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성당 게시판

뿌리가 나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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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순 [husac3] 쪽지 캡슐

1999-03-20 ㅣ No.48

 

       뿌리가 나무에게.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먼 손 뻗어 어둠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은 눈으로 바늘 끝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 몸으로 부등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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