에 의하여 강제된 것인가("못하다"의 경우) 아니면 당사자의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에 의한 것("않다"의 경우)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나타내는 표현이므로, 위의 질문 1은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단히 유감스렵게도, 예를 들어, "주석 성경" 에는 사도행전 9,9에 대한 주석은 없으며, 따라서, 여기에서 왜 "않았다" 로 번역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게시자 주 1-3: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의 견해는 어떠한지요?

 

1-4. 그리고 더 나아가,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여, 사도행전 9,9에 대한 교황정 홈페이지 제공의 문헌들과 가롤릭 교회의 전통적 주석들을 찾아 본 바에 의하면, 아래의 제2-1항에 발췌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9-407년)의 좋은 내용의 주석 이외는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는데, 이것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5월 1일]

1-5. 더구나, 다음에 있는, 사도행전 9,9의 그리스어 어원들을 들여다 보아도, "못하다""않다" 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biblehub.com/lexicon/acts/9-9.htm

http://biblehub.com/greek/3756.htm ["새 번역 성경" 사도행전 9,9에서 "못하였다" 로 번역된 표현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

http://biblehub.com/greek/3761.htm ["새 번역 성경" 사도행전 9,9에서 "않았다" 로 번역된 표현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

[이상, 2015년 5월 1일자 내용 추가 끝]

 

2.

(질문 1에 대한 답변 시작)

 

게시자 주 2: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위의 질문 1을 받고서 즉시 드린 답변은 아래의 제2-2항에 있습니다.

 

2-1. 다음은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 on DRB 에 주어진 사도행전 9,9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124.html

(발췌 시작)

Ver. 9. Three days. During the time, he neither eat nor drank, to testify his sorrow for his past conduct. He likewise spent the time in prayer, to prepare himself for the reception of grace. (St. Chrysostom, hom. xix.)

 

제9절. 사흘 날들. 이 시간 동안에, 그는 자신의 과거의 처신에  대한 자신의 후회(sorrow)를 입증하기 위하여, 먹지도 않았고 그리고 마시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은총의 수여를 위하여 스스로 준비하고자, 이 시간을 기도 안에서 보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Chrysostom, hom x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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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 영어본 발췌문의 출처는 다음에 있다: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b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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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2. 다음은 위의 질문 1을 받고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즉시 드린 답변이었습니다:

 

2-2-1.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았던 자들 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직접 회심(conversion)을 강요당하였던 자가 단 한 명 신약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오로의 경우(사도행전 9,1-20)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바오로의 회심은, "윤리적 기적" 의 한 예(example)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30일]

그리고 혹시 도움이 될까하여 추가로 말씀드립니다만, 세 가지 종류의 기적(miracles)들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 중의 참고에 안내되어 있는 바를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2.htm

[이상, 2015년 4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 2-2-1: 아와 같이, 사도 바오로에게서 처럼,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예상 밖의 사건이 자신에게 요구/요청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2-2-2.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강제로 회심을 당하자 마자, 성 바오로는 자신이 그 순간까지 범하였던 죄들을 알아차리고, 회심(conversion)과 함께, 즉시 회개(repentance)와 참회(penitence)를 시작하여 사흘 동안 계속 하였던 것인데, 그가 유다교의 바리사이로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참회와 관련하여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정화하기 위하여, 회개/참회의 기도와 단식을 사흘 동안 계속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질문 1에 대한 즉답 끝)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5월 3릴]

게시자 주 2-2-2: 사도행전 9,9에서 사울이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언급사도행전 9,11 에서 "사울은 지금 기도하고 있는데" 입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바로 이 절에 근거하여,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9-407년)도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주석을 남겼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15년 5월 3일자 내용 추가 끝]

 

2-3. 바로 위의 제2-2항에 이어지는 더 자세한 설명으로서,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88.htm [제목: 오늘은 재의 수요일] <----- 필독 권고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3.

사실, 바오로가 사흘 동안 하였던 회개/참회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진행되는, 소위 말하는, 상등통회(perfect repentance/contrition)였다는 생각입니다. 상등통회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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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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